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리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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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 박명균
- 작성일 : 04-05-25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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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el tournier의 petites proses란 산문집을 보다 보니 조리개란 소제목의 글이 있어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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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기의 매력은 대부분 렌즈라는 동그란 구멍에 섬세미묘하고 살아있는 정교함을 갖춘 하나의 기관을 추가시켜주는 조리개 장치의 덕을 보고있다. 그것은 중심에서 멀어지게 할 수도 있고 가까워지게 할 수도 있다. 금속판들로 된 꽃잎들로 렌즈의 사용 면적을 넓히고 좁힌다. 이 장치는 장미꽃을 닮은 데가 있다. 우리가 마음대로 오므릴 수도 있고 활짝 펴게 할 수도 있는 장미꽃. 거기에는 또한 괄약근을 닮은 데도 있어서 렌즈 뒤에서 조리개가 오므라 들었다 펼쳐졌다 하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막연하나마 눈꺼풀.입술.항문 따위가 연상된다.
그뿐이 아니다. 이 자극적인 해부학에 조리개는 매우 광범하고 마술적인 위력을 지닌 생리학을 추가해준다. 조리개를 닫으면 암실에 들어가는 빛의 양이 감소하지만 반면에 화상의 깊이는 깊어진다는 사실을 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으니까 말이다. 반대로 조리개의 직경이 커지면 밝기는 커지지만 깊이는 줄어든다.
사실 깊이와 밝기가 반비례하고 한쪽을 가지려면 다른 한쪽을 희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 딜레마보다 더 보편적인 진리는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바로 이 상반되는 두 가지 정신적 유형 중 어느 한쪽에 속한다. 그리하여 피상적인 밝기를 택하든가 반대로 어둑어둑한 깊이를 택하든가 한다. 나의 스승인 에릭 베일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프랑스 사람들의 가장 큰 단점은 거짓된 밝기다. 독일 사람들의 그것은 거짓된 깊이다"
양자 중 하나의 선택이 절박하게 요구되는 경우는 물론 인물 사진이다. 조리개를 많이 여느냐 적게 여느냐에 따라 인물 후면에 있는 원경을 중요시하느냐 않느냐가 결정된다. 그 후경을 주목하게 하면 할수록 사진 속의 인물의 중요성은 그만큼 줄어든다. 만약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조콘다의 사진을 찍었다면 그는 필시 조리개를 바늘 구멍만한 크기로 닫아놓았을 것이다. 그 유명한 미소가 번지고 있는 그 얼굴 뒤로 바위들과 나무와 호수가 있는 원경을 완벽하게 분간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한걸음 더 나가서 그 <배경>-그것이 전원이건 도시건. 내밀한 풍경이건 건축적 풍경이건-은 독자적인 존재감을 지녀야 하는 것이지, 가령 한 쌍의 아담과 이브에 딸려다니는 낙원의 나무들이나 지체 높은 성주의 모습을 부각시켜주는 성채의 실루엣처럼 전면에 있는 사람의 초상에 상징적으로 부가된 장식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 반대로 그 배경은 충분한 만큼의 독자적 존재로서의 위상을 가짐으로써 전면에 있는 인물의 존재와 경쟁을 할 정도에 이르지 않으면 안된다. 극단적인 경우, 인물이 풍경에 <먹혀서> 온갖 동식물들로 구성된 풍경 속에서 그저 한 인간적 요소일 뿐인 겸손한 역할을 맡을 정도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고 보면 후경의 무대 장치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는 문학. 나아가서는 인문과학에서도 그와 맞먹는 경우를 찾아 볼 수 있을 만큼 매우 광범한 의미를 갖는다. 사실 소설에 있어서 어떤 주인공을 그의 출신이나 환경과 상관없이, 즉 배경에 관심을 두지 않은채 그 자체로서만 그리느냐 아니면 그 반대로 조리개를 잔뜩 오므린채, 그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으며 존재 이유의 근원이기도 한 사회 역사적 총체 속에 놓고 그리느냐 하는 선택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19세기 프랑스의 위대한 소설가들-스탕달.발자크.플로베르.위고.모파상. 졸라-을 일별해 보면 조리개를 얼마만큼 열고 있느냐 하는 것이 작가에 따라 각기 다르다는 것과 시간이 갈수록 그 여는 정도가 점차로 감소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스탕달은 인물-쥘리엥 소렐-을 그가 사는 환경 속에 혹은 출신 환경과의 갈등 속에 놓고 그림으로써 인물을 환경 속에 완전히 편입 시키고 있는데 비하여 졸라의 경우는 그와 정 반대여서 사회 환경이 소설적 탐구의 진정한 주제를 이루고 인물은 그 환경의 한 주어진 조건에 불과해진다. 스탕달이 조리개를 여는 정도가 F4라면 졸라는 F16정도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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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시험의 언어영역 지문에나 써 먹을 글 같지만 읽으면서 생각해 보니 우리는 살아오면서 마음의 조리개를 어느 정도 열어 놓고 살아 왔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글이었습니다.-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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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기의 매력은 대부분 렌즈라는 동그란 구멍에 섬세미묘하고 살아있는 정교함을 갖춘 하나의 기관을 추가시켜주는 조리개 장치의 덕을 보고있다. 그것은 중심에서 멀어지게 할 수도 있고 가까워지게 할 수도 있다. 금속판들로 된 꽃잎들로 렌즈의 사용 면적을 넓히고 좁힌다. 이 장치는 장미꽃을 닮은 데가 있다. 우리가 마음대로 오므릴 수도 있고 활짝 펴게 할 수도 있는 장미꽃. 거기에는 또한 괄약근을 닮은 데도 있어서 렌즈 뒤에서 조리개가 오므라 들었다 펼쳐졌다 하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막연하나마 눈꺼풀.입술.항문 따위가 연상된다.
그뿐이 아니다. 이 자극적인 해부학에 조리개는 매우 광범하고 마술적인 위력을 지닌 생리학을 추가해준다. 조리개를 닫으면 암실에 들어가는 빛의 양이 감소하지만 반면에 화상의 깊이는 깊어진다는 사실을 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으니까 말이다. 반대로 조리개의 직경이 커지면 밝기는 커지지만 깊이는 줄어든다.
사실 깊이와 밝기가 반비례하고 한쪽을 가지려면 다른 한쪽을 희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 딜레마보다 더 보편적인 진리는 찾아보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바로 이 상반되는 두 가지 정신적 유형 중 어느 한쪽에 속한다. 그리하여 피상적인 밝기를 택하든가 반대로 어둑어둑한 깊이를 택하든가 한다. 나의 스승인 에릭 베일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프랑스 사람들의 가장 큰 단점은 거짓된 밝기다. 독일 사람들의 그것은 거짓된 깊이다"
양자 중 하나의 선택이 절박하게 요구되는 경우는 물론 인물 사진이다. 조리개를 많이 여느냐 적게 여느냐에 따라 인물 후면에 있는 원경을 중요시하느냐 않느냐가 결정된다. 그 후경을 주목하게 하면 할수록 사진 속의 인물의 중요성은 그만큼 줄어든다. 만약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조콘다의 사진을 찍었다면 그는 필시 조리개를 바늘 구멍만한 크기로 닫아놓았을 것이다. 그 유명한 미소가 번지고 있는 그 얼굴 뒤로 바위들과 나무와 호수가 있는 원경을 완벽하게 분간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한걸음 더 나가서 그 <배경>-그것이 전원이건 도시건. 내밀한 풍경이건 건축적 풍경이건-은 독자적인 존재감을 지녀야 하는 것이지, 가령 한 쌍의 아담과 이브에 딸려다니는 낙원의 나무들이나 지체 높은 성주의 모습을 부각시켜주는 성채의 실루엣처럼 전면에 있는 사람의 초상에 상징적으로 부가된 장식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 반대로 그 배경은 충분한 만큼의 독자적 존재로서의 위상을 가짐으로써 전면에 있는 인물의 존재와 경쟁을 할 정도에 이르지 않으면 안된다. 극단적인 경우, 인물이 풍경에 <먹혀서> 온갖 동식물들로 구성된 풍경 속에서 그저 한 인간적 요소일 뿐인 겸손한 역할을 맡을 정도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고 보면 후경의 무대 장치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는 문학. 나아가서는 인문과학에서도 그와 맞먹는 경우를 찾아 볼 수 있을 만큼 매우 광범한 의미를 갖는다. 사실 소설에 있어서 어떤 주인공을 그의 출신이나 환경과 상관없이, 즉 배경에 관심을 두지 않은채 그 자체로서만 그리느냐 아니면 그 반대로 조리개를 잔뜩 오므린채, 그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으며 존재 이유의 근원이기도 한 사회 역사적 총체 속에 놓고 그리느냐 하는 선택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19세기 프랑스의 위대한 소설가들-스탕달.발자크.플로베르.위고.모파상. 졸라-을 일별해 보면 조리개를 얼마만큼 열고 있느냐 하는 것이 작가에 따라 각기 다르다는 것과 시간이 갈수록 그 여는 정도가 점차로 감소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스탕달은 인물-쥘리엥 소렐-을 그가 사는 환경 속에 혹은 출신 환경과의 갈등 속에 놓고 그림으로써 인물을 환경 속에 완전히 편입 시키고 있는데 비하여 졸라의 경우는 그와 정 반대여서 사회 환경이 소설적 탐구의 진정한 주제를 이루고 인물은 그 환경의 한 주어진 조건에 불과해진다. 스탕달이 조리개를 여는 정도가 F4라면 졸라는 F16정도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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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능시험의 언어영역 지문에나 써 먹을 글 같지만 읽으면서 생각해 보니 우리는 살아오면서 마음의 조리개를 어느 정도 열어 놓고 살아 왔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글이었습니다.-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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