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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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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김명기
  • 작성일 : 09-05-14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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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집



나의 일은 몸의 에너지를 소모해 꿈을 현실로 꺼내는 것이다. 나는 머릿속의 황금을 긁어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안다. 알퐁스 도데가 쓴 동화 '황금의 뇌를 가진 사나이'. 동화 속의 그 남자. 얼마나 지독한 사랑을 했기에, 피가 섞인 황금 찌꺼기를 구두장이에게 넘기는 짓을 한 것일까?

일을 마치면 에너지는 0. 배터리가 방전된 몸은 자꾸만 자동차 시트 밑으로 죽은 물고기처럼 가라앉는다. 나는 현실 감각을 잃고 어딘가 알 수 없는 곳을 떠다닌다. 이윽고 세상 밖에서 소리가 다가온다. 차창에 빗방울이 흩어지는 소리. 자동차 바퀴에 빗물 감기는 소리. 비 오는 밤. 젖은 고속도로엔 소리가 다가오고, 소리가 멀어지고, 흐리고 얼룩진 풍경이 스쳐지나간다. 나는 살아 있다. 전화가 울린다.

어디에요?
응 집에 가는 중.
난 지금 집 아닌데.
어딘가에 있겠지
그런데 어떻게 찾아요?
오늘 우리는 만날까 안 만날까?
물론 만나겠죠.
그러니까, 나는 지금 집에 가는 중이야.
뭐에요? 이상해
당신 알아요?
뭐요?
당신이 있는 곳이 내 집.
그건 무슨 소리에요?
당신이 없을 때, 나는 그저 어딘가에 서식하고 있었지. 마치 컴컴한 동굴 벽에 우울한 그림을 남기던 혈거(穴居)민처럼


그래요?
당신이 내게 왔을 때, 비로소 서식지는 집이 된 거야. 사람이 사는 어엿한 집.
에이 설마.
아니야 정말이야. 당신이 예전에 처음 산장에 왔을 때, 산장은 모처럼 사람 사는 집이 되었지. 그건 나만이 알지. 갑자기 여기저기서 향기가 나기 시작한 거야. 땅과 흙과 나무와 음식냄새와 꽃향기. 나 혼자 팔공산에 있을 때도, 그건 그저 서식지였어. 당신이 오자 곧장 집이 되었지. 당신이 어디에 있든 그곳이 바로 내 집이야. 그러니까 나는 당신에게 가고 있고, 그곳은 바로 내 집이야.
호호 아직 밖이에요. 곧 일이 끝나요.
알았어.
저녁은요?
아무거나
아무거나가 어딨어요?
당신과 먹으면 아무거나 괜찮아.
순 엉터리
정말이야.
30 분쯤 있다가 마방으로 갈게요.
응.
전화는 다가올 때와 같이 순식간에 멀어지고, 단조로운 소리들과 함께 검은 고속도로 뒤로 남았다. 전화는 끊어졌지만, 마음은 혼자 통화를 계속한다.



‘결국 오늘도 말하지 못했군. 당신의 음성에서는 나무 향기가 나. 당신의 손에서는 찻잔의 따스함이 전해지지. 당신의 눈을 보면 나는 장난감 망원경을 선물 받은 어린이처럼 흥미진진해져. 당신 향기는 나를 열흘 전에 태어난 강아지처럼 킁킁거리게 만들어. 웬일인지, 당신 목덜미를 보면 손가락을 갉작이는 까만 고양이가 떠오르지. 아니, 아니 이런 것 말고. 당신을 생각할 때마다 인간의 언어는 얼마나 불완전한 것인지 답답해.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는지, 단 한번 만이라도 내 마음 그대로 표현할 수 있으면 좋겠어.’

나는 엑셀을 조금 더 밟는다. 자동차는 채찍을 맞은 말처럼 잠시 움찔한 후, 신음을 내며 속도를 올린다. 나와 자동차는 밤과 삶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사랑. 사랑은 집에 있다.

한 여자는 언젠가 한 남자의 집이 된다. 그 집의 이름은 행복이다.
나는 지금 집으로 간다.


Mars No. 16

www.allbaro.com



PS : 아참, 한 가지 잊었군. 그런데 말이야. 정말 부탁인데. 당신 잔소리 좀 줄여줄 수 있을까? 아주 조금만 말이지.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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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홍경표님의 댓글

홍경표

몇년전 한 60대의 어르신께서 당신의 삶을 되돌아보니 40대때가 가장 좋았다라고 말씀하시며 이제 막 40대가 된 저에게 재미나게 살으라고 하신 말씀이 생각 납니다. '한 여자가 한 남자의 집이 된다고 생각할 수있는 나이가 40이 넘어야 가능하다' 라고 생각해 봅니다.

영화의 한장면 같은 글 감사히 감상합니다.

박연철님의 댓글

박연철

좋은 글과 사진입니다.
글을 참 잘 적으시는 분 같아요.
덕분에 아내의 존재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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