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치는 의욕, 딸리는 실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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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 양정훈
- 작성일 : 04-11-16 2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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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어도 어둠 밖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칠흑같은 어둠은 정말 시작도 끝도 없었습니다. 이 아파트에 지금껏 살아
왔지만 불을 끈 욕실이 이처럼 어둡다는 것을 이 때 처음 알았습니다.
철제 릴 트랙에 필름을 감아 보았습니다. 연습 때와 달리 자꾸만 필름이 엉키고 맙니다. 어둠 속에서 엉켜버린 필름의 끝을
눈을 뜨고 더듬 더듬 다시 찾아 되감아도 또 엉키고 맙니다. 정말 어둠이란 절망과 같아서 어둠 속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둠 속이지만 눈을 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육체의 눈이 아닌 마음의 눈으로 작업을 하면 연습처럼 될 것 같았습니다.
눈을 감고 필름이 릴에 일정한 유격을 가지고 감기고 있는 느낌을 손 끝에 가져보려 하였습니다. 왼손으로 릴이 멀리 굴러 가지
못하도록 막고 오른손으로 필름을 살며시 밀어 굴리니 연습 때와 마찬가지로 필름이 릴에 적당한 유격을 가지고
스르르 감겨갑니다.
필름을 감다 말고 문득 지난 봄, 새순 돋아나고 있는 아름다운 남산 산책길에서 만난 장님들이 떠올랐습니다.
봄향기 가득한 아름다운 산책길을 오직 철제 지팡이 하나에 의지하며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보고 제가 아름다운 세상을 볼 수 있는 행복을 허락받고 있다는 사실에 얼마나 감사했던지요.
광명의 허용으로 세상의 아름다움은 물론 사랑하는 부모와, 아내와, 아이들과, 친구들의
얼굴을 수시로 보고 느끼고, 사진이라는 것도 할 수 있으니 난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하고 말이지요.
그 때 길섶에 앉아 셔츠 주머니를 뒤적여 담배를 꺼내 피우고 있는 두 장님의 모습이 눈에 들어 왔습니다. 놀라운 것은 한 모금씩
연기를 날리고 있는 그들의 모습에서 광명이 차단된 불행이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담배 피우고 있는 두 장님의 얼굴이
얼마나 얼마나 평화스러웠던지요. 제가 그 때 그들의 평화를 사진찍을 수만 있었다면 얼마나 행복했겠습니까.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육체의 눈과 마음의 눈 생각에 하마터면 내릴 정거장을 지나칠 뻔 했습니다.
육체의 눈으로 본다는 것이 무엇이고, 마음의 눈으로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비록 아마추어이지만 사진이랍시고
찍고 있는데, 세상을 육체의 눈으로 보고 찍어야 되는가, 마음의 눈으로 보고 찍어야 되는가.
내게 두 가지 눈을 다 쓸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얼마나 복받은 일일까 싶었습니다.
육체의 눈 하나도 변변히 쓰고 있지 못하는 나의 사진에서, 마음의 눈을 사용하고 있는 그 장님들의 평화와 아름다움을 어떻게
깨우치고 배워나가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지하철 사 오십분 생각으로 얻어질 답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사진 대가들의 작품이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과 눈에 감동으로 오래 맺혀 닿는 것은 그들 작품이 육체의 눈뿐만 아니라, 우리 마음의 눈에 생명력있게
다가와 생명과 인생의 진한 감동을 선사하기 때문아닌가 싶었습니다. 정말 오랜만에 진지한 생각에 잠겨 흔들거리는 지하철에
몸을 맡기고 있었습니다.
이런 생각도 잠시, 다 감은 릴을 탱크에 집어넣고 욕실 불을 켜니, 나타난 광명에 어둠 속의 온갖 진지한 생각들이
한 순간에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 아, 이래서 우리가 기도할 때 눈을 감고 하는가 보다 생각하였습니다.
진지함은 광명보다 오히려 마음의 눈이 있는 어둠 속에 있더군요.
다시 얻은 광명 아래서 머릿속 가득한 것은 현상액, 정지액, 정착액, 하이포, 포토플로의 처리 순서와 시간,
20도 온도 유지 뿐이었습니다. 처리 순서 바뀌면 안돼! 온도계 계속 주시해야 하구! 초침 움직임을 따라가며
교반하는 것 잊지 말라구! 허둥대며 첫 자가현상을 시작하였습니다. 어둠 속에서 잠시 시간여행을 하고 온 것이지요.
허둥대다 보니 현상을 8분을 했는지 9분을 했는지 아리송송하고, 중간 수세도 빼먹고… 급한 마음에 욕조 위에
걸린 필름을 훓터보니 노출이든 현상이든 역시 “넘치는 의욕, 딸리는 실력” 어찌할 수 없군요. ^^
댓글목록
박순도님의 댓글
박순도Romanticist
김창수님의 댓글
김창수
몇달전에 자가 현상을 시작하였는데 처음 몇번은 필름이 제대로 감기지 않아서 좋은 샷(?) 들을 많이 잃었습니다. 그후에는 현상액 온도만 20도로 유지하고 다른 부분은 온도 조절을 안해서 계속 현상오바가 되었었구요. 이제 조금 알만한데 추워서 사진을 덜 찍으니
현상할것이 별로 없습니다. ㅋㅋ
자가 현상, 인화가 귀찮고 힘든일이긴 하지만 배운것이 많았습니다. MP의 내장노출계가 있지만 제 나름대로 노출을 조정하기 때문에 인화시에 보정을 많이 합니다. 책도 좀 보았는데 "노출은 쉐도우를 기준으로 현상은 하이라이트를 기준으로" 정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구성영님의 댓글
구성영
처음 자가현상을 할때가 갑자기 생각이 납니다.
암백에서 릴과 필름을 넣고는 몇시간이고 감는 연습을 하면서 이거 제대로 할수는 있을까.. 하고 생각을 많이 했었는데..
이제 7개월째 현상은 물론이고 멀티그레이드지를 사용해서 인화를 하고 있는 중인데 아직도 제대로 못하고 있는 것 보면서 정말 어렵고 힘든 작업이라는것을 새삼 깨닳고 있습니다. 신기하기도 했지만 자신만의 것을 만든다는것이 참 어렵네요..
하지만 가장 크게 배운것은
촬영 당시에 현상,인화까지의 결과를 생각하고 촬영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기동님의 댓글
오기동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그리고 넘치는 의욕이 계속 지속이 된다면 틀림없이 휼륭한 작품이 나오리라 확신을 합니다..
오후에 좋은 글에 생각에 잠겨봅니다..
즐거운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오기동 배상
양정훈님의 댓글
양정훈
오기동님의 격려에 힘을 얻습니다.
사실 제가 자가현상을 생각한 것은 갤러리에 올리신 오기동님의 여러 사진을 보면서 부터입니다.
오기동님의 흑백은 정말 콘트라스트, 계조 완벽하면서 아주 선예하였습니다.
충무로 전문현상소를 이용하고 있는 저로서는 본원적 한계를 느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덕분에 자가현상을 시작하였고, 사진에 대한 시야도 요즘 많이 넓히고 있습니다.
이 기회를 빌어 오기동님께 감사 말씀 전합니다.
이상원1님의 댓글
이상원1
저도 옛생각이 납니다..^^
90년도 대학입학하고, 처음으로 사진동아리에서 현상/인화를 했을때의 그 감동..
촬영부터 인화까지 내손으로 직접한다는 그 뿌듯함이 있던 시절..
요즘 자가현상이라도 해볼 요량으로 여기저기 용품 알아보고 있습니다..^^
최준석님의 댓글
최준석
첫...자가 현상 축하드립니다.
덕분에..저도.. 처음으로 자가현상하던 때의 일이 생각이 났습니다.
얼마간 숙달하시면 맑고 투명한 필름을 얻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화이팅입니다.
최준석 배상..
류택성님의 댓글
류택성
글 재밋게... 그리고 감동적으로 읽었읍니다. 저는 흑백사진을 해야지 하는 생각과 언젠가는 자가 현상을 해야지 하는 맘 뿐인데.... 부럽기도 합니다.
아마도 좋은 사진 나오지 않을까 생각 합니다. 글 잘 읽고 갑니다
이경면님의 댓글
이경면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중에서 약간 바꾸어 사용했으면 하는 단어가 있네요... ^^
근래에 '장님'이나 '소경'이라는 말은 사용하지 않는답니다. 시각장애인이라고 부르죠. 그리고 청각에 문제가 있는 경우에도 '벙어리'라는 단어가 아니라 청각장애인이라고 말한답니다. 앉은뱅이라고 말하는 경우에는 그냥 지체장애인이라고 칭한답니다. 오해는 하지 마시고요...직업상 지나치기 어려운 부분이라 적어 보았습니다. 좋은 글 감사히 읽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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