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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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 박삼정
- 작성일 : 11-01-08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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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버님
한해가 저물어 가는 12월30일 저녁,
대구 칠성시장주변의 어느 한정식집에서 수십년간 서로 얼굴을 맞대며 한동네에서 살아온, 친형제이상으로 가깝게 지내는 5명이 모여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중 이북태생인 친구가 목소리를 깔고는 어제가 아버지 기일이었다면서,
피난내려와 고생끝에 돈을 모으시기만 하셨지 제대로 한번 써보지도 못하시고 돌아가셨다면서 눈물을 찔끔거렸다.
분위기가 이러하니 60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어릴 때 아버지에게 잘못해서 얻어 맞았던 일에서 억울하게 두둘겨 맞았던 일까지 이야기가 장황하였다.
아무말 않고 조용히 술잔만 비우고 있던 박한의원 원장이 말을 꺼냈다.
"여러분! 어릴 때 아버지에게 얻어 맞은 기억은 모두들 다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장가간지 얼마되지 않아 아버지에게 죽도록 얻어 터지고,
지금도 오른쪽 이마위에 머리카락이 한 주먹만큼 다 빠져서 남들은 오른쪽으로 가르마를 타는데, 저는 반대로 왼쪽가르마를 하고 있는 사연이 있습니다."
모두들 숙연한 분위기에 눌려서 술잔만 기울이면서 경청을 하고 있었다.
"저는 군에도 못갈정도로 작은 키에 체중미달의 왜소한 체구지만, 저희 아버님은 육척(1미터 80센티)의 거구였습니다.
거기다 상업중학교(6년제)를 나오셔서 은행지점장까지 올라갔을 정도였으니 얼마나 악착같고, 독한 구석이 있었겠습니까?
어릴 때 제가 조금이래도 잘 못하는 일이 생기면 사정없이 발길질과 주먹이 날아와서,
저는 동네에서나 학교에서 가장 모범적으로 착하게 자랐습니다.
그리고 아버님은 내게 1960년대는 별 인기 없던 한의과대학에 진학을 하라고 해서,
서울의 명문대학교와 내가 하고 싶었던 모던걸 포기하면서 까지 아버님 말씀에 잘 따랐습니다.
한의과 대학에서 석, 박사학위 까지 다 따고 아버님이 시키는 데로 대구엘 내려와서,
장가도 가고 한의원을 개업하였는데, 얼마가지 않아 제가 운영하는 한의원은 몰려오는 환자와 진맥을 받고 보약을 지으려는 손님들로 북적이기 시작하였습니다.
1978년대의 한의원은 한의과대학수료가 아닌 일발면허를 획득한 영감님들이 대부분 이었습니다.
그러니 젊은 박사원장이 진맥도 용하고 침을 잘 놓는다는 소문이 금방 퍼졌기 때문입니다.
하루가 너무 바빠서 퇴근이 늦다보니 매일 집하고 한의원만 왔다갔다 하였습니다.
마침 한의원 옆집에서 건축설계사무소를 하고 있는 중. 고등학교 친구가 늦게 까지 사무실에 있으니 한번 들리라고 하길래, 하루는 목이 출출한김에 그 친구를 찾았습니다.
하루종일 매출을 올려서 현금이 가득 들어있는 손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삐꺽대는 나무계단을 올라서 2층에 있는 설계사무소엘 갔더니 담배연기 자욱한 실내에는 포커판이 한창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반갑게 나를 맞으면서, 지금 막 끗발이 오르고 있으니 잠간만 기다리고 있으라 했습니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나도 흥미가 끌려서 끼워 달라고 하여 판에 붙었습니다.
매일 밤 포커를 하는 전문꾼들에게 저는 적수가 되질 못하여,
결국 새벽 4시경에는 가방에 있는 현금을 포함하여 친구에게 빌린돈까지 거의 다 털렸습니다. 이러니 다음날, 또 그 다음날 본전을 찾으러 포커판에 메달렸었고,
매일 귀가시각은 통금이 해제되는 새벽 4시이후 였습니다.
그리고 일요일은 지쳐서 곯라 떨어져 하루종일 잠만 잤었고,
평일은 오후 6시만 되면, 잔무는 간호사에게 모두 다 맡기고는 옆집의 설계사무소로 바쁘게 발걸음 하였습니다.
이러기를 두달여 지난 어느날, 끗발이 한창올라 판돈을 끌어 모으고 있는데 시선이 따가운 한쪽 구석으로 눈길이 갔습니다.
어디서 많이 본듯한 친숙한 얼굴이 보였으나 돈에 눈이 뒤집혀 얼른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패를 돌리다가 다시 그 쪽으로 시선이 갔었는데, 아니 그 무서운 아버님이 서 계셨습니다.
그 때 였습니다. 고함을 지르시면서 판을 뒤집어 엎고는,
나에게 발길질과 주먹질로 한참을 두둘겨 패는데 나는 너무 놀라서 아픈줄도 몰랐습니다.
이어서 설게사무실의 집기. 비품을 다 때려 부수고도 화가 풀리지 않으셨는지,
나의 앞머리카락을 오른손으로 불끈 쥐고는 육척의 거구께서 오척의 왜소한 나를 질질 끌고는 2층의 계단을 내려와 3키로미터나 떨어진 우리 집까지 긴다리로 뛰다시피 걷는데,
아버님의 걸음을 따라가지 못하는 나는 나의 앞머리카락을 움켜쥔 아버님의 주먹에 메달린채, 거의 걸음을 포기하고 그냥 땅바닥에 끌려서 갔었습니다.
그 날도 몹시 추운날이었는데,
추위는 커녕 동네창피와 머리카락이 빠질듯이 아픈 두피와 온통 멍이 든 육신의 고통으로 얼이 빠져 있었습니다.
그 날 이후로 오른쪽 이마위의 머리카락이 한움큼이나 빠져나갔고,
여지껏 머리카락이 나질않아 가르마를 남들과는 반대편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언젠가는 아버님께 내 가슴속의 이 한을 말씀드릴려고 벼르다,
끝내 엉어리를 풀지 못하고 저세상으로 보내드렸습니다.
얼마전 제 환갑날 집사람과 둘이서 아버님을 회상하면서 둘이서 많이도 울었습니다.
30여년동안 속으로만 담고 있던 나의 비밀을 처음으로 여러분께 말씀드렸습니다"
박원장은 그 때의 아픈 기억 때문인지 또는 속에 맺혀있던 엉어리를 쏟아낸 때문인지 눈물을 줄줄 흘리시면서, 오른쪽 이마를 덮고 있는 머리카락을 들어 보이는데 정말 한주먹 만큼이나 민둥산이었다.
그러니 모두들 취기에 아버지 생각이 났었는지 눈물을 흘리거나, 술을 연거푸 마시고 있었다. 눈물이 그치자, 박원장께서는 끝맺음을 하셨다.
"하지만, 스파르타식으로 자식을 엄격하게 교육시키는 아버지의 속마음은 나의 이 작은키 에 왜소한 체구 때문에 남들에게 업신여김 당하지 않고 당당하게 일할 수 있는 분야를 고민하시다가, 선견지명으로 한의원을 차려 주시면서 평생을 편히 보람차게 살도록 배려하셨고, 또 장가간 아들의 노름버릇을 고친다고 그토록이나 혹독하게 하셔서 평생을 엉어리로 남게하셨습니다만,
그 이후론 노름방 근처는 얼씬거리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저역시 남는 시간과 돈, 한의술을 양로원이나 불우한 사람들을 위하여 열심히 봉사하면서,
자식도 2남2녀를 두어 다복한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못난 자식을 그토록 끔직하게 사랑하셨던 저희 아버님에 대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2010년 2월 6일
박 삼정씀.
한해가 저물어 가는 12월30일 저녁,
대구 칠성시장주변의 어느 한정식집에서 수십년간 서로 얼굴을 맞대며 한동네에서 살아온, 친형제이상으로 가깝게 지내는 5명이 모여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중 이북태생인 친구가 목소리를 깔고는 어제가 아버지 기일이었다면서,
피난내려와 고생끝에 돈을 모으시기만 하셨지 제대로 한번 써보지도 못하시고 돌아가셨다면서 눈물을 찔끔거렸다.
분위기가 이러하니 60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어릴 때 아버지에게 잘못해서 얻어 맞았던 일에서 억울하게 두둘겨 맞았던 일까지 이야기가 장황하였다.
아무말 않고 조용히 술잔만 비우고 있던 박한의원 원장이 말을 꺼냈다.
"여러분! 어릴 때 아버지에게 얻어 맞은 기억은 모두들 다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장가간지 얼마되지 않아 아버지에게 죽도록 얻어 터지고,
지금도 오른쪽 이마위에 머리카락이 한 주먹만큼 다 빠져서 남들은 오른쪽으로 가르마를 타는데, 저는 반대로 왼쪽가르마를 하고 있는 사연이 있습니다."
모두들 숙연한 분위기에 눌려서 술잔만 기울이면서 경청을 하고 있었다.
"저는 군에도 못갈정도로 작은 키에 체중미달의 왜소한 체구지만, 저희 아버님은 육척(1미터 80센티)의 거구였습니다.
거기다 상업중학교(6년제)를 나오셔서 은행지점장까지 올라갔을 정도였으니 얼마나 악착같고, 독한 구석이 있었겠습니까?
어릴 때 제가 조금이래도 잘 못하는 일이 생기면 사정없이 발길질과 주먹이 날아와서,
저는 동네에서나 학교에서 가장 모범적으로 착하게 자랐습니다.
그리고 아버님은 내게 1960년대는 별 인기 없던 한의과대학에 진학을 하라고 해서,
서울의 명문대학교와 내가 하고 싶었던 모던걸 포기하면서 까지 아버님 말씀에 잘 따랐습니다.
한의과 대학에서 석, 박사학위 까지 다 따고 아버님이 시키는 데로 대구엘 내려와서,
장가도 가고 한의원을 개업하였는데, 얼마가지 않아 제가 운영하는 한의원은 몰려오는 환자와 진맥을 받고 보약을 지으려는 손님들로 북적이기 시작하였습니다.
1978년대의 한의원은 한의과대학수료가 아닌 일발면허를 획득한 영감님들이 대부분 이었습니다.
그러니 젊은 박사원장이 진맥도 용하고 침을 잘 놓는다는 소문이 금방 퍼졌기 때문입니다.
하루가 너무 바빠서 퇴근이 늦다보니 매일 집하고 한의원만 왔다갔다 하였습니다.
마침 한의원 옆집에서 건축설계사무소를 하고 있는 중. 고등학교 친구가 늦게 까지 사무실에 있으니 한번 들리라고 하길래, 하루는 목이 출출한김에 그 친구를 찾았습니다.
하루종일 매출을 올려서 현금이 가득 들어있는 손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삐꺽대는 나무계단을 올라서 2층에 있는 설계사무소엘 갔더니 담배연기 자욱한 실내에는 포커판이 한창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 친구는 반갑게 나를 맞으면서, 지금 막 끗발이 오르고 있으니 잠간만 기다리고 있으라 했습니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나도 흥미가 끌려서 끼워 달라고 하여 판에 붙었습니다.
매일 밤 포커를 하는 전문꾼들에게 저는 적수가 되질 못하여,
결국 새벽 4시경에는 가방에 있는 현금을 포함하여 친구에게 빌린돈까지 거의 다 털렸습니다. 이러니 다음날, 또 그 다음날 본전을 찾으러 포커판에 메달렸었고,
매일 귀가시각은 통금이 해제되는 새벽 4시이후 였습니다.
그리고 일요일은 지쳐서 곯라 떨어져 하루종일 잠만 잤었고,
평일은 오후 6시만 되면, 잔무는 간호사에게 모두 다 맡기고는 옆집의 설계사무소로 바쁘게 발걸음 하였습니다.
이러기를 두달여 지난 어느날, 끗발이 한창올라 판돈을 끌어 모으고 있는데 시선이 따가운 한쪽 구석으로 눈길이 갔습니다.
어디서 많이 본듯한 친숙한 얼굴이 보였으나 돈에 눈이 뒤집혀 얼른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패를 돌리다가 다시 그 쪽으로 시선이 갔었는데, 아니 그 무서운 아버님이 서 계셨습니다.
그 때 였습니다. 고함을 지르시면서 판을 뒤집어 엎고는,
나에게 발길질과 주먹질로 한참을 두둘겨 패는데 나는 너무 놀라서 아픈줄도 몰랐습니다.
이어서 설게사무실의 집기. 비품을 다 때려 부수고도 화가 풀리지 않으셨는지,
나의 앞머리카락을 오른손으로 불끈 쥐고는 육척의 거구께서 오척의 왜소한 나를 질질 끌고는 2층의 계단을 내려와 3키로미터나 떨어진 우리 집까지 긴다리로 뛰다시피 걷는데,
아버님의 걸음을 따라가지 못하는 나는 나의 앞머리카락을 움켜쥔 아버님의 주먹에 메달린채, 거의 걸음을 포기하고 그냥 땅바닥에 끌려서 갔었습니다.
그 날도 몹시 추운날이었는데,
추위는 커녕 동네창피와 머리카락이 빠질듯이 아픈 두피와 온통 멍이 든 육신의 고통으로 얼이 빠져 있었습니다.
그 날 이후로 오른쪽 이마위의 머리카락이 한움큼이나 빠져나갔고,
여지껏 머리카락이 나질않아 가르마를 남들과는 반대편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언젠가는 아버님께 내 가슴속의 이 한을 말씀드릴려고 벼르다,
끝내 엉어리를 풀지 못하고 저세상으로 보내드렸습니다.
얼마전 제 환갑날 집사람과 둘이서 아버님을 회상하면서 둘이서 많이도 울었습니다.
30여년동안 속으로만 담고 있던 나의 비밀을 처음으로 여러분께 말씀드렸습니다"
박원장은 그 때의 아픈 기억 때문인지 또는 속에 맺혀있던 엉어리를 쏟아낸 때문인지 눈물을 줄줄 흘리시면서, 오른쪽 이마를 덮고 있는 머리카락을 들어 보이는데 정말 한주먹 만큼이나 민둥산이었다.
그러니 모두들 취기에 아버지 생각이 났었는지 눈물을 흘리거나, 술을 연거푸 마시고 있었다. 눈물이 그치자, 박원장께서는 끝맺음을 하셨다.
"하지만, 스파르타식으로 자식을 엄격하게 교육시키는 아버지의 속마음은 나의 이 작은키 에 왜소한 체구 때문에 남들에게 업신여김 당하지 않고 당당하게 일할 수 있는 분야를 고민하시다가, 선견지명으로 한의원을 차려 주시면서 평생을 편히 보람차게 살도록 배려하셨고, 또 장가간 아들의 노름버릇을 고친다고 그토록이나 혹독하게 하셔서 평생을 엉어리로 남게하셨습니다만,
그 이후론 노름방 근처는 얼씬거리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저역시 남는 시간과 돈, 한의술을 양로원이나 불우한 사람들을 위하여 열심히 봉사하면서,
자식도 2남2녀를 두어 다복한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못난 자식을 그토록 끔직하게 사랑하셨던 저희 아버님에 대한 말씀을 드렸습니다.
2010년 2월 6일
박 삼정씀.
추천 0
댓글목록
손창익님의 댓글

너무나 감동적인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늦은 밤에 눈을 감고 잠시나마 친의 엄하셨던 모습을 그리워해봅니다.
가슴이 많이 아파 잠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강정태님의 댓글

혹씨 박삼정님의 지난 이야기 아닌가요?
아버지의 자식 사랑은 말없이 실행하시거나
우악스럽게 표출하는 경우가 많다는 걸 저도 어렴풋이 압니다.
그래도 그것이 아버지의 자식 사랑이니...
저도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안계신 지금
특히 아버님의 그 빈자리가 한없이 커 보이는 것을 느끼곤 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박삼정님의 댓글

안녕하십니까?
이 글은 2년전 우연히 들었던 어느 지인의 사연을 글로 옮겼으며,
장소와 상황은 일부 바꾸었습니다.
년초에 가족에 대하여도 한번 생각해보심이 좋을 듯하여 올렸었는데,
졸필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박삼정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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