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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나그네(Winterrei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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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김명기
  • 작성일 : 10-01-21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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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나그네(Winterreise)



늦은 아침 따스한 햇살이 테라스로 쏟아져 들어오고 키 작은 허브는 삼각형 작은 그림자를
마루에 만들었다. 발톱이라도 깎을까? 어쩐지 파리해 보이는 발가락을 내려다 보다가, 다음
순간 발톱 같은 것은 까맣게 잊어 버리고 커피를 갈았다.

커피가 드립되는 동안 낡은 레코드를 뒤적인다. 뭔가 마음에 드는 L.P.를 찾게 되면 나는 곧
바로 손을 닦아야 할 것이다. 세월이 레코드에 입힌 묵은 때는 그리 만만하지 않다. 손가락
끝으로 레코드를 찾아가던 나는 Schubert 에서 멈춘다. 자글거리는 잡음이 먼저 들린 뒤,
회색의 음율과 Hermann prey의 둔중한 바리톤이 한 겨울 쌀쌀한 어깨를 감싼다.

어느 알지 못할 공연장에서 피아노 반주를 들으며 서 있는 가수의 모습이 보인다. 피아노가
짧은 전주를 시작하자, 입안의 마른 침을 삼킨 당당한 체구의 바리톤 가수가 호흡을 조절하
며 릴레이 경주의 바통을 넘겨 받 듯, 자신의 성대에서 나온 소리가 피아노 반주 사이로 미
끄러져 들어갈 틈을 노린다.

이윽고 폐 속에 공기가 잔뜩 차오르도록 심호흡을 한 바리톤 가수는, 싱코페이션처럼 잠깐
숨을 멈춘 뒤 첫 소절을 청중들에게 던지고, 한 걸음 앞으로 나선다. 그의 왼 손은 가볍게
그랜드 피아노의 곡면 부분을 짚고, 오른 손은 소리를 펼쳐 보내 듯 천천히 몸의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펼쳐 나간다.

이 순간, 바리톤 가수의 느리고 낮은 음성은 피아노를 완전히 압도하고 그의 음성과 음성사
이에 피아노가 낮은 쪽 음계의 무채색 울림을 들려준다. 그는 잠시 눈을 가늘게 떴다가 갑
자기 몸을 떨며 한소절을 덩어리채 빠르게 뿜어낸다. 청중들은 어깨 죽지에서 출발한 전율
이 귓바퀴의 뒤쪽으로 빠르게 달려가는 것을 느낀다.



보글거리며 드립되던 커피메이커의 소음이 멈추었다. 블루마운틴에 조금 섞인 헤이즐넛의
향기가 미미하지만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이젠 커피의 고동색 흔적이 세월만큼 배어든 미
색의 커피잔에 커피를 흘려넣자, 잠시후 커피잔을 잡은 손 끝이 따스해 짐을 느낀다.

햇살은 거실 벽으로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은밀하게 한 걸음을 옮기고, 커피 잔에서는
한숨처럼 작은 수증기 한 덩어리가 솟아오른다. 그 향기는 순간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든다.
나는 아랫 입술에 대고 있던 따스한 커피 잔을 잠시 떼어 놓는다.

진공관 앰프가 린덴바움(Der Lindenbaum)의 익숙하고 그리운 소리를 중얼거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지난 세기의 삼청동. 낮게 드리운 차가운 대기.앙상하게 낙엽을 떨군 은행나무의 길. 나는
새로운 절망의 예감을 품에 안고, 낮고 소박한 작은 입구를 지닌 카페로 들어섰다. 카페의
조그만 격자 무늬 창으로 겨울하늘의 힘없는 햇살이 달그림자처럼 나무 탁자 위로 떨어졌
다.

코 끝에 스며드는 익숙한 커피향기. 두터운 스웨터를 입은 텁수룩한 수염의 주인은 그저 귀
퉁이가 닭아 너덜 거리는 메뉴를 던지고 돌아섰다. 침묵.

약속 시간은 이미 5분을 넘어섰다. 아니 엄밀하게 말하자면 약속이라고말하기엔 무리가 있
다.

“기다릴게.”

그것은 일종의 선언이고, 분노였고, 잠정적 포기였다. 백만 년전의 지금엔, 함께 이 카페의
문의 힘차게 열었고, 항상 뭔가를 신나게 떠들고 있었고, 우리 사이엔 사랑이라는 밀도 높은
물질이 충만하게 채우고 있었다. 텁수룩한 수염의 주인은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짓고 있
었던 것도 같았고, 조그만 격자 무늬 창의 밖 거리엔 봄이 들끓고 있었다.

“겨울나그네(Winterreise)요. 제일 우울한 버전으로 부탁합니다.”
“왜 그런...”
“음. 너무 행복하니까, 뭔가 밸런스를 잡아 주어야 할 것 같아. 들어봐. 진짜 우울하다구.”
“별난 사람이네요.”

나는 말없이 느리고 고독한 피아노 곡을 따라, 낡아 반들거리는 나무 탁자를 손가락으로 툭
툭 치고 있다.

“잠깐 기다려봐. 이제 보리수(Der Lindenbaum) 가 연주 될 차례야.”
“아! 이 곡 나 알아요. 고등학교 때 몇 번 들어봤어요.”
“이제 우리는 큰 일 난거야.”
“왜요?”
“이런 곡은 누구와 함께 듣는 것이 아냐. 우울하고 단순하지. 그리고 뇌에 각인 되어 버리
는 거야. 언제 어디서든 이 곡을 들으면 곧바로 시간의 터널을 빠져나와 지금 이 자리 이
시간에 도착할거야. 만약 우리가 언제까지고 이 곡을 같이 들을 수 있다면 지금을 기억하면
서 늘 행복하겠지.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이 멋진 순간은, 어쩌면 눈을 감고 싶을 만큼 괴로
운 순간이 될 걸?”
“아무리...”
“그러니까 약속해. 나와 영원히 함께 하겠다고.”

커피잔은 비었고 약속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었던 시간은 이제 45분을 넘기고 있다. 카페
주인은 조용히 다음 L.P.를 턴테이블 위에 올려 놓았고, 추억은 나와 무관한 것이 되었다.
타인이었던 우리가 다시 타인으로 돌아간, 이 세상의 수 많은 그저그런 이야기 중의 하나가
된 것뿐이다.

격자 무늬 창으로는 가로등 불빛이 흘러들어오고 있다. 도저히 현실 같지 않은, 믿어지지 않
는 오늘이 예감되던 절망을 확정지었다. 이제 내겐 큰 일이 생겨버린 것이다. 나는 조그맣게
몸을 웅크린채, 다가올 고독을 견디려 애를 쓰고 있었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났다. 나는 먼지를 털고 L.P.판을 몇 번 부드러운 천으로 닦은 뒤, 희미
한 과거의 개인적인 기억을 소리 없이 켜놓은 T.V.처럼 듣고 있다.

시간의 표백 작용은 완전하지 않다고 해도 강력하다. 이 겨울 행성의 어딘가에서는 분명히
몇 번이고 보리수(Der Lindenbaum)가 연주 되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추억이 소멸 된 사람
들에겐, 그저 코 끝에 씁쓸한 향기를 남기는 회색의 가곡일 뿐이겠지. 역시 그 정도가 가장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다시 커피 잔을 아랫 입술에 대고 향을 가슴 깊숙히 빨아들인다. 12월의 투명한 하늘. 넓은
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 낮고 우울하게 거실바닥을 울리는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
(Winterreise). 따스하고 향기로운 커피. 진공의 공간. 무관하게 흘러가는 시간.

유리 창 밖의 세계는 한 겨울이다.




자작나무 껍질에 새기는 꿈.

www.allbaro.com


린덴바움(Der Lindenbaum)

성문 앞 우물가에,
보리수 한 그루 서 있네;

그 보리수 그늘 아래서
나는 그리도 많은 단꿈을 꾸었지.

나는 그 보리수 가지에다
그토록 여러 번 사랑의 말을 새겼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나는 언제나 그 보리수에게,
나는 언제나 그 보리수에게 갔었지.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Winterreise)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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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이태인님의 댓글

이태인

한 편의 수필같은 글이지만, 가슴아픈 사연이 있나 봅니다.
글 중, 시간의 표백작용 처럼 훗날 입가에 작은 미소하나 짙게되는
아름다운 추억이 되겠지요.
앞으론 좀더 행복하고 즐거운 일들만 가득하길 바람하며,,,
...사진의 표백작용도 나름 강력하지 않을까...싶네요^^
.
.
겨울나그네...한 번 찾아봐야 겠군요...

김창석님의 댓글

김창석

내게도 그런 때가 있었는데....
김선생 글을 읽으며 오래전에 바래버린 추억을 더듬어 봅니다.
이젠 기역조차도 가물가물하니... 세월 이란게...
나이에 가속이 붙는다 더니.... 겨울나그네.. 겨울 나그네...

김명기님의 댓글

김명기

다들 젊었을때, 이런 사연 하나쯤은 있잖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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