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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의 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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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최덕형
  • 작성일 : 10-02-08 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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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의 미덕

나는 요즈음 느림의 미덕에 빠져 있다.
옛날 교육 현장에 있을 때는
종소리와 함께 교실에 들어가고
종소리와 함께 교실을 나와
학생들 생활지도하고
과제물 검사, 수행 평가 등
꽉 짜여진 일정 속에서 느림을 느낄 여유가 없었지만
퇴직하고 나서 시간적 여유가 생기니
마음의 여유까지 생긴다.

미리 배합된 커피믹스를 끓는 물에 타서 마시는 것보다
원두를 갈아
그윽한 향기를 음미하며 직접 끓여 마시는 기다림이 좋고
결과물을 그 자리에서 확인할 수 있는 디지털 카메라보다
필름을 넣고 노출 맞추고, 거리 맞추고...
그리고 인화 현상의 긴 시간동안
흥분된 기대감으로 기다리는 필름카메라가 좋고
그저 맑지만 무미건조하고 차가운 음원의 CD음악보다
비록 잡음은 섞여 나오지만
낡은 LP판을 턴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골라 듣는
깊이 있고 따뜻한 느낌의 아날로그 음악이 더 좋다.

나는 정확한 시간을 맞추는 전자시계보다
좀 틀리지만 매일 태엽을 감아주어야 하는
구식 시계를 지금도 차고 다닌다.
하루라도 밥(태엽)을 주지 않으면
배고프다고 멈추어 버리고 투정부리는
하루에도 몇분씩 느리게 가는 시계이지만
그래도 난 꾸준히 차고 다닌다.
남들은 그 고물 시계 버리라고 하지만
난 그저 좋기만 하다.

그리고 얼마 있으면 빛 바래버리는 볼펜보다
잉크를 넣는 만년필로 써야 글씨가 잘 써 진다.

요즈음 나는 스위치를 넣자마자 나오는 첨단 오디오보다
스위치를 넣고 한참을 기다려야 나오는 진공관식 오디오가 가지고 싶어진다.
진공관이 예열되고 바리콘을 돌려
듣고 싶은 주파수를 맞추고 깊이 있는 따스한 음악을 듣고 싶다.
승용차를 타고 복잡한 거리를 질주하는 것보다
버스타고 공짜 지하철 타고 휘휘 둘러보는 것이 더 좋고
천천히 걸어 다니며 감상하는 것이 더 좋다.

강화집에 가면 난 이따금 전등을 모두 끄고 촛불을 밝힌 채
자연을 호흡한다. 그리고 하늘에 반짝이는 뭇별을 본다.
그러면 영혼까지 맑아지는 것을 느낀다.
이따금 손주가 오면 조른다.
“할아버지 우리 전등 끄고 촛불 켜요”

급변하는 사회 현실 속에서
점차 이 변화에 순응하기 힘들어지는 나이가 되어서일까?
이젠 그저 기다림과 인내가 필요한 아날로그가 좋다.

오늘도 난 낡았지만 연륜이 깃든, 그리고 나의 영혼이 깃든
Zeiss Ikon의 중형 접이식 카메라인 Nettar(몇 년 전 독일에서 직송해온 놈)와 Leica M6를 가방에 쑤셔 넣고 집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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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심회갑님의 댓글

심회갑

동감 입니다!!!
오늘같이 추적 추적 비가 내리는 날에는
왠지 기운이 없고 몸도 나른해 지는군요
세상 모두가 바쁘게 돌아가는 요즘에
오히려 느긋하게 살아간다는 것이
한결 여유로워져 좋을것 갔읍니다
저도 이번 주말에 저의 애장기인
슈퍼 이콘타531을 등산복에 집어넣고
산에 갈까 합니다.

신 정식님의 댓글

신 정식

참 맛이 우러나오는 멋진 삶입니다.

박유영님의 댓글

박유영

저도 언젠가 최덕형님 말씀처럼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김양태님의 댓글

김양태

음심도 슬로우 푸드가 사람을 더 건강하게 만들어 준답니다.
지금은 없어진 "코리안 타임"이란 말 있지요.
우리도 한 때는 느리게 사는 경향이 있었던 것 같은데....

아무튼
멋진 라이프 스타일을 가진 것 같습니다.

차원경님의 댓글

차원경

삶의 여유와 운치가 솟아나는 지극히 감미로운 글이였습니다 나는 왜 안되는가 ?

강정태님의 댓글

강정태

좋으신 말씀, 공감하는 바 큽니다.

김영준(muzician)님의 댓글

김영준(muzician)

공감이 가는 글입니다.

뭐든 빠른 것이 편리하고, 공감을 얻는 세상이라지만..

가끔은 느려서 좋은 것도 많더군요..

인간성회복 차원에서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 자주 pause button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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