결정적 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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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 양정훈
- 작성일 : 04-11-22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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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기 전역한 후 또 다시 신병으로 입대하는 꿈입니다. 사병 제대 후 군종 장교로 다시 입대하는 신부님이나
목사님은 봤어도. 거 참, 아무리 꿈이라지만 속터집니다. 다시 졸병이 되어 얼차려받고, 성냥개비나 박격포로
도수각개 16개 동작 신고한 후, 부동자세로 노래 한방 장진하여 지정곡 이미자를 뽑아 대는 기분이란.
꿈 속에서도 계속 “이건 아니야, 무언가 잘못된거야” 하지만, 상황은 시정되지 않습니다.
아, 이건 국가적으로도 잘못된거야!
홍천에 있는 보병11사단.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화랑사단이라고도 하고 “와루바시 사단” 이라고도 합니다.
전방 예비사단이라서 밥 먹는 시간 빼놓고는 제대할 때까지 일 년 내내 기고, 뛰고, 넘고, 쏘고, 나르고, 파고,
던지는 일이 모두입니다. 사단 FTX나 연대 RTC 때면 완전 군장메고 “와루바시” 처럼 생긴 두 다리로 천리 행군,
24시간 무취침 산악 행군에 나서 인제 가면 원통해서 언제 오느냐는 인제, 원통의 험한 산을 제 집 문지방 드나들듯
들락거려야 합니다.
제 보직은 와루바시 사단 안에서도 제일 피곤한 소총분대 3.5인치 로케트포 2번 탄약수였습니다. 먹어도 배고프고,
자도 졸리고, 쉬어도 피곤하기만 한 졸병 생활이었습니다. 똥포 탄약수라 개인화기는 가벼운 칼빈소총이었지만,
허구 헌 날 있는 행군 훈련에 나가면 고참의 무거운 M1 소총은 당연히 제 차지였습니다. 천 근 같은 군장 배낭 위에
고참의 똥포까지 가로 질러 메고 60도 경사 산악을 오르락 내리락. 야간에는 8부 능선 가파른 곳의 꽁꽁 얼어 버린 땅에
손바닥만한 야전삽으로 위장 취침호를 파고, 위장 검뎅이 칠한 얼굴로 꼬부려 누워 살을 에는 겨울밤의 밝은 달을
쳐다보는 기분이란.
3.5인치 무반동 로케트포에 질려서인지, 35미리 스미크론 애스패리칼 렌즈는 보유하고는 있지만, 잘 가지고
다니지 않습니다. 작년엔 아예 2번 탄약수인 막내 아이에게 줘 버렸습니다. 35미리를 들고 나가는 날에는
강원도 험한 산맥 그림처럼 가득 가득 밀려오는 파인더에 헤매기만 하다가, 결국 제대로 된 필름 한 컷 얻지
못하고 “우로 어깨 카메라”하고 집에 돌아 옵니다. 군대 사격장같았으면 철모 위에 소총을 거꾸로 세우고
쪼그려 뛰기를 수도 없이 해야 했을 것입니다.
정식 훈련 때나 비상이 걸리면 탄약 하사관이 박스에 든 칼빈실탄을 지급했습니다. 그 땐 전시 실탄 지급 정량을
“1기수” 라고 했는데 제 기억에 1기수가 20여발 수준이었습니다. 그거 가지고 전쟁터에 나가 부디 싸워
이기라는 것이지요. 625때 방망이 수류탄 2개만 달랑주고 돌격해 싸우라는 중공군보다야 낫지만,
물오리가 맞아도 죽을 것 같지 않은 칼빈에 실탄이라고는 고작 그 정도이니. 어쩌겠습니까.
그 땐 나라가 지지리 가난했으니.
정렬 대오로 돌아와 탄창에 실탄을 한 발 한 발 꽂아 넣으면서 이런 생각을 하였습니다. 만약 전투가 벌어져
실탄 정량을 다 쏘고 나면 쭉지빠진 새 신세로 적에게 사살되거나 잡힐터인데 어찌할 것인가. 불명예스러운
상황에 빠진다면? 일대일 마주친 상황에서 감당할 수 없는 적이 육박전으로 덤벼 온다면?
많은 생각 끝에 아무리 어려워도 실탄 한 발은 끝까지 남겨 두기로 하였습니다. 결정적인 순간을 대비하여.
적에게 쓰든, 나에게 쓰든 어쨌든 결정적 순간에 쓰기 위하여. 결심을 하고 항상 예비했지만, 운좋게
제 군생활 중 그런 실전 상황은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사진 외출 때 전 대개 한 롤은 장진하고 한 두 롤 더 휴대하고 나갑니다. 대부분 다 못 찍고 돌아 오지만,
갑자기 헛 것이 보이는 날에는 흥분하여 이것 저것 슈팅을 많이 합니다. 그 때마다 전 군대 시절을 떠올리며
스스로에게 말합니다.
“흥분하지마. 가지고 온 실탄은 정해져 있어. 지금 이 헛 것이 아무리 좋아도 한 두 컷은 남겨 두어야 해.
집에 도착할 때까지 무슨 그림이 네 앞에 닥칠 줄 모르지 않아?”
전 습관적으로 마지막 한 두 컷은 꼭 남겨 옵니다. 브레송 선생만큼 보고 관찰하는 힘이 없거나, 사진에 대한
진지함이 없거나, 리얼리티를 삶에서 잘 발견하지 못해서인지 모르지만, 지금까지 한 번도 결정적 순간을
만나 예비한 필름 컷을 사용해 본 적이 없습니다. 집에 돌아와 남겨온 귀한 실탄을 허공에 빈 셔터로 날리며,
“오늘도 꽝이야” 해 버리고 말지만.
비록 꽝이 되어 버렸지만, 집으로 돌아 오는 길에 만나는 결정적 순간에 격발할 필름이 없다면 얼마나 후회하겠습니까.
어찌 압니까. 영면하신 브레송 선생께서 벌떡 일어나 제 손을 잡고 이리 말씀해 주실지.
“난 머리와 눈과 마음을 항상 긴장시키며, 아마추어라고 스스로 생각하며, 거리를 헤매며 사진을 찍었소.
내 눈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어떤 상황의 진수 모두를 단 한 장의 사진에 잡아 두기를 간절히 원했지.
쉽진 않았소. 어느 때에는 내 라이카에 필름이 떨어진 적도 있어서리....^^ 당신의 마지막 필름이 소중한
순간에 쓰일 날이 반드시 있을게요. 그리고 거 잡아 가지도 않는 군대 두 번 가는 꿈, 그만 꾸시오. 나도 군대
생활 험해서 포로까지 되어 보았소. 풀려 났다가 다시 포로로 잡힌 꿈을 수도 없이 꾸었지만, 늙으니
나 브레송이요 해도 잡아 가질 않습디다. 잡아가 보아야 민방위로도 못 쓰고, 애꿎은 식량만 축낸다고.”
브레송 선생, 부디 제 사진에 힘을 주소서…
댓글목록
이진형2님의 댓글
이진형2저도 잘 보았습니다. 참 고생하셨네요. 아직도 꿈을 꾸신다니... 좋은 자산이 되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김두성님의 댓글
김두성
재미 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글 솜씨가 보통 이상입니다. 자주 좋은 글을 보여 주시기 바랍니다.
양정훈님의 댓글
양정훈
저도 좋아하는 곡입니다. 영어로는 I lived for art , I lived for love 쯤 되나요.
사실 칼라스만큼 인생을 격정적으로 살다간 사람도 없을 겁니다.
칼라스의 인생 자체가 그가 부른 열정적 아리아만큼 열정적이었지요.
칼라스를 더 좋아하시려면 하일라이트판이지만 (칼라스판으로는 드물게 스테레오 녹음임)
EMI에서 나온 롯시니와 도니제티 아리아 모음판을 들어 보십시요.
칼라스가 왜 세기의 마돈나인지, 왜 죽은 칼라스가 살아 있는 EMI를
먹여 살리는지 알 수 있습니다. ^^
윤종현님의 댓글
윤종현
양정훈선생님의 글은 저의 가슴속에 다가왔습니다.
저 또한 출사를 나갈때는 꼭 탄약을 이렇게 가지고 갑니다.
positive : e100vs , RVP
B/W : TX 4통......
하지만 요즘은 출사를 나가서 한통을 찍기가 어렵습니다.
휴....저 또한 결정적 필름이 아쉬움이 남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하석준님의 댓글
하석준
3.5인치 로켓포때문에 35mm를 넘겨버렸다는 부분에서도 웃음지었지만,
죽은 칼라스가 EMI를 먹여살리고 있다는 부분에서도 끄덕였습니다.
언제 일산 호수공원에서 오프모임 한 번 해야겠군요
류중래님의 댓글
류중래
양선생님, 지난 토요일 즐거웠습니다. 저도 오페라는 쪼~금 좋아하는 편으로 마리아 칼라스의 내지르는 음성은 저에게는 일종의 "마약"과 같습니다. 제 7살먹은 아들은 마리아 칼라스를 좋아하기는 하는데 오페라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마리아 칼라스"라는 레스토랑을 좋아한답니다. 분위기가 맘에 드나 봅니다.
혹시 칼라스를 듣고자 하는 분들을 위해 칼라스의 진면목을 들을 수 있는 오페라 타이틀을 몇개 올려봅니다. (...그런데 라이카클럽에서 이런 글도 될지???)
PS. 아래 타이틀 중 칼라스의 라트라비아타는 음질이 극도로 나쁘기 때문에 처음들으시는 분께는 비추입니다.
강준호님의 댓글
강준호
"화~랑"
칼빈소총을 사용하셨다니, 저보다 당연히 선배님이신거 같습니다.
저 역시, 11사단에서 군생활을 했습니다.
아마 다른분보다 양선배님의 글을 가슴으로, 아니 두다리로 느끼며 읽을수있었습니다.
저도, 첫휴가 나와서 청량리에서부터 택시를 타고 서초동집에 도착해서, 집에서 돈을 갖고 나와 택시비를 내려고하니, 택시 아저씨께서 씩~ 웃으시며 부대마크보니까 젓가락부대 같은데, 그냥 들어가라구, 고생한다구....거기 어떤데인지 안다구.... 결코 기분이 좋지만은 않은 기분으로, 하필이면 이런 부대에 배치를 받았냐...하는 기분으로 어깨를 늘어뜨리고 집으로 들어갔던 기억이 나네요..
유재병님의 댓글
유재병
잘 다듬어진 단편소설같습니다.
읽는 즐거움도 있었지만 읽고 난 후의 여흥이 더 진하게 남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양정훈님의 댓글
양정훈
류중래님, 저도 토요일 아주 즐거웠습니다. 그 날 베버를 말 한 것 같은데 롯시니를
착각한 것 같습니다. 롯시니의 La Cenerentola, Gugliemo Tell, Semiramide 등에서
칼라스가 부른 아리아를 들어 보시지요. 그만입니다.
강준호님, 저는 13연대 (사자부대)에서 근무했습니다. 반갑습니다. 그렇지요.
아마 경례구호가 "화랑" 이었지요. 전반기 군대생활은 소총부대에서 하다가,
제대 앞둔 후반기에는 원주의 군사령부 부관부에서 근무했지요. 원주 근무는
너무 편해서 지금은 거의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만, 홍천 근무는 아직도 생생합니다.
요즘도 여름이면 홍천 북방면에 가끔 야영하러 갑니다. 군대 A텐트가 그리워
동대문 시장에서 하나 구했지요. ^^
류중래님의 댓글
류중래
이태영님, 양선생님께서 말씀하셨듯이 EMI가 칼라스를 팔아도 정말 끈질기게 팔고 있읍니다.
옛날 CD를 겉 모양만 바꾸고 팔고 또 팔고 remastering 해서(음질 개선효과 의심?) 또 팔고... 그런 식입니다. 사진으로 올린 건 EMI에서 칼라스 시리즈로 나왔던 음반들입니다. 요즘도 팔고 있지요.
최성호님의 댓글
최성호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군대 이야기에 꼬리 한번 내리고, 마리아 칼라스 등등의 화제에선 조금만 밖에 나갔다 오겠습니다만, 좌우지간 선배님 뵈러 빨리 일산으로라도 날아가야 겠습니다. ^^
좋은 하루되세요 !!!
이상훈(dada)님의 댓글
이상훈(dada)
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저도 '민방위로도 못 쓰고, 애꿎은 식량만 축낸다고...'에 등록한 사람입니다.^^
선생님의 글을 읽으니 군시절이 아련하게 떠오르네요. 전 2군단 통신대에 근무했었지요.
저도 어렸을적 르네상스, 아폴로를 드나들 때 부터 칼라스를 무척이나 즐겨 들었구요.
그런데 칼라스는 볼에 눈깔사탕 하나 넣고 노래하는 것 같지 않습니까?
뭐 그래도 양선생님의 아바타 사진 브로마이드가 제 작업실 한켠에 지금도 걸려 있답니다.
아침마다 윙크를 보내도 도도하게 눈만 내리깔고 있네요.
임병훈님의 댓글
임병훈
양선배님을 앞으론 양브레송님이라 불러야겠습니다.^^
재미있는 글 잘 봤습니다.
저는 깃발 뺏긴 5사단에서 고작 100킬로 행군한 게 단데
천리행군을 하시다니 대단하십니다.^^
정말 고생 많이 하셨네요.
그래도 짐은 저보다 덜 무겁게 들고 다니셨을 듯...
저는 화기소대에서 60밀리 포 들고 다녔습니다.
그 버릇이 남아서인지 한때는 삼각대를
포다리 무게쯤 나가는 걸로 지고 다니기도 했습니다만
요즘 M 카메라만 달랑 하나 들고 다니니
정말 홀가분하고 좋습니다.
라이카 덕에 호강하는 셈이죠.
좋은 글 감사합니다. 옛날 생각 한참 했습니다.^^
김윤기님의 댓글
김윤기
앗!! 화랑!!!
저도 11사 출신임니다.
북방에 있는 13연대 2대대 8중대에서 81밀리 박격포 말번 탄약수로 근무하다가..
(아마 그래서 35밀리만 고집하고 중형을 안쓰는지 모르겠습니다. ^^)
그림 잘그린다고 뽑혀서 연대 정보과에서 근무했더랬습니다.
그러고보니 3.5인치면 전투 지원중대 아닌가요?
같은데서 군무하신듯 합니다. (북방면)
한마디로 박박 겼었지요...
갑자기 홍천의 산하가 생각 납니다.
그쪽으로는 오줌도 안누겠다고 했었는데......
아참... 저보다 한참 선배시군요. 저는 76년 4월에 입대 했습니다.
화~ 랑!!!
김기현님의 댓글
김기현
양선생님, 참 대단하십니다.
저는 제가 몇 사단에서 군복무를 했는지도, 지금 가물가물하군요.
하긴 군대 생활이 너무 편했습니다. 대전에서 근무를 했지요.
매주 수요일 마다, 유성 온천으로 목욕을 가곤 했으니.....
대덕연구단지가 있지요. 그곳에는 은페된(?) 기계창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말하기를 예전에 박정희 대통령이 핵무기를 개발하기 위해서 만든,
무기 개발 연구소라고 하더군요...
2년이 조금 넘는 동안의 군대 생활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부지런히 면회오던 마눌을 만났던것 밖에는 없군요.....
김철근님의 댓글
김철근
11사단근무 하셨군요.
같은 부대는 아니지만 이곳에서 군생활에대한 글을 읽고보니 저도 홍천이 그립군요.
전 70년7월에 입대하여 11사단에근무하고 73년5월에 그당시 힘든 병장달고 (제부대에선 저혼자달았죠)제대하였죠.
저하고 군생활이 엇비슷 하겠네요.
전 미군이쓰던 M1소총을 제대 할때까지 메고다녔으니까요 ^^*
어쩼던 반갑습니다.
일산 사시면 언제한번 뵐수있겠군요.
글 잘읽었습니다...
주기철님의 댓글
주기철
역시 군대 이야기를 하셔서인지 리플이 굉장하군요^^.
사진에 대한, 그리고 음악에 대한 티나지는 않지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열정을 지니신 양선생님을 느낍니다. 잠깐 뵌 기억으로는 상당히 조용한 분이신 듯 했는데 그 무지막지한 곳에서 꽤나 고생을 하셨군요. 탄알 하나를 남긴 사연과 필름 한두컷을 남긴 사연을 보며 남달리 조금 더 진지하게 사시는 분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 목사님 홈피에서 좋은 글 감사합니다.
자주 뵙지는 못하지만 앞으로도 더욱 양선생님과 좋은 교제 기대합니다.
올 겨울에는 좋은 피사체들이 가깡이에 늘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가져보며
이만 줄입니다. 추워지는 겨울 건강하십시오.
주기철 드림.
유재헌님의 댓글
유재헌
홍천 북방면으로 야영을 다니신다고 하셨는데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시겠습니까?
저 역시 야영을 좋아하는데 점점 갈 곳이 없어져 거의 한 곳(홍천강 소남이섬)만 다녀 다른 곳을 찾지만 발품팔아도 거주민의 눈치 안 보면서 찻길을 피해 있는 곳을 찾기가 무척 힘듭니다.
좋은 정보 부탁드립니다.
양정훈님의 댓글
양정훈
유재헌님,
홍천에는 야영하기 좋은 곳이 너무 많습니다.
먼저 휴양림이 여러 곳 있는데 취사시설과 야영시설이 잘 되어 있어 아주 편리합니다.
이를테면 화촌면의 가리산자연 휴양림 (033-435-6034) 같은 곳이지요.
또 화촌면 주음치리의 주음치 계곡도 아주 좋습니다.
홍천시내를 지나 44번 국도를 계속 타고 가다가 6번 지방도로로 들어 가면
있는데 인적도 드물고 물도 깨끗하여 아주 좋습니다.
야영이 귀챦으시면 6번 도로에 붙어 있는 백락사라고 조계종 절이 있는데
재워달라 청하면 주지스님이 군말없이 자고 가라 합니다.
밤새 울어 대는 소쩍새 소리, 새벽 예불 소리, 풍경 소리 들으며
색다른 산사의 밤을 보낼 수 있습니다. 사진 찍을 만한 곳도 많구요.
보다 좋은 곳은 북방면 소재 엄송골 계곡입니다. 춘천과 홍천의 경계를 만드는
대룡산 뒷편의 계곡으로 일반인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청정 계곡입니다.
홍천시내에서 11사단사령부가 있는 북방면 소매곡리 쪽으로 가시다가
8번 지방도로로 가시면 됩니다. 복잡하시면 강재구공원을 물으셔도 됩니다.
강재구공원을 지나 성동천을 따라 도로 끝까지 가면 북방리 마을회관이 나오고,
그곳에서 다시 비포장도로로 2키로쯤가면 엄송골계곡이 나옵니다.
엄씨와 송씨가 많이 살았다고 해서 엄송골인데 사방이 온통 계곡입니다.
엄송골 끝집 (소를 키움, 할아버지가 아주 자상 친절하심) 옆 적당한 곳에
차를 세우시고 가시면 됩니다. 정말 한적하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곳입니다.
전 계곡을 타면서 땀이 나면 알탕도 하고 (벌거벗고 완전 나체로 호에 들어가
찬 계곡물을 즐기는 것) 바위에 벌렁 누워 한 잠 늘어지게 자기도 하였습니다.
계곡이 여러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흐르기 때문에 자기 마음에 꼭 드는 곳을
누구든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야영은 계곡 안에서 하셔도 되고, 계곡 초입에 있는 높고 넓은 분지에서
야영하시면 더욱 좋습니다. 비박텐트에 누워 하늘 가득한 별을 보는 기분,
풀벌래 소리..경험해 보지 못한 분은 그 기분 모르실 겁니다...^^
아직은 사람 손을 덜 타 깨끗한데, 알려지면 훼손되고 더러워질까 걱정도
됩니다.
유재헌님의 댓글
유재헌좋은 정보 감사드립니다.
박명균님의 댓글
박명균
아이고 그런 악몽은 나만 꾸는게 아닌가보네요.
다시 군대 붙들려 가는 꿈 꾸면 오줌 지립니다.
자지러지다가 꿈 깨면 그리 좋을 수 없더군요.
고생도 별로 안했는데도 말입니다.
(충북 증평 망통사단 출신-37사단)
벌써 입대 하던 때가 30년이 넘었네요.
맨정신에 생각하면 재미도 있었는디.......
강태형님의 댓글
강태형
화랑 !
몇년전의 글에 댓글을 달아놓는 것이 좀 그렇기도 하지만...
11사단 고참님의 글에 이렇게 경례구호 붙여봅니다..
김종오님의 댓글
김종오
양정훈 선배님,
몇년이나 지난 글이지만 다시 보아도 재미있습니다.
특히 군대를 다시가는 꿈은, 누구나가 한번씩 경험하는 가위눌림인 모양입니다. ^^;
강웅천님의 댓글
강웅천
강태형님 덕분에 재미있고 좋은 글 다시보게 됩니다.
그간 3.5인치 로켓포의 악몽은 잊고 35mm를 다시 찾으셨는지 궁금해집니다. ^ ^
저는 그 포 덕분에 휴가를 많이 가서 그런지 35mm만 5개나 꿰차고 있는데
양선배님 뵙게되면 얼른 숨겨야겠군요
글 잘 읽었습니다.
김성화님의 댓글
김성화
아 그립습니다
1999 4월 4일에 11사단 13연대 2대대 강재규 대대에 있어다가
연본으로 갔는데 1999년 6월 6일에 전역을 했죠'
시간이 나면 갈려고 하는데 않되네요
누가 들어 주실수 있으면 부탁드릴께요
11사단 마크를 자동차에 부칠려고 손바닥 만한 스티커를 구하려고 하는데
않되네요
어디 구 할수 없을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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