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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나와 고양이의 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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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김명기
  • 작성일 : 09-09-27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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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나와 고양이의 새벽

갑자기 시간이 주어졌다. 8시간. 지난 몇 주를 쉬지 않고 달려왔다. 정확히 말한다면 쉴 수가 없었다. 현실과 욕심이 타협해서 몸을 혹사한 것이다.



꿈에는 세금도 붙지 않는다고 말한다. 사실이다. 그러나 그 꿈을 실현하는 데는 감당하기 어려운 노력과 비용이 들어간다. 때로 인생이 송두리째 삼켜지기도 하는 것이다. 실현하지 않을 꿈이란 아무데도 쓸모가 없다. 그것이 꿈의 딜레마(dilemma)다. 세금 붙지 않는다고 무조건 꿈꾸라고 독려하는 짓은 무책임하다. 그런 건 남의 인생에나 충고 가능한 것이다.

그래도 사람의 몸은 정말 대단하다. 그 척박한 상황에서도 점차 적응해 간다. 아침은 여기저기 뻐근한 근육들의 투덜거림과 가슴 한 쪽에 웅크린 염려와 걱정으로 깨어난다.

물론 휴식은 나의 결정이다. 나는 새벽 침대에서 생각한다. 베개위의 두뇌는 천칭저울이 되어 몇 시간 후의 아침을 판단한다. 어떻게 할까? 내가 없어도 세상은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오늘 하루 무거운 염려 속에서 살아야 할 것이다. 어느 쪽이 더 무거울 것인가? 아내가 아프다. 감기 몸살. 나는 단숨에 저울을 치우고 결심한다.

있잖아요.

진정한 자기 것이란 열심히 노력해서 하나씩 갖게 되는 것이...
그래 그런 게 진짜지.
아니 그게 아니구요. 어느 날 갑자기 공짜로 갖게 되는 것. 그런 것만이 진짜 자기 것 같다구요.
뭐?
열심히 일하고 노력하는 것은 또 그만큼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것이잖아요.
그렇지.
그렇게 쌓은 것이 손에 남아 있으란 법도 없구요. 하지만 누가 준것, 공짜로 생긴 것들은 그대로 자기 것이 되죠.
그런가?

가끔 아내의 판단은 신기하다. 세상 살만큼 살아본 나이. 남들만큼은 똑똑한 사람인데, 기발한 의견을 펼친다. 그런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지만 딱히 반발할 수도 없다. 대가를 주고 태어난 사람은 없지. 삶 자체가 공짜다. 물론 후불로 단단히 값을 치러야 하지만. 나는 침대에 누운 채로 어제 아내가 내게 한 말을 곰곰이 되짚어본다.

여보 나는 당신이 가여워요.
그건 무슨 소리지?
물론 당신이 옳아요. 타인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할 때 당신은 격렬히 반응하지요. 그러나 그런 것에 대응하면서 결국 당신이 상처받지요. 나는 우리 아빠를 평생보아 왔어요. 아빠는 엄청난 상처를 입은 거인이에요. 살아오면서 당신에게 정확하게, 정당하게 대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었어요? 우리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과 이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건데... 당신은 제 말을 절대로 안 받아들일 거지요?
응.
알아요. 나는 그래서 당신이 가여워요. 당신은 신념 때문에 평생 상처받으면서 살 거니까.

생각을 마친 나는, 가여운 나는 습관처럼 손을 더듬어 아내를 찾는다. 없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나무 계단을 내려간다. 아내는 거실 소파에 자고 있다. 어린 고양이 양이는 아내의 발밑에 웅크리고 있다. 나는 기억을 더듬는다. 소주 한 병, 맥주 한 병. 나 역시 눈을 뜨니 침대였지, 과정은 기억나지 않는다. 우연처럼 아내는 소파에서 잠든 모양이다.

아내의 이마를 짚어 본다. 지나치게 뜨겁진 않지만, 편도선은 별로 차도가 없는 모양이다. 아내는 삶과 몸살의 밧줄에 묶여 소파에 누워 있다. 바이러스가 소인국 사람들이 걸리버를 잡아둔 것처럼 아내를 꽁꽁 묶어 둔 것이다. 아내는 실눈을 뜨고 내게 부탁한다.

이불 좀 갖다 주실 수 있어요?
응 원래는 안 되는 건데 오늘만 해줄게.

이런 재미없는 농담에도 아내는 볼의 근육을 당겨 미소를 지어준다. 나는 아내의 발치에 앉는다. 날이 밝으면 병원에 다녀와야겠다. 아내는 옅은 잠 속에서 조금씩 뒤척인다. 작게 신음하는 소리가 내 심장을 울린다. 나와의 삶은 아내가 선택한 것이지만, 아내 역시 모든 것을 짐작하진 못했다. 나는 치열한 사람이고 아내의 입장에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부분도 있다. 때로 감당하기 힘들겠지. 그러니 몸살이 나쁜 것만도 아니다. 이 순간 나와 아내의 시간을 만든 것은 몸살이다.

시간은 지난 시간을 돌아보게 만든다. 개인적으로 시간이 지닌 순기능 중에 가장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돌아보지 않는, 방치 된 시간이 무슨 소용이랴. 일이 바빠지고, 시간은 질주한다. 사람들이 모여들고 약속들이 생겨난다. 경험으로 지켜지지 않을 약속을 가려낸다. 듣기에 가장 좋은 약속들은 대부분 지켜지기 어려운 것들이다. 지켜지지 않을 약속 앞에서도 나는 미소를 지을 수 있다 아마 조금은 노련해 진 것이겠지. 나는 아내와 의논한다.

아무려면 어때요? 그 사람의 마음은 정말 그렇게 바라고 있는 것이겠지요. 그 약속이 지켜지든 아니든 우리는 열심히 일할 것이고 이대로 조금 더 고생하면 될 텐데요. 그냥 고맙게 생각하면 되죠,

나는 조.금.만. 이라는 단어 앞에서 망설인다. 조.금.만. 이라는 말은 마음속에서 맴돈다. 지난 5년 동안 우리는 수많은 일거리와 걱정꺼리 앞에 조.금.만. 이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일회용 밴드처럼 조.금.만. 은 입을 벌린 시간의 상채기들을 감싸주었고, 가슴을 무겁게 만든 현실을 그럭저럭 넘어갈 수 있었다.

일주일 내내 쉬지 못하고도, 조금만 더 하면 끝날 거예요.
적지 않은 금액을 빌리고도, 조금만 더 갚으면 끝나겠지요.
마침내 누적된 피로로 몸져누워도, 조금만 쉬면 나을 거예요.

아내는 늘 내게 조금만이라고 말해준다. 나는 지켜지지 않을 약속 앞에서, 아내가 말하는 조.금.만. 의 무게를 느낀다. 가슴 속의 납덩이가 조금 더 무거워진다. 기다리면 일은 진행 될 것이고, 기다리면 걱정은 또 다른 걱정에게 점령당할 것이고, 기다리면 고대하던 것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되고 새로운 것들을 고대하게 될 것이다. 기다림 속에서 시간은 물처럼 흘러가고, 우리는 조금만을 반복하며 견디어내고, 참아내고, 마침내 살아낼 것이다.



소파에서 잠든 아내는 다시 한 번 몸을 뒤척이며 내 허리께에 발을 밀어 넣는다. 나처럼, 아내도 내 존재에 안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일요일 새벽, 나는 아내의 잠을 방해하지 않도록 소리 죽인 TV화면을 보고 있다. 오늘은 흐리고 한때 비. 그러나 내일은 맑을 것이다. 이런 건 평생을 반복하며 되풀이 되는 일이다. 어린 고양이는 나와 아내 사이에 엎드려, 앞발사이에 코를 파묻는다.

지금은 아내와 나와 고양이의 새벽이다. 아무도 방해하지 못하는.


송화마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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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정해수님의 댓글

정해수

정말 매번 올려주시는 글이 너무 멋져서 리플을 안달 수 없게 하시는군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김명기님의 댓글

김명기

인용:
원 작성회원 : 정해수
정말 매번 올려주시는 글이 너무 멋져서 리플을 안달 수 없게 하시는군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글재주는 별로 입니다. 살아가는 순간이 그냥 흘려버리기 좀 아까워서 끄적이고 있습니다. 누구라도 다 소중한 자신의 삶이니까요. 정 선배님의 칭찬이 너무 고마워서 저도 감사의 말씀을 안드릴 수가 없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

정해수님의 댓글

정해수

아이쿠.. 선배님이라뇨. 제가 인생에 있어서나 뭘로 보나 한참 아래인 후배입니다.
김명기 선배님께서 올려주시는 글들을 가끔 읽어보면서 제 지난 하루하루를 곱씹어보는 게 정말 좋네요.
좋은 글 계속 올려주세요.

권용탁님의 댓글

권용탁

잘 보고 잘 읽고 갑니다..

이애리W님의 댓글

이애리W

아, 글이 너무 좋습니다.
그리고 얼마되지 않았지만 결혼했다는 사실이 참 다행이라고 느껴지는 시간입니다.

장충기님의 댓글

장충기

말사진을 보다가 갑자기 느낀건데,
안장을 얹지 않은 상태에, 재갈만 물려있는 모습이 더 없이 어색해 보입니다.

김명기님의 댓글

김명기

인용:
원 작성회원 : 장충기
말사진을 보다가 갑자기 느낀건데,
안장을 얹지 않은 상태에, 재갈만 물려있는 모습이 더 없이 어색해 보입니다.



재갈은 물지 않구요. 마방굴레라고 말을 씻거나 손질할 때 사용하는 장비입니다.
맨말을 잡으려면 다들 고생깨나 해야 하거든요. 재갈은 쇠로 된 일종의 고리로
말의 입에 물려 말을 조정하는 것이구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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