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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엄창호
  • 작성일 : 11-06-10 14:00

본문

<#1>
봄기운을 완연히 느끼게 된 어느 날, 모(某) 씨는 새벽잠에서 깨어 후다닥 일어납니다. ‘아니 이제는 젖국(젓국-젓갈이 삭아서 우러난 국물)까지?’ 하는 생각과 더불어 대문을 열고 뛰어 나옵니다. 그리고는 곧장 골목 모퉁이에 접한 자신의 집 담벼락 쪽으로 뛰어옵니다. 나와서 보니 진짜로, 벽과 길바닥을 경계 부분을 중심으로 젓국이 뿌려져 있고 역한 냄새가 진동을 합니다.
‘cc tv로 감시한다’는 경고문을 붙인 것도 보람없이, 어둠을 도와 누군가 이런 만행(!)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모 씨는 씩씩 숨을 몰아쉬며 집으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일필휘지, (소설가 이상이 했다는)자동기술적인 글쓰기를 시작합니다. 말 그대로 (저주의 감정이 담긴)글이, 머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손끝에서, 아니 붓 끝에서 술술 흘러나옵니다.

“.년.인지 .놈.인지
젖국 버린 사람을
.꼭. 찾을 것이면
신고 할꺼다
짐승 같은 짖을 하고
아가리 밥이 드러 가나
천벌 받을 것이다”

이렇게 쓰고 나서는 저주가 오래가도록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투명테이프를 빡빡 소리 나도록 떼어 붙입니다. 그러고는 반분이나마 풀린 얼굴로 집으로 들어갑니다.

<#2>
날씨가 좋은 4월 초입니다. 본격적으로 사진에 흥미를 갖기 시작한, 일정한 사명감마저 지닌 한 사내가 골목을 서성입니다. 사내는 그 전날, 공공도서관에서 마련한 사진 강좌에 참여한 사람들의 전시회 ‘오래된 도시이야기’를 관람했고, 그 자리에서 ‘그래, 나도 곧 변해버릴지 모를 이 도시 모습을 기록해 둬야겠다’고 다짐을 한 상태입니다.
기웃거리던 그 사내의 눈에 벽보가 포착됩니다. 사명감이 발동합니다. 아무리 테이프로 봉해놨어도 비만 몇 번 오면 얼룩져버릴 광경을 사진에 담기로 합니다. 그리고는 직업병이 발동했는지 분석 및 평가에 들어갑니다.

‘젖국, 짖, 드러 가나’ 등은 차치하고(생각해 보면 ‘젖국’이라는 말도 우스운 연상을 하게 하지만 글의 목적에는 안 맞으니 생략....),
맞춤법에 따른다고 ‘년’을 ‘연’으로 고치거나, ‘할꺼다’를 ‘할거다’로 고친다면 글의 목적이 상당 부분 희생될 수밖에 없음을 생각합니다. 또한 교양있는 말을 쓴다고 ‘아가리’를 ‘입’ 등으로 바꾼대도 마찬가지 결과가 날 뿐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점잖게 ‘연놈’이라는 말 대신 ‘사람’이라는 말도 쓰기는 했군요)
또, 제대로 된 문장을 만든다고 ‘꼭’을 ‘신고 할꺼다’ 앞으로 옮긴다면 효과가 역시 떨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찾아서 신고한다’고 해 놓고는 ‘천벌받을 거’라고 말하는 등의 논리성의 문제도 여기서는 하등 문제될 것이 없다고도 생각합니다.
강조하고자 하는 말, 즉 ‘년, 놈, 꼭’의 양쪽에 붙여 놓은 온점(마침표)에도 눈이 미칩니다. 아주 독창적이고 효과적인 사용이라 생각합니다.

이러저러한 생각 끝에 재미있는 글이고, 글쓴이의 심리를 적절하게 전달하는 효과적인 글이라는 평가를 내립니다. 직업벽이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이런 현상을 뭐라고 표현해야 하나....’, ‘뭔가 있는데 뭐라고 말할 수는 없고....’ 고민을 시작한 것입니다. 골목길을 도는 내내 벽보에 나타난 현상을 어떻게 명명(命名)할까 하는 생각에 몰두합니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들어 (마음속으로)무릎을 탁 칩니다.
‘욕설적 허용’이라는 말이 그의 머릿속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나름대로 일리는 있습니다.
시(詩)에 ‘시적 허용’이 있는데 (다 아시겠지만, ‘설레다’가 표준어인데, 운율감이나 어감 등을 살리기 위해 ‘설레이다’로 표현하기도 하지 않습니까.-시인 중에는 ‘설레이다’가 표준어인 줄 알고 쓴 사람도 여럿 있겠지만요.- 김영랑이라는 시인은 ‘색시’도 아니고 ‘시약시’도 아닌 ‘새악시’라는 말을 만들어내기도 했지요.) 욕설에도 ‘욕설적 허용’이 있다는 것이 뭐 문제가 되겠습니까.
문제는 그것을 대단한 발견인 것처럼 자신을 보며 스스로 감격하는 그 사내에게 있겠지요.

어쨌든 그 사내는 그날 이후 더 자주 ‘오래된 도시’의 골목을 기웃거리고 있답니다.
추천 0

댓글목록

신한주님의 댓글

신한주

흥미진진하게 읽고, 보았습니다..
한가지 사실을 재미있고 깊이 있게 분석하신 듯 합니다...^^

앞으로 엄선생님의 골목사진과 이야기 기대됩니다~

정태환님의 댓글

정태환

"젖국" 냄새가 여기까지 나는것같습니다^^

이런것이 사람사는 맛 아닐까요! 콘크리트만 무성한 도시 가끔은 숨이막힙니다..

신 정식님의 댓글

신 정식

사진과 글이 진하게 마음에 들어 오네요...

엄창호님의 댓글

엄창호

인용:
원 작성회원 : 신한주
흥미진진하게 읽고, 보았습니다..
한가지 사실을 재미있고 깊이 있게 분석하신 듯 합니다...^^

앞으로 엄선생님의 골목사진과 이야기 기대됩니다~


잘 봐주셔서(잘 봐 주고 계셔서) 고맙습니다.
골목을 많이 돌기는 하는데, 볼 만한 사진은 많이 찍지 못했습니다. 그냥 기록한다는 생각으로 꾸준히 찍고는 있습니다. 괜한 사명감(?)에 마음이 급해지기도 합니다.^^

엄창호님의 댓글

엄창호

인용:
원 작성회원 : 정태환53
"젖국" 냄새가 여기까지 나는것같습니다^^

이런것이 사람사는 맛 아닐까요! 콘크리트만 무성한 도시 가끔은 숨이막힙니다..


저도 그때 사람의 냄새를 맡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잘 봐 주셔서 고맙습니다.

엄창호님의 댓글

엄창호

인용:
원 작성회원 : 신 정식
사진과 글이 진하게 마음에 들어 오네요...


잘 봐 주셔서 고맙습니다.
사실 제 목적은 웃음을 나누자는 것이었는데, 어땠는지 모르겠습니다.

염상협님의 댓글

염상협

흐르지 않는 시간과 태화강 사진들 보며, 기록 시작하신 줄 짐작은 하고있었는데,
이렇게 재밌는 이야기와 깊은 통찰이 동반된줄 미처 몰랐습니다.
글 재밌게 읽었구요, 저도 엄창호 선생님 골목사진 잘 감상하겠습니다.

사우/유성태님의 댓글

사우/유성태

벽보의 작성자에겐 미안하지만 약간의 미소를 띄며 웃고 있습니다.^^;;

우리네 삶이 어찌보면 별거 아닌거고 어찌보면 치열한거고 하는 걸까요?ㅋ
엄창호 선배님의 사진 흥미롭게 보고 있습니다.

엄창호님의 댓글

엄창호

인용:
원 작성회원 : 염상협
흐르지 않는 시간과 태화강 사진들 보며, 기록 시작하신 줄 짐작은 하고있었는데,
이렇게 재밌는 이야기와 깊은 통찰이 동반된줄 미처 몰랐습니다.
글 재밌게 읽었구요, 저도 엄창호 선생님 골목사진 잘 감상하겠습니다.


별거 없는 제 사진을 보시고도 늘 힘을 주시더니..(늘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을 부담을 팍팍 주시네요^^;

엄창호님의 댓글

엄창호

인용:
원 작성회원 : 사우/유성태
벽보의 작성자에겐 미안하지만 약간의 미소를 띄며 웃고 있습니다.^^;;

우리네 삶이 어찌보면 별거 아닌거고 어찌보면 치열한거고 하는 걸까요?ㅋ
엄창호 선배님의 사진 흥미롭게 보고 있습니다.


관심 가지고 지켜봐 주신다는 느낌 가지고 있습니다.(고맙습니다)
벽보에서는, 자신의 마음을 정말이지 잘 표현했다는 느낌이 들어 감탄했습니다.

엄창호님의 댓글

엄창호

벽보의 글과 제 글을 비교해 보면, 벽보의 글이 훨씬 낫습니다.
지식인인 척하는 제 글은 제가 읽어봐도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반면에 벽보의 글은 하고자 하는 말, 표현하고자 하는 감정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라클> 선배님들의 글, 특히 연배가 있어보이는 선생님들의 글 앞에서도 저는 부끄러워집니다. 구수하고, 정감 있는 살아있는 말들을 자주 보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들이 풍성하게 있는 곳이기 때문에 저는 <라클>을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사진이 좋은 것은 말할 것도 없고요.

한 성민님의 댓글

한 성민

몰래 젖국을 버린사람은 너무 생각없는 행동을 한 것을 반성해야하겠지만,
아마 그러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서 저렇게 원망의 말을 쓴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쫓고 쫒기는 관계의 묘한 긴장감이 머릿 속에 그려져서
서로의 입장에서 다시한번 바라보게 되는것 같습니다.

선배님께서 골목사진으로 보여주시는 이야기가 기대됩니다. ^-^

엄창호님의 댓글

엄창호

인용:
원 작성회원 : 한 성민
선배님께서 골목사진으로 보여주시는 이야기가 기대됩니다. ^-^


부담 주시는 분 한 분 더 계시네요^^; (많이 격려해 주시는 것, 고맙게 여기고 있습니다.)

엄창호님의 댓글

엄창호

인용:
원 작성회원 : 양세원
선생님의 해학적 통찰력에 재미있게 웃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재미있게 보셨다니 다행스럽스니다. 잘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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