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심건식 형의 에베레스트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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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 김상지
- 작성일 : 19-04-29 2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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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정리를 하다 나온 사진이다. 고 심건식(1947-1989) 형이 나에게 준 에베레스트 일출 사진이다. 사진이 크고 액자가 무거워 그냥 창고에 쳐 박아 놓았던 것인데, 오늘 사진과 형에 대한 미안함이 생겨 거실 벽에 걸었다.
이 사진은 형이 죽은 해인 1989년 히말라야에 가서 찍은 것으로, 아침 해에 반사돼 붉은 불꽃 형상으로 나타난 에베레스트를 찍은 사진이다. 형은 이 사진을 포함해 히말라야에서 찍은 사진들로 그 해 여름인가 서울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개인전 마지막 날, 전시장을 들렀을 때 형은 나에게 사진 한 점을 주고 싶다고 하면서 골라 보라고 했다. 극구 사양을 하고 받지를 않았다. 그랬더니, 그 며칠 후인가 만났을 때 이 사진을 들고 나와 나에게 안겼다.
형은 뛰어난 등반가이기도 하면서 사진에도 조예가 깊었다. 물론 산 사진만 찍었다. 형을 알게 된 것은, 당시 내 사무실이 충무로에 있었고, 형은 사진 일로 충무로에 자주 나왔기에 어떤 자리에서 우연히 만난 게 계기가 됐다.
당시 형은 북한산 아래 구기동에 살고 있었다. 호남 지주의 아들이었던 형의 집은 넓고 큰 주택이었다. 하지만 몰락해가는 저택이었다고나 할까, 뭔가 어떤 어둠이 깃든 집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형의 그 집에는 온통 산에 관한 것으로 가득 찼다. 특히 히말라야에 관한 자료들이 엄청 많았다. 형은 그 무렵, 빡센 산행으로 유명한 '시민산악회' 멤버로, 몇 차례 히말라야와 티벳 원정을 다녀온 베테랑 산악인이었다.
내가 당시 형에게 열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내가 그 때 산에 한창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몇 차례 같이 산행도 했다. 인수봉 뒤, 출입금지 구역으로 몰래 산행도 했고, 북한산 야간 등반도 했다. 형을 따라 문수봉을 밤에 오를 때에는 죽는 줄 알았다. 지금같이 쇠막대기와 쇠줄이 쳐있기 전이라 암벽을 타고 오르는 위험한 야간 산행이었다. 북한산장 부근에 텐트를 치고 야영도 몇 번 했다. 그런 날이면 술 좋아하는 나를 위해 집에 담가놓은 갖은 산야초 술을 가져오곤 했다. 삼지구엽초 술이 특히 기억에 난다.
1989년 가을 무렵인가, 형은 다시 히말라야로 가겠다고 했다. 마지막이라고 했다. 갖다오면 원정산행은 그만 두고 사진에만 몰두하겠다고 했다. 충무로에 카메라와 사진 숍을 열겠다고 했다. 오로지 산과 사진에만 몰두하느라 팽계치다시피했던 생계를 챙기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형은 홀로 히말라야로 떠났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형의 소식을 들은 건 형이 떠나고 보름 정도 지나서다. 형이 히말라야에서 실종됐다는 것이다. 카트만두에 나오기로 한 시점에 나타나지도 않았고 연락도 일체 두절됐다. 그로부터 6-7개월 후인가, 카트만두 카메라 숍에 하셀블라드 등 형의 사진장비가 매물로 나왔다. 그것으로 추정하기를, 형은 아마도 히말라야 어느 오지에서 산적을 만나 장비 등을 빼앗기고 변을 당하지 않았나 싶다.
나로서는 충격적인 소식이었지만, 그래도 한 가닥 실날같은 희망도 없잖아 있었다. 형은 1980년 초, 티벳트 원정에서도 한 6개월 실종됐다가 거의 기적적으로 생환했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 때도 형은 산적을 만났는데, 사투 끝에 산적들을 때려 눕히고 탈출했다는 것이다. 당시 언론들은 이를 두고 '기적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런 기적은 두번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형에 관한 소식은 그것으로 끝이었기 때문이다. 대한산악회에서는 그 얼마 후 형의 사망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그러니 결국 이 사진이 형의 유품이 된 셈이다. 형의 그런 소식을 접한 후 1년 후인가, 다니던 신문에 두 차례에 걸쳐 형에 관한 장문의 글을 게재하기도 했다. 그러고는 그 동안 잊고 산 것이나 마찬가지다. 오늘 이 사진을 보니 새삼 그 동안 잊고 무관심했던 것에 대한 죄송한 마음이 일면서 형이 그립다. 이제부터는 매일 보게 될 사진이고 형이니 너무 그리 섭섭해하지 말라 하고싶다. 다시 한번 명복을 빈다.
이 사진은 형이 죽은 해인 1989년 히말라야에 가서 찍은 것으로, 아침 해에 반사돼 붉은 불꽃 형상으로 나타난 에베레스트를 찍은 사진이다. 형은 이 사진을 포함해 히말라야에서 찍은 사진들로 그 해 여름인가 서울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개인전 마지막 날, 전시장을 들렀을 때 형은 나에게 사진 한 점을 주고 싶다고 하면서 골라 보라고 했다. 극구 사양을 하고 받지를 않았다. 그랬더니, 그 며칠 후인가 만났을 때 이 사진을 들고 나와 나에게 안겼다.
형은 뛰어난 등반가이기도 하면서 사진에도 조예가 깊었다. 물론 산 사진만 찍었다. 형을 알게 된 것은, 당시 내 사무실이 충무로에 있었고, 형은 사진 일로 충무로에 자주 나왔기에 어떤 자리에서 우연히 만난 게 계기가 됐다.
당시 형은 북한산 아래 구기동에 살고 있었다. 호남 지주의 아들이었던 형의 집은 넓고 큰 주택이었다. 하지만 몰락해가는 저택이었다고나 할까, 뭔가 어떤 어둠이 깃든 집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형의 그 집에는 온통 산에 관한 것으로 가득 찼다. 특히 히말라야에 관한 자료들이 엄청 많았다. 형은 그 무렵, 빡센 산행으로 유명한 '시민산악회' 멤버로, 몇 차례 히말라야와 티벳 원정을 다녀온 베테랑 산악인이었다.
내가 당시 형에게 열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내가 그 때 산에 한창 빠져있었기 때문이다. 몇 차례 같이 산행도 했다. 인수봉 뒤, 출입금지 구역으로 몰래 산행도 했고, 북한산 야간 등반도 했다. 형을 따라 문수봉을 밤에 오를 때에는 죽는 줄 알았다. 지금같이 쇠막대기와 쇠줄이 쳐있기 전이라 암벽을 타고 오르는 위험한 야간 산행이었다. 북한산장 부근에 텐트를 치고 야영도 몇 번 했다. 그런 날이면 술 좋아하는 나를 위해 집에 담가놓은 갖은 산야초 술을 가져오곤 했다. 삼지구엽초 술이 특히 기억에 난다.
1989년 가을 무렵인가, 형은 다시 히말라야로 가겠다고 했다. 마지막이라고 했다. 갖다오면 원정산행은 그만 두고 사진에만 몰두하겠다고 했다. 충무로에 카메라와 사진 숍을 열겠다고 했다. 오로지 산과 사진에만 몰두하느라 팽계치다시피했던 생계를 챙기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형은 홀로 히말라야로 떠났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형의 소식을 들은 건 형이 떠나고 보름 정도 지나서다. 형이 히말라야에서 실종됐다는 것이다. 카트만두에 나오기로 한 시점에 나타나지도 않았고 연락도 일체 두절됐다. 그로부터 6-7개월 후인가, 카트만두 카메라 숍에 하셀블라드 등 형의 사진장비가 매물로 나왔다. 그것으로 추정하기를, 형은 아마도 히말라야 어느 오지에서 산적을 만나 장비 등을 빼앗기고 변을 당하지 않았나 싶다.
나로서는 충격적인 소식이었지만, 그래도 한 가닥 실날같은 희망도 없잖아 있었다. 형은 1980년 초, 티벳트 원정에서도 한 6개월 실종됐다가 거의 기적적으로 생환했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 때도 형은 산적을 만났는데, 사투 끝에 산적들을 때려 눕히고 탈출했다는 것이다. 당시 언론들은 이를 두고 '기적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런 기적은 두번 다시 일어나지 않았다. 형에 관한 소식은 그것으로 끝이었기 때문이다. 대한산악회에서는 그 얼마 후 형의 사망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그러니 결국 이 사진이 형의 유품이 된 셈이다. 형의 그런 소식을 접한 후 1년 후인가, 다니던 신문에 두 차례에 걸쳐 형에 관한 장문의 글을 게재하기도 했다. 그러고는 그 동안 잊고 산 것이나 마찬가지다. 오늘 이 사진을 보니 새삼 그 동안 잊고 무관심했던 것에 대한 죄송한 마음이 일면서 형이 그립다. 이제부터는 매일 보게 될 사진이고 형이니 너무 그리 섭섭해하지 말라 하고싶다. 다시 한번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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