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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 이야기 - 4 ( 차나무를 찾아서) 5- (모험에 찬 첫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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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조성욱
  • 작성일 : 09-05-01 21:07

본문

4. 차나무를 찾아서
 
김복순 조태연 부부가 식당과 부두일을 걷어치우고 녹차를 만들기 위한 첫 모험은
차나무를 찾아나서는 일이었지요. 그들은 1950년대 중반 무렵 부산 동래의 우장춘 박사 농장에
차나무가 있다는 말을 듣고 그곳을 직접 찾아갔던 적이 있었지요. 온천장 뒤 차밭골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찻잎을 따와 19공탄을 피워 놓고 차를 덖어보았지요.
해방 전 일본 차공장에서 차를 만져본 뒤 십년만의 일이었지요.
김복순의 기억 속에 들어있던 제다 기술이 고스란히 되살아났습니다.
연탄불 위에 무쇠 솥을 얹어 놓고 차를 덖었지요.
그리곤 부산 중구 영주동 판잣집 다락방에다 덖은 차를 널어 말렸습니다.
이어 다 마른 차를 달여 보았지요. 김복순은 눈물을 글썽이며 만족했습니다.
조태연은 차 맛을 제대로 볼 줄 몰랐지만 아내의 행복해하는 표정에서 확신을 읽었지요.

그동안 모아두었던 약간의 돈을 가지고 차나무가 있다는 전남 해안지방을 여행해보기로 했습니다.
우선 김복순은 부산에 남아 식당을 꾸리면서 아이들을 키우고
조태연만 현지를 답사하면서 차와 관련된 정보를 수집해 오기로 한 것이지요.
전라도의 해남, 고흥, 보성, 승주, 구례, 경남의 하동, 사천 등지를 답사하기로 마음 먹고
길을 떠났지요.

해남지방에 맨 먼저 도착하여 차나무가 있다는 곳을 찾아간 조태연은 몹시 실망했습니다.
초의스님께서 차를 만들어 차살림을 꾸리셨다는 역사로 볼 때는 가장 큰 기대를 할 만한 곳이라
여겼던 때문이었지요. 대흥사 주위에 차나무가 자라고는 있었으나 경제성이 없어보였습니다.
보성에는 대규모의 차밭이 있기는 했으나 제대로 손질을 해주지 않아서
찻잎의 생산이 당분간은 어려울 듯 보였습니다.
승주 일대의 송광사, 선암사 주위에도 차나무가 있기는 했지만 기껏해야
그곳 스님 네들의 한철 양식으로도 부족할 듯싶었습니다.
구례 화엄사 주위도 엇비슷한 사정이었지요. 조태연은 잔뜩 기대했다가 차츰 실망이 커지고 있었지요.

마지막으로 하동 화개로 갔습니다.
화개에는 야생차나무가 다른 어느 곳보다 무성했습니다.
1961년 봄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찻잎을 따거나 차를 만드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조태연은 이틀을 머물면서 화개동을 샅샅이 돌아다녔지요.
찻잎을 누가 가꾸는지, 차를 만드는 사람이나 차를 아는 사람이 있는지를 물었지만
그때까지 화개동에서 녹차를 아는 이는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옛날부터 자생해온 차나무를 모조리 뿌리째 뽑아내고
곡식 심을 밭으로 개간하고 있는 모습이었지요.
또 하나 이채로운 것은 나이 든 노인들 사이에서 이른바 ‘잭살’이라 하여
찻잎으로 감기 몸살 약을 만들어 먹는 모습이었습니다.
늦봄 쯤 찻잎을 거칠게 훑어와서 그늘에다 말린 뒤 멍석 위에 놓고 비벼서
다시 말린 것을 잭살이라 불렀는데, 일년 사철 몸살감기가 들면 이 잭살을 푹 삶은 물에다
생강, 모과, 돌배, 댓잎이나 인동초를 썰어 넣고 푹 끓여서 마시는 모습이었습니다.
차의 근원이 약에 있음을 알게 해주는 대목입니다.
조태연은 차나무를 뽑아내고(添 : 화개면 정금리 도심촌에 있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1000년 된 차나무 있는 차밭)
밭으로 개간하는 이에게 흥정을 했습니다.
밭과 그 일대의 차나무를 15년 동안 이용하는데 10만원을 주고
임대계약을 하자는 제안을 한 것입니다.
 



5. 모험에 찬 첫시도
 
하동군 화개면 신촌의 산비탈에 자생해온 차나무를 15년 임대하기로 계약까지 해놓고 돌아온
조태연은 아내에게 이사를 가자고 했지요.
길섶에 있는 조그마한 초가 한 채도 이미 사두고서였습니다.
1962년 2월 부산에서 하동 화개로 이사를 했습니다. 지독한 산촌인데다 궁핍한 살림들이었지요.
어느 집에도 방바닥에 깔고 자는 이부자리가 없었고,
음식에는 양념기가 없었으며, 등잔불도 넉넉지는 못했지요.

이사온 그해 봄부터 찻잎을 따서 차를 만들기 시작했지요.
부산의 식당과 집까지 판돈으로 무려 50만원어치가 넘는 녹차를 만들었습니다.
차 덖는 일손은 마을 아낙들의 손길을 이용했지요.
찻잎 따는 일도 아낙들에게 현찰을 품삯으로 지불하면서 도움을 받았지요.
금방 부자가 될 것 같은 설렘으로 힘든 줄도 몰랐지요.
차를 다 만든 뒤에는 상품이 되도록 포장을 해야 했는데 적당한 방법이 없었습니다.

궁리하던 끝에 조태연은 부산 국제시장에 가서 커피 병을 사오기로 했습니다.
빈 커피 병을 가져와 끓는 물에다 삶아낸 뒤 커피 상표를 벗겨냈지요.
그때 조태연은 자신들이 만든 차에도 상표가 있어야겠다고 착안했습니다.
부산에 아는 사람을 통하여 상표도 만들었습니다.
상표를 만들기 위해서 지은 최초의 차 이름은 ‘선차(仙茶)’였는데,
우리나라 녹차 역사상 판매 목적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차 이름입니다.
공장 이름은 ‘고려제다본포(高麗製茶本鋪)’라 짓고, ‘고려명산차’란 선전 글귀도 넣었습니다.
또한 김복순이 일본에서 여러 해 동안 차만드는 기술을 익혔다는 점과
외국차를 능가하는 유명한 ‘발명차(發明茶)’라고 썼습니다.
비록 효험은 적었지만, 늙지 않고 오래 살 수 있는 신선이 마시는 차이며,
일상생활의 음료수이자 약으로도 사용할 수 있다는 글귀를 넣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차에 함유된 성분을 분석하여 기록해 놓고 있는 점입니다.
그러기 위해 조태연은 자신들이 만든 차를 ‘경상남도 위생시험소’에 의뢰하여
‘시험성적서’까지 받았지요. 이 시험성적서도 우리나라 녹차 판매를 위한 첫 성분 분석표였지요.
그토록 정성을 들여 차를 만들었지만 돈을 주고 사려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괴상한 잭살을 만드는 사람’으로 놀려대기까지 했지요.
차를 만들어 돈을 받고 팔겠다는 이들 부부를 바라보는 이웃의 눈빛은
조소와 우려가 뒤섞인 것이었습니다.

부산의 어느 일식집 하는 사람이 차를 사주겠다는 연락을 했지요.
조태연은 차를 싸들고 부산으로 갔더니 그 집에서는 너무 헐값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조태연은 몇 번 사정을 해봤지요. 이익은 버리더라도 생산 원가는 건져야 하지 않겠느냐고
매달려도 보았지요. 그럴수록 일식집 주인의 태도는 더욱 거만해져 갔습니다.
조태연은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만든 처음 ‘선차’는 대부분 팔지 못하고 말았지요.
김복순은 조태연의 꼬장꼬장하고 불같은 성미를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의 마음을 몰라주거나 욕되게 하는 사람에겐 차를 팔지 않겠다는 생각까지 했지요.
이사 온 첫 해의 참담한 실패가 낳은 후유증은 그들 부부를 오래도록 고난 속으로 몰아 넣었습니다.
 
박창희 기자 [2002-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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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박경복님의 댓글

박경복

정말 눈물겨운 사연입니다.
한국의 제다업종에 종사하시는 이들이, 이분들의 노고와 헌신을 알고 있을른지요.

한 알의 밀알처럼 선각적으로 희생하신 분들이 계시기에, 오늘의 녹차산업이 일구어진 것임을 알게 되면서... 뜻 있는 일을 하신 그분(선친)들께 존경과 감사를 드립니다.

강웅천님의 댓글

강웅천

읽다가 저도 모르게 눈가에 이슬이 맺힙니다.
드라마 토지의 장면 장면등이 떠오르면서 그시절의 궁핍함과 어려움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을텐데,
그 어려운 시기를 잘 이겨내셨기에 지금이 있으시겠지요.
다음편이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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