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나는 괜찮은 중년 남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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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 김명기
- 작성일 : 10-01-26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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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내에게 귀걸이를 사주었다. 아내의 스타일은 알고 있지만, 난 그 정도 능력이 되지 못한다. 우리는 승마에 관련 된 일을 하니까, 말 모양이 새겨진 귀걸이를 샀다. 만 원. 선물로 너무 싼 것은 아닐까? 물론 많은 사람들이 어려운 경제 상황에 상상도 못할 겨울을 통과하고 있는데, 만 원이 싸다고 하면 죽일 놈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겐 너무 소중한 아내. 그래서 만 원 보다는 조금 더 비싼 것으로 사주고 싶었다.
아내는 새벽 5시까지 일한다. 그래도 우리 일은 쉽게 풀리지 않는다. 지난 3년 동안 사업하면서 나와 아내의 월급을 제대로 챙긴 적이 없다. 그러나 직원들의 월급은 한 번도 밀린 적이 없다. 자랑꺼리는 물론 그것 하나다. 나는 그다지 변변한 남편이 아니다. 아내가 밤을 새우는 것은 대개 서류 때문이다. 늘 생각하지만 우리나라의 서류 체계는 너무 복잡하다. 밤새도록 만들어 제출하면, 누가 그걸 보기나 할까? 아마 캐비닛에 1~2년 쌓여 있다가 아무 문제도 없으면 그것으로 쓰레기 소각장으로 가겠지. 재활용이라도 된다면 오히려 다행이다.

그저 체면 다 빼고,
'문제가 생기면 내가 몽땅 책임지겠습니다.'
그럼 다 끝날 일이다. 하지만 책임의 소재를 가리기 위한 내용이 한 줄 두 줄 들어 가다보면 한정 없다. 누구라도 억울한 일은 당하고 싶지 않겠지. 그래서 들어갈 내용만 들어가면 되겠지만, 칸이 어떻고, 줄이 어떻고, 결재란이 어떻고, 참. 머리 아프다. 동일한 일을 하는 곳에 제출하는 것인데도 10곳이면 10곳이 다 다르다. 이게 21세기 한국의 현실이다.
아내는 그래도 내게 불평 한마디 하지 않는다. 오히려 조금 불합리한 말을 하는 상대방의 입장을 최대한 맞추어 주려고 한다. 오히려 내가 욱! 할까봐 대개는 내게 말도 하지 않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서류를 만들고 또 만든다. 아내는 평소 불평 한 마디 없이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다. 이왕 해 줄 거면 잘해 주어야죠. 하지만 그 선을 넘으면 끝이다. 아내는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깔끔하게 정리한다. (나는 그 점이 가끔 두렵다.)
나는 이런 서류 체계에 약간은 반발하는 사람이다. 예전 텍사스인스트루먼트나 씨멘스, 로즈마운트, 싸이텍 등의 외국회사들과 일할 때, 그들의 간편한 서류체계에 놀랬다. 그들은 제목과 날짜, 내용만 입력하면 그뿐이다. 그리고 책임도 제대로 진다. 하지만 국내 대기업은 서류 형식 채우느라 하루가 간다. 나는 해외 굴지 기업의 형식으로 서류작업을 했다. 대기업의 눈으로 볼 때, 제멋대로였겠지. 어쩌면 I.M.F. 때 내가 망한 것도 약간은 그런 영향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 자식들은 그렇게 일하고도 일 년에 두 달씩이나 휴가를 즐기면서 월급도 무지하게 많이 받는다. 그들로부터 물품을 수입하고 공급하는 나로서는 피를 말리는 두 달이었다. 제기랄이다.
하지만 현실은 형식을 요구한다. 아무도 보지 않을 서류를 열심히 만들면 밥이 생긴다. 만약 하지 않는다면 나는 굶는다. 혹시 국가적으로 알찬 내용만 채운 서류가 돌아다니는 문화가 된다면 대한민국의 성장은 100배나 더 빠를 것이다. 안다. 물론 헛소리다.
어쨌든 나는 아내에게 조금 더 비싼 귀걸이를 사주고 싶었다. 눈에 차는 귀걸이가 있어서 가격을 물어 보았다.
"얼마지요?"
"이건 14K라서 36만원, 원래 46만원인데, 할인해서 싸요. 사세요."
"아, 네 좀 더 보구요."
나는 당연히 두 번 생각도 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아내에게는 이보다 100배나 더 비싼 선물도 모자라겠지만, 나는 내 처지를 감안해야 한다. 만약 내가 부자라면 명품 귀걸이를 못 사줄 이유가 뭔가? 돈 있는 자들은 좀 써 주어야 한다. 그래야 없는 사람들도 먹고살지. 하지만, 자신의 처지를 약진의 발판으로 삼아... 나는 국민교육헌장을 외우던 유신시대의 중년이다. 내 형편을 감안하지 않을 수 없다. 슬그머니 매장을 한 바퀴 돌아 다시 조금 저렴한 코너로 간다. 아내의 스타일에 맞는 귀걸이를 발견한다.
"이건 얼마죠?"
마음 속 상한선보다 조금 더 높지만, 마음에 짐이 되는 정도는 아니다. 나는 가격을 지불하고 조그맣고 화려한 상자에 포장 된 귀걸이를 받아든다. 아내가 좋아할까? 확신이 서질 않는다. 물론 아내는 좋아할 것이다. 이 선물이 마음에 들고 안 들고 간에, 안 좋더라도 좋은 척 할 것이다. 나는 아내의 마음을 안다. 그래서 선물 고르기가 가장 힘들다. 일 년에 한두 번 하는 선물이라서 더욱 그렇다. 마음에 안 들면 어쩌지? 선물을 아내의 책상위에 두고 나는 내 일에 몰두한다. 그리고 소파에서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난다. 아내다. 아내가 부츠를 벗는 동안 고양이가 먼저 달려 나간다. 아내와 고양이는 현관에서 지난 8시간의 이별에 한참 동안이나 부산스럽게 해후한다. 눈물 날 정도다. 아내는 현관문을 닫고 핸드백을 내려놓고, 코트를 벗고 화장실에 가고 돌아와 의자에 앉는다. 나는 잠이 깬 채, 눈을 뜨지 않고 아내의 움직임을 귀로 좆는다. 잠깐 아내의 움직임이 멈춘다.
"어머"
아내의 음성이 두 옥타브 정도 올라갔다. 그리고 아내가 깡총깡총 뛰는 소리가 들린다. 아내는 그야말로 뛸 듯이 좋아하는 것이다. 나는 슬그머니 눈을 뜬다. 왜 그래?
"이거 누가 줬어요?"
참, 이 세상에 우리한테 선물할 사람이 어디 있다고. 내가 샀지, 당신 주려고. 아내는 귀걸이를 책상위에 가지런히 두고 사진을 찍는다. 아내의 새로운 취미 사진 촬영이다. 이제 곧 블러그에 올리겠지. 아내는 사진 찍기를 마치고 내게 말한다. 고마워요. 그리고 내 볼에 입을 맞춘다. 내 깜짝 선물 작전은 대성공이다. 나는 오늘 하루 내가 한 일에 만족한다. 나는 남자다. 내 가정을 책임져야 한다. 오늘 아내에게 작은 행복을 주었다. 그래서 나는 괜찮은 중년 남자가 되었다. 물론 내 생각일 뿐이다.
혹시 아내는 맘에 들지 않으면서도 그렇게 춤을 춘 것 아닐까? 뒤통수를 잡아당기는 조그만 의문은 어쩔 수 없다. 나는 너무 영악한 여자와 살고 있다. 인정하자. 나는 아내를 당해낼 수 없을 것이다. 영원히. 어쨌든 아내의 선물을 사면 내가 행복하다. 그래 이렇게 살자. 이렇게 하루가 행복하면 그것으로 충분한 일 아닌가? 감히 아내에게 선물까지 하고. 오늘은 내게 너무 충분한 날이었다.
송화마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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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권영우님의 댓글

괜찮은남자.
멋있는남자.
진정 사랑을 할줄아는남자.
정말 멋있습니다.
김양태님의 댓글

이 세상에 아내 보다 더 소중하고 귀한 것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잘 하셨습니다.
선물을 받고 좋아하는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러웠겠습니까.
앞으로도 가끔 그렇게 아내를 기쁘게 해주는 남편이 되시길 진심으로 빕니다.
송 준우님의 댓글

가족들이랑 미국에 잠시 머무르고 있습니다
미국 시골인 이곳은 두집건너 한집꼴로 자기 말을 가지고 있는듯 합니다
애들이랑 이곳 승마체험 프로그램에 가입해 두어번 말등에 올랐습니다
이곳의 프로그램이란게 일인당 5달러를 내면 말한마리를 주면서
"니가 타고 싶은데로 타라"고 하는 식입니다 (미국식인가요 ^_^)
저는 물론이고 물론 초등학생인 애들도 승마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큰 덩치와는 달리 무척 연약하고 감수성 있는 동물이라는 느낌을 받았더랬습니다
아! 그리고,
말고삐를 잡으면서 김명기 선생님을 생각했습니다 ㅎㅎㅎ
담에 가서 혹 뵐 기회가 있으면 나도 말타봤다고 아는체 해야쥐....^_^
마음을 담아 올리시는 글 늘 즐거이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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