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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입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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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김명기
  • 작성일 : 09-06-16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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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입장에서.



요즘 제법 다툼이 많다. 돈이야 처음부터 없었으니까 별 다른 이슈가 되지 못한다. 2년전부터 시작한 사업에 아내의 업무가 점점 과중해지면서 아내는 새벽까지 잠들지 못하는 때가 많다. 게다가 조금씩 집안일이 쌓이면서 아마 신경이 날카로워진 모양이다.

아아, 이 쓰레기들.
냅둬. 나중에 치워줄게.
언제요?
천천히 하자니까.
이건 나중에 다 내 일이잖아요. 당신은 제왕처럼 살면서 집안일은 하나도 안하시고. 당신은 배려심이 없어요.

어? 이건 좀 억울하다. 나는 집안에서 꼭 걸레 대용 슬리퍼를 신고 발을 질질 끌고 다니고, 아침마다 커피 잔이나 밤참을 먹은 뒤 설거지도 자주 하는 쿨한 남편이다. 김 간지라고 불러주지는 못할 망정. 하여간 잘 해줘봐야 다 소용없대니깐!

나이든 사람의 싸움 끝은 그저 각방쓰기다. 치열하게 열올려봐야 서로 피곤하다. 차분하게 서로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오늘 정도 다툼이면 한 2~3일은 갈 것이다. 안방에는 침대가 있고, 건넌방에는 그저 이불 한 채가 깔려있을 뿐이다. 무척 딱딱하고 불편하다. 그래도 흥!



지난 번 다툼 때는 누가 건넌방을 썼지? 생각해보니 아내가 건넌방을 썼다. 나는 아무 말 없이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 4권을 들고 건넌방으로 간다. 그리고 암전(暗轉). 언제 잠들었는지는 모른다. 요즘은 늘 이렇다. 마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듯 잠들고 마는 것이다.

눈을 떴다. 아마 4시 59분쯤일 것이다. 내 안의 체내 시계는 나이가 들수록 정확해 진다. 아니나 다를까? 곧이어 손전화의 알람이 울린다. 나는 잠자리에서 나와 슬그머니 안방으로 가본다. 아내는 온몸을 새우처럼 잔뜩 웅크리고 잠이 들었다. 귀신 꿈이라도 꾸었나? 고것 쌤통이다.

커피포트 스위치를 누르자 자그르르 물 끓는 소리가 난다. 나는 커피 잔에 커피가루를 툭툭 털어 넣으며 생각한다. 만날 뭣 때문에 짜증이냐구? 내가 뭘 해주면 되지? 나는 찬찬히 집안을 돌며 생각한다. 집안은 대체로 깔끔하다. 이건 뭐 할 일도 없네. 아차. 아냐, 아냐. 아내의 입장. 내가 아닌 아내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야만 한다. 나는 아내처럼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종종걸음으로 슬리퍼를 질질 끌어 거실 바닥을 닦으며 돌아다닌다. 문득 주방 쪽을 보니 다용도실에 쌓인 쓰레기가 보인다.

차곡차곡 쌓인 종이조각들. 피자 껍데기. 산더미처럼 쌓인 맥주 깡통. 커다란 비닐봉지 안에서 쏟아져 나오기까지 한 페트병들. 다용도실은 발 디딜 틈도 없다. 세탁기 옆 벽에는 종량제 봉투에 담겨진 생활쓰레기와 음식물 쓰레기가 도열한 예비군들처럼 줄지어 있다. 흠, 이건 예상 밖인걸? 상당한 양이다.

이걸 모두 다 버리자면 아파트를 몇 번이고 오르내려야 할 것이다. 적당한 작업복이 없다. 나는 옷장을 뒤져 본다. 몇 해 전 8군의 친구에게 선물 받은 이라크 참전 위장복이 보인다. 좋다. 이걸 입지. 나는 군복을 척 차려 입고 쓰레기들 앞에 선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외친다.

좋다. 제군들! 오늘은 제군들이 마지막 격전지 쓰레기장으로 떠나는 날이다. 제군들은 모두 나를 따라. 쓰레기장으로 향한다. 이상!



하지만 쓰레기들은 만만치 않다. 먼저 종량제 봉투들을 들자, 오 이건 냄새가 장난 아니다. 집안에 이런 걸 쌓아 두다니! 나는 나도 모르게 다시 아내에게 투덜댄다. 종량제 봉투를 들자, 커다란 비닐봉지 안의 페트병이 우르르 쏟아진다. 페트병들을 간신히 집어넣자, 이번엔 캔 맥주 통들이 다시 우르르. 슬쩍 짜증이 돋아난다. 제대로 좀 하자구.

쓰레기들을 먼저 현관 앞으로 옮기고, 다시 엘리베이터 앞으로 옮긴다. 엘리베이터 문을 열고 쓰레기봉투들을 옮기는데, 어럽쇼? 엘리베이터 문이 닫힌다. 왼쪽 발을 길게 뻗어 문틈에 끼운 채, 간신히 엘리베이터 문을 버틴다. 나머지 봉투들을 옮기는데 엘리베이터 문은 몇 번이나 탁탁 닫히려고 한다. 이거 왜 이리 서둘러? 평소엔 그토록 늦게 닫히던 엘리베이터 문이 이렇게 빠른 줄은 짐작도 못했다.

다 싣고 나니 엘리베이터 안이 쓰레기로 가득하다. 새벽에 버리기로 한 것은 정말 잘한 일인 것 같다. 다시 엘리베이터문과 싸우며 아파트 현관으로 쓰레기를 나른다. 이걸 5~6번은 해야겠지?

어라? 이건 가볍네. 이리저리 모아 커다란 쓰레기봉투들을 더 거대한 두 덩어리로 만든다. 손을 최대한 벌려 손가락 사이마다 봉투 손잡이를 끼운다. 멀리서 누가 본다면 나 혼자가 아니라, 세 사람의 건장한 남자들이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겠지. 아니면 새벽부터 돌아다니는 술 취한 무리들로 볼 수도 있겠군. 나는 삭막한 도시에서 쓰레기 더미들과 상당히 정겨운 풍경을 만든다. 이렇게 나르면 1~2번이면 쓰레기 정리가 끝날 것도 같다. 이런, 별 것도 아닌 것 가지고...

문득 몇 해 전 이혼한 한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여자들은 순 사기꾼들이야. 이혼해서 직접 집안일을 해보니 이건 일도 아니더라고, 세탁은 세탁기 있지. 세탁소에서는 시간 딱딱 맞춰 오고. 마트에 가면 국이니 찌개니 다 만들어서 물만 붓고 끓이면 되게 만들어 팔고. 이딴 간단한 일을 하면서도 맨 날 죽는 소리에 바가지에 잔소리에. 돈은 또 좀 많이 쓰니? 난 이제 다시는 결혼 안한다.

하지만 다음 순간 이런 생각이 떠오른다.

아내는 여자다. 여리고 가는 손을 가진. 그녀에게 이 쓰레기봉투들이 나보다 4배는 무거웠을 것이다. 나는 8개를 2개로 나누었지만, 그녀는 간신히 2개씩을 나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파트를 10번은 오르내려야 하겠지. 이건 내겐 힘든 일이 아니다. 하지만 굉장히 귀찮은 일이다. 나는 다시 한 번 아내의 입장에서 생각한다. 아내에겐 힘들고도 귀찮은 일이 되겠군. 아내는 이번 두 주간이 아니라, 그간 몇 년을 오르내렸다.

어? 우리 아파트 쓰레기장은 어디지? 나는 잠시 당황한다. 언젠가 아내와 함께 온 적 있긴 하다. 아마 지난 간빙기(間氷期) 때 정도일 것이다. 멀리서 손에 쓰레기봉투를 든 아주머니가 다가온다. 옳지 저 아주머니를 따라가자. 아주머니를 계속 바라보자, 아주머니는 나를 지나치며 힐긋 돌아보고 빠른 걸음으로 멀어진다. 이런, 그런게 아니라구요.

쓰레기장은 복잡하다. 뭘 어디에 버려야 할지 모르겠다. 종량제 봉투는 어디다 버리지? 비닐 코팅이 된 종이는 비닐이야? 종이야? 피자 조각이 남은 피자 박스는 어디지? 스티로폼 박스는 비닐인가? 아닌가? 대 혼란 속에 대략 1차로 쓰레기를 버린다. 어찌어찌 된 것 같군.

2번째 쓰레기 나르기는 좀 더 수월하다. 엘리베이터 가득 쓰레기를 싣고 일층을 누른다. 땡! 엘리베이터는 10층에 멈추고 문이 열리자, 말쑥하게 차린 사내가 서있다.

미안합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사과를 한다. 하지만 이 싸가지는 대꾸도 않고 바지 주머니에 손을 놓은 채 엘리베이터 입구에 돌아선다. 아마 이 자도 나와 비슷한 남자일 것이다. 단 한 번도 아내를 위해 쓰레기를 버린 적이 없는 인간. 그래서 이 쓰레기 나르기가 얼마나 힘들고, 숭고한 작업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유아기적 인간. 이걸 한 번 걷어 차주고 개 값을 물어? 나는 솟아오르는 미움으로 그의 엉덩이에 발길질을 하고 싶은 욕망을 간신히 억눌러 참는다.

엘리베이터가 1층에 서고, 문이 열리자, 그자는 휑하니 멀어져 간다. 잠시 엘리베이터 문을 열어, 이 거룩한 성자의 지구 청결 프로젝트를 도울 생각이 전혀 없는 것이다. 나는 그자의 하루에 행운이 깃들길 바란다. 그의 싸가지에 걸 맞는. 예를 들어 가볍게 새똥에 맞는 정도?

이윽고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아파트 현관 앞 벤치에 앉아 담배를 한 대 빼어 문다. 청량한 아침공기에 푸르스름한 담배연기가 스며든다. 왠지 보람 있다. 그러다 바라본 현관 유리문엔, 이제 어디로든 떠나기엔 너무 늦어버린 중년남자가 쭈그리고 앉아있다.



어쨌든!

이제 이걸로 한 동안은 아내 앞에서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닐 수 있겠군. 그럼 그렇고말고! 나는 보통 싸가지들과는 종류가 다른 배려있는 남자인데. 그러면 이번에 아내 허락 없이 산 카메라 가방 건도 대략 넘어갈 수 있겠지?


Mars No.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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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홍민택님의 댓글

홍민택

재밌는 글 잘 읽었습니다.
분리수거 절대안하는데 쓰레기 치우면서 이런 많은 생각을 해볼수 있다니 좀 도와줘야겠군요.

이상제님의 댓글

이상제

마지막 문장에서 반전이 숨어있었군요. ^^
잔잔하면서도 입가에 미소를 짓게 하는 글 감사합니다.

이 기 성님의 댓글

이 기 성

공감이 가는군요..요즘 나이가 들면서 하나 하나 배우는것 같습니다..
글읽는 재미가 쏠쏠하군요..^^

최정옥님의 댓글

최정옥

공짜로 우리네 사는, 냄새나는 글들,,, 잘 읽고 있습니다^^

김_영_훈님의 댓글

김_영_훈

짧지만 재미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김 진광님의 댓글

김 진광

공감되는 부분이 있네요~^^
잘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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