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라에 대해 어찌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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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 이치환
- 작성일 : 10-11-10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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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빛에 의해 그 형과 색이 보여집니다.
그리고 어떤 물체를 볼 때 처음으로 감지되는 것은 색이며,
그런 후에 형을 분별합니다.
우리의 의식은 형에 대한 기억보다 색에 대한 기억이 더 강합니다.
지금은 보기 힘든 우체통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며 길을 돌아다면서
우리는 붉은 색에 우선 주목하게 됩니다. 그리고서 형태를 분별합니다.
이런 현상을 두고 미술가들과 심리학자들 그리고 철학자들은
'색에 지나치게 반응을 하는 상태'를 경고했습니다.
앙리 마티스는, 형이 온전하지 않으면 색은 무의미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소묘에 대해 저술을 남긴 프랑스의 미술가 블랭크는,
'남녀 결합으로 인류를 낳듯이 형과 색의 결합으로 미술을 낳는다.
그러나 형이 절대 우월성을 가져야 한다. 만일 색이 우월해진다면
색 때문에 회화는 망할지도 모른다'라고 했습니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도 비슷하게 말했습니다.
'형이 기본이고 색은 형이 허락을 할 때에만 제 구실(표현)이 가능한 것이다'라고...
같은 휘도와 명도와 채도를 가진 한가지 색으로 칠해진 벽에
돌출된 어떤 형이 있고, 부드러운 확산광이 골고루 비춰 그림자가 없을 때
이 물체를 눈으로는 감지하기가 어렵습니다.
형이 존재하고, 빛이 그것을 들어내어주나 분별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벽과는 다른 색으로 칠해졌다면, 쉽게 그 형태와 크기를 알게 됩니다.
이런 색인데 왜 그런 경고를 했을까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사진기로 칼라 사진을 찍습니다.
그리고 그 사진을 사실 그대로라고 아무런 의심없이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왜 그런 경고를 했을까?
이런 의문이 칼라 사진에 대해 주저하게 만듭니다.
왜 그렇게 말을 했는지?
무슨 이유가 있는지? 정말 궁굼합니다.
댓글목록
홍건영님의 댓글

마티스, 블랭크, 칸트는 형에 본질의 위치를 부여하고 색에 부차적인 위치를 부여했는 모양입니다
본질을 네이버 사전에서 찾아보니
후설(Husserl, E.)의 현상학에서, 사물의 시공적(時空的)ㆍ특수적ㆍ우연적인 존재의 근저에 있으면서 사물을 그 사물답게 만드는 초시공적ㆍ보편적ㆍ필연적인 것. 본질 직관으로 이것을 포착할 수 있다고 한다.
이런 뜻풀이가 있네요
물리학에서 초시공적, 보편적인 것에는 길이, 질량 등이 있을텐데
알 수 없는 색온도의 광을 비추어서 반사되어 나오는 빛을 눈으로 인지하는 것이 색이라면
색은 보편적인 것이 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색을 직관으로 파악할 수 없다는 것은 저녁에 나트륨등 아래서 사고를 내고 뺑소니를 친 차의 색이
흰색이었는지 노란색이었는지 확신할 수 없는 그런 작은 사례부터 시작하는 것은 아닐까요?
어릴 때 읽은 Gogh의 전기에서는 다른 애들은 모두 해가 붉은색이라고 하는데
혼자 노란색이라고 주장하는 어린 Gogh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나중에 인상파 화가들이 자신의 인상에 남은 색을 화폭에 끄집어 냈을 때
기존 화단에서 거센 비난을 받은 그런 맥락이 마티스, 블랭크, 칸트의 말에 닿아 있지 않은가 싶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회화에서는 중요할지 모르겠지만
사진에서는 다른 대접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제 작은 생각입니다
유경희님의 댓글

본질을 形、色 으로 나누고 또 거기에 동질한 가치를 부여하는 모든 행위에 맞설수 있는게 예술의 본질이라면 저는 홍선생님이 소개하신 ”고호의 행위야 말로 예술로서의 보편타당한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이 선생님이 인용하신 철학적 명제는 제가 이해 하기에는
”무엇인가 본질은 있는데 그것을 정확하게 인지 못하게 하는 것이 색이라는 관념적인
어떤것” 이라고 규정 하였다면
그것은 비단 서양철학뿐만 아니라 유불선에서도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사진을 예술행위로 본다면 그러한 철학적 명제까지도 과감히 파기할 부분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전 그것이 소위 자유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흑백 사진에서도 전 엄연히 색은 존재하고 그런 색을 표현하는게
과연 칼라와 본질적인 차이가 있을까 라는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그냥 직감적으로 색을 인식하고 표현하는 행위에서
어떠한 테두리나 가치척도를 찾을 필요는 없을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직감적이고 본능적인(회귀) 색에 빠져들고 싶습니다...
송안호님의 댓글

색과 형 즉 색과 물질은 분리해서 생각할 문제가 아닌것 같고 우주최초의 시작이라고 보는 백뱅당시
동시적으로 생성된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색이 형이고 형이곧 색으로 볼수있지 않을가요, 태양을
노란색으로 본것은 고흐의 태양빛이고 내가 태양을 흰색으로 보면 나의 태양빛이 아닐가요, 본래 서구의
사람들은 사물을 이분법적으로 보는 철학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는것 같읍니다. 그러나 동양은 둘이 아닌
하나로 보고 있지 않나요, 율곡은 이와기가 동시에 발한다고 정의 했읍니다. 이런 이론은 빅뱅시 물질과 색
이 동시에 생성되어졌다고 보는 견해와 같다고 봅니다. 그림에 구상과 추상의 차이점과 관점은 무엇을 말하
는지를 알고 싶읍니다. 그리고 가끔 화가분들은 기에관한 제목을 붙이기도 하고 공에관한 제목을 붙인 그림
을 발표하기도 합니다. 이런것은 형인가요 색인가요? 우매한 저로서는 색과 형을 무엇이 먼저다하는 구별
이 어려워서 감히 생각을 적어 보았읍니다. 카메라로도 눈에 보이지않는 형의 세계를 표현할수가 있을가?
이곳 에서 여러분들의 좋은 작품을 보면서 가끔은 깊은 상념에 잠겨 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항상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노현석님의 댓글

일전에 읽은 책 중에 (사진으로서의 철학이었나 아님 철학적 관점에서의 사진이었나 불명확함)
말씀하신 대로 형이 하나의 이데아를 나타낸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빛의 조절로 하나의 형을 만들면 그것이 하나의 이데아, 작가가 하고자 하는 그림형식이 되겠지요.
여기에 색이 있으면....그 하나의 색으로도 하나의 또 다른 이데아가 형성된다고 책은 이야기를 하더군요.
색 하나에 표현하고자 하는 하나의 그림형식(좀 표현이 그렇지만,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빌자면......)
이 나타나 진다는 정도의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어느 때부터인가 사진에서 색을 점점 배제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고,
지금은 사진을 담을 때 정말 필요한 색인가 고민하게 되곤 합니다.
뭐 그래봐야 그저 그런 사진이지만요......ㅎ
김상철(2)님의 댓글

사물을 바라볼 때 얻게되는 1차적인 정보는 색입니다. 색은 망막의 서로 다른 세가지 원추세포를 통해서 빨강, 노랑, 초록의 강도를 전기적 신호로 받아 들입니다. 형체를 가진 사물을 다른 것과 구분하는 것은 눈으로 들어온 1차적인 정보를 뇌에서 복잡한 과정을 통해 처리될 때 가능해 집니다. 색의 급격한 변화가 일관성 있는 기하학적 구조를 따라서 생겼을 때 그 경계를 인식함으로써 형체를 인식하게 됩니다.
얻어진 형체로부터 다른 것과 구분되는 본질적인 속성을 인식하는 과정에는 예전의 경험이 동작합니다. 특히, 가공되지 않은 1차적인 정보는 예전 경험과 강한 연결고리를 가진 듯 합니다. 예를 들어, 뜨거운 것들은 모두가 빨간색이었다는 축적된 경험은 지금 보고 있는 빨강색에서 뜨거운 것과 연관된 모든 경험과 그로 인해 파생된 어떤 느낌을 동시에 불러 옵니다. 이와 같은 이전의 경험은 내 앞에 있는 또 하나의 사물을 예전의 경험 위에서 파악하게 만듭니다. 내 앞에 있는 사물은 예전의 경험과 무관한,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형태와 속성을 지녔다 하더라도 과거의 경험에서 얻어진 그 무언가가 거기에 묻어 나오죠.
사물의 본질(?)을 가감없이 드러내는 객관적인 정보는 제 생각엔 없지않나 싶습니다. 색에 관한 정보 뿐 아니라 형체에 대한 인식도 제 생각엔 이전의 경험 위에서 드러난다고 여겨 집니다. 제가 지금 쳐다보고 있는 모니터가 직사각형의 형태라고 믿는 믿음 역시 이전의 많은 경험 위에서 얻어진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수 없이 많은 경험 속에서 기하학적인 사각형에 대한 인식이 자리를 잡게 되고 모니터를 보는 순간에 그 경험이 동작하여, 비슷한 무리를 머릿 속에서 분류하여 이미 경험한 사각형의 형체에 모니터를 한 자리 차지하게 하는거죠. 단지, 사물의 색 보다는 형태가 훨씬 더 그 사물의 속성에 더 가깝게 가 있을 여지는 있어보입니다만.... 왜냐하면 형태는 색의 정보보다는 훨씬 더 복잡한 정신 작용 후에 얻어지니까요...
여하튼, 제 생각엔 몇 몇 사람들이 색 보다 형을 더 우선한 것은, 제 짐작으로는 (사실, 이런 주장을 한 사람들에 대해 제가 아는 바가 없습니다.) 이 사람들의 토대가 플라톤적인 부류, 즉, 사물의 본질은 존재한다. 이는 선험적이고 직관적인 과정을 통해서 인식할 수 있다는 생각을 지녔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들로 보입니다. 이런 생각을 품는다면 색은 위험한 것이죠.
전, 아직 잘 모르지만, 유선생님 말씀에 공감이 갑니다.
흑백조차도 색이 있다는 말씀과 색은 사물로 부터 기어나온 또 하나의 그 사물에 대한 소중한 그 무엇이니까요. 그게 그 사물의 본질(이 있는건지 모르겠지만)에 가까이 있던지 멀리 있던지 간에.
하지만, 이런 경고는 두고두고 고민할 만한 좋은 화두네요.
좋은 화두, 좋은 답변들.... 어줍잖은 제게는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유인환님의 댓글

이치환 회원님께서 쓰신 원글에 나온 명제 3가지.
1. 색 때문에 회화는 망할지 모른다.
2. 형이 온전하지 않으면 색은 무의미하다.
3. 형이 기본이고 색은 형이 허락할 때만 제구실을 한다.
위와 같은 명제를 던진 철학자들이 어째 이런 어려운 말을 하게 되었는지 ,
그 이유와 의미를 제대로 이해 하지 못하고 그 말 자체만 딱 잘라내어 읽어보면
이게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네요
이치환님이 올리신 글타래 원문에 명확한 결론이 담겨 있지는 않은 것으로 생각되어
위 글을 올리신 속 뜻까지 명확히 알 수는 없으나 , 그냥 쉽게 생각해서, 제 생각에는,
흑백사진이 기본이고 색으로 치장한 칼라사진은 형을 색으로 치장한(보완한) 사진이라는
의미로 보이기도 합니다.
하긴, 사진은 흑백사진으로 시작되었고
한국화와 중국화의 수묵화는 당초 먹( 검정색)으로 그린 그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것은 사진이나 그림이 시작될 당시 채색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닙니까?
위 화두와 맥을 똑같이 하는 내용은 아니지만,
음악에서 있었던 비슷한 경향을 말씀드리자면
클래식 음악에서도 1990년을 전후 하여 소위 "원전연주" 라는 연주 방식이 시작되어
한때 붐을 이루어 너도 나도 많은 연주자, 지휘자들이 원전연주에 매달린 일이 있었습니다.
원전연주자들이 "원전연주"로 회귀하자고 주장한데는,
이미 회원님들께서 모두 다 잘 아시겠습니다만,
소위, 요즈음 관현악단의 연주는 그 곡이 작곡 될 당시에 비하여 규모가 너무 커져서
음악 자체의 묘미 보다는 웅장하고 사람을 홀리는 음향적 효과로 너무 치장을 하고 있고
담백한 원곡에 각종 양념과 향신료(연주적 기교)를 너무 많이 섞어 넣어
그 음식의 진정한 맛을 망가뜨리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래서,
그 곡이 작곡 되어 초연되었을 때의 악단 인원수 규모의 소규모 관현악단에 의하여
그 당시 악기(바이올린이나 첼로의 현을 양의 창자로 만들었던 옛 악기 제작 방식으로 제작한 악기)로
연주 기술과 기교에 치중하지 않고 작곡자가 그 곡을 작곡했던 본래적 의미를 되살리는
연주로 그 음악을 되살리자는데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음식 본래 맛보다는 원재료에 섞어 넣는 조미료, 양념의 맛으로 음식 맛을 치장하는 요새 음식보다
양념을 최소한으로 쓰는 산사 음식 같은 음식의 조리법으로 돌아가자고 한 것이지요.
그런데 연전에 타계한 세계적 지휘자 솔티 경은 그런 운동에 부정적인 입장을 명확히 하여
풍부한 음향과 개선돤 악기 음색으로 좀더 나은 음악을 들려주는 것이 어째서 잘못된 일인가 ?
라고 반문하면서 원전 연주를 일축하기도 하였습니다.
유인환님의 댓글

유경희 회원님의 글타래 Color Balance 에 올리신 이치환 님의 글을 읽고서
오늘 비로소 이치환 님께서 어째 위 글을 올리셨는지 비로소 이해를 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오늘 새벽, 집에서 올린 위 글을 삭제하기는 뭣하고 해서 여기 다시
글을 올립니다.
칼라 사진에서 자신만의 색감의 추구
라는 문제가 그렇게 어려운 문제라는 점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어줍쟎은 글 올린게 부끄럽기도하고 - - -
한국에서 구해본 사진관련 책에서는 찾아 볼수 없는 내용들이라
올리신 글 읽으며 혼자 공부를 할 수 있어 좋습니다.
이치환님의 댓글

원 작성회원 : 유인환
유경희 회원님의 글타래 Color Balance 에 올리신 이치환 님의 글을 읽고서
오늘 비로소 이치환 님께서 어째 위 글을 올리셨는지 비로소 이해를 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오늘 새벽, 집에서 올린 위 글을 삭제하기는 뭣하고 해서 여기 다시 글을 올립니다. 칼라 사진에서 자신만의 색감의 추구 라는 문제가 그렇게 어려운 문제라는 점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어줍쟎은 글 올린게 부끄럽기도하고 - - - 한국에서 구해본 사진관련 책에서는 찾아 볼수 없는 내용들이라 올리신 글 읽으며 혼자 공부를 할 수 있어 좋습니다. |
아닙니다. 어쨌던 인환님의 의견도 충분히 생각해봐야 할 유익한 내용입니다.
저도 여태껏 무심히 감각적인 반응만으로 색을 대해왔는데,
색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고민하고 연구한 내용을 읽어보면서
'색'을 표현 수단으로 한다면 정확히 내 자신의 반응을 알아야 겠다고 생각했고,
알려다보니 점 점 혼란스러워지고, 내 자신이 정말 원하는 색이 무엇인지
갈 수록 모호해져서,
과연 선현들의 말처럼 색을 억제해야 하는 것일까?
생각이 나서 이 글을 올린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을 들어보고 싶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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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여러분이 색에대한 생각을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색에 대한 학문적인, 논리적인 정의는 논할 수록 어려워지는 것 같습니다.
말씀들이 전문적이고 깊어서 여러번 읽어도 뜻을 가름하기가 어렵습니다.
제가 찍은 칼라 사진 중에 가장 마음에 들었다고 생각되는 사진을 오래 보고 있으면
볼 수록 마음이 거부하는 현상을 느낍니다. 그래서 오르세 미술관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인상파들의 작품, 마네와 모네와 세잔느, 고흐의 그림을 오래도록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림은 칼라 사진처럼 거부감이 생기지 않더라는 겁니다.
이때부터 '내 사진 칼라'에 대해 고민을 시작했습니다.
인터넷을 뒤져 수많은 칼라사진을 보았지만 역시 같은 거부감이 생기니
도대체 칼라 사진이 어째서 회화처럼 불안한지? 어찌해야 되는지?
고민이 되었고, 색에 대한 책을 찾아본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렇게들 표현했더군요.
본질적인 문제라고 말씀하신 부분에 깊이 동의합니다.
그리고 어쩌면 색 표현은 인간이 신의(자연의) 모방 행위 중에
가장 위험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래서 고전주의 회화에서 특정한 색에 대해, 채도와 명도에 대해
엄격하게 억제시켰다고도 생각합니다.
어쩌면 칼라 사진은 얼마나 색을 억제해서 표현하느냐,
색의 명도와 채도를 얼마나 억제하느냐가 핵심이 아닐지?
그리고 자신만의 색도 그 억제 정도로서 결정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합니다.
흑백 사진에서 빛(=회색톤과 콘트라스트)의 억제 정도로써 작가의 개성을 표현하듯이...
홍건영님의 댓글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ry_type=series
시간이 나면 가끔 네이버캐스트에서 글을 읽곤 하는데
위 글을 읽다 보니 라클의 이 글타래가 생각나서 링크를 걸어 봅니다
이 글타래의 도입부 정도 되는 글인 것 같네요
이치환님의 댓글

원 작성회원 : 홍건영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ry_type=series
시간이 나면 가끔 네이버캐스트에서 글을 읽곤 하는데 위 글을 읽다 보니 라클의 이 글타래가 생각나서 링크를 걸어 봅니다 이 글타래의 도입부 정도 되는 글인 것 같네요 |
감사합니다^^ 즐겨찾기에 저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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