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이야기 - 3 (한국산 홍차와 녹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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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 조성욱
- 작성일 : 09-04-30 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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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한국산 홍차와 녹차
1960년초 정권의 비호를 받은 홍차에 맞서 최초로 녹차를 보급한 김복순 조태연씨 부부.
사진(사진 차후 첨부 예정)은 녹차 생산을 준비하던 1950년대말 경주에서 찍은 것이다.
한국에서 생산되는 찻잎으로 홍차(紅茶)를 생산하게된 것은
1961년 군사 쿠데타로 인한 군사정권의 정책에 따른 것이었지요.
군사정권은 외국에서 수입한 물품을 배격하고 국산품 장려 정책을 폈지요.
1960년대 초 시중에 유통된 차 제품은 커피와 홍차가 주류를 이루었지요.
이것들은 모두 수입품이었습니다. 군사정권은 외화절약과 국산품 애용 정책으로
홍차의 수입을 전면 금지 시키고 커피 수입량도 크게 줄였지요.
그러면서 농촌을 살리기 위한 특별 사업의 하나로
차밭을 만들어 찻잎을 생산하는 정책을 폈습니다.
차밭을 조성하는 사람에겐 보조금과 융자금을 지원하여 차밭을 장려했지요.
이와 같은 정책으로 가장 큰 이익을 보게 된 것은 전남 ‘보성다원(寶城茶園)’이었지요.
보성다원은 1941년 일본인 사업체인 ‘경성화학’이 만든 것이었는데,
해방 후 해군기술연구소가 관리하다가 사업가 장영섭(張榮燮)씨 소유가 되었습니다.
장씨는 찻잎을 이용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차밭에 포함된 임야를 가꾸기 위해 구입했다가
군사정권의 차밭 지원 정책으로 뜻밖의 사업을 하게 되었지요.
그렇게 해서 태어난 것이 ‘대한홍차’라는 한국의 첫 홍차 공장입니다.
대한홍차는 사업이 번창했습니다. 차밭을 계속 확장하면서 여러 곳의 야생 찻잎을 사들여
홍차를 만들었지만 폭증하는 국내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지요.
그러나 차의 수요 문제를 전혀 예상하지도 않은 채 외화절약과
국산품 애용이란 정책을 강행한 나머지 홍차 공급은 금방 벽에 부딪혔지요.
미리부터 차밭을 조성해 놓은 뒤에 홍차 수입을 금지시켜야만 옳았을 터이지만
아무런 준비없이 단행된 차 관련 정책은 오히려 혼돈만 부추겼을 뿐이었지요.
홍차 소비량을 감당할 수 없게되자 홍차 생산업자들은 고춧잎과 감잎을 염색하여
가짜 홍차를 유통시키다가 발각되어 마침내 소비자로부터 외면당하고 말았지요.
1974년 ‘대한다업(大韓茶業)’, ‘동양홍차(東洋紅茶)’, ‘한국제다(韓國製茶)’, ‘화개제다(花開製茶)’ 등이
홍차 생산에서 이른바 녹차(綠茶)를 생산하는 체제로 부랴부랴 변신을 서두르게 될 때까지,
녹차를 만들어 시중에다 판매한 사람은 김복순, 조태연 부부가 유일했습니다.
물론 해남 대흥사와 사천 다솔사에서 나름의 비법으로 녹차를 만들어
차살림을 꾸리고는 있었으나, 시중에 판매할 수 있을 만큼의 수량도 아니었거니와
일반인들에겐 잘 알려져 있지도 않았지요. 이처럼 녹차 만드는 기술을 대중화시키면서
국가의 비호를 받는 홍차에 맞서 녹차를 보급한 최초의 인물이 바로 김복순, 조태연 부부였지요.
이들이 녹차 만드는 일에 한 평생을 헌신하게 된 것은 개인사로서의
불행과 혹독한 시련 속에서 이룩된 것이어서 더욱 값진 문화유산이 되고 있습니다.
녹차 만드는 일을 꿈꾸던 이들 부부에게 기회를 가져다 준 것은 군사 쿠데타였지요.
군사정권의 명령으로 부산역 광장에다 수입물품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불태울 때
이들 부부 눈에는 불타는 커피와 홍차가 보였지요.
그들은 한국인이 음료로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음을 깨닫고
녹차를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지요. 그날부터 차나무가 있는 곳을 수소문하기 시작했습니다.
박창희 기자 (2002-11-17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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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초 정권의 비호를 받은 홍차에 맞서 최초로 녹차를 보급한 김복순 조태연씨 부부.
사진(사진 차후 첨부 예정)은 녹차 생산을 준비하던 1950년대말 경주에서 찍은 것이다.
한국에서 생산되는 찻잎으로 홍차(紅茶)를 생산하게된 것은
1961년 군사 쿠데타로 인한 군사정권의 정책에 따른 것이었지요.
군사정권은 외국에서 수입한 물품을 배격하고 국산품 장려 정책을 폈지요.
1960년대 초 시중에 유통된 차 제품은 커피와 홍차가 주류를 이루었지요.
이것들은 모두 수입품이었습니다. 군사정권은 외화절약과 국산품 애용 정책으로
홍차의 수입을 전면 금지 시키고 커피 수입량도 크게 줄였지요.
그러면서 농촌을 살리기 위한 특별 사업의 하나로
차밭을 만들어 찻잎을 생산하는 정책을 폈습니다.
차밭을 조성하는 사람에겐 보조금과 융자금을 지원하여 차밭을 장려했지요.
이와 같은 정책으로 가장 큰 이익을 보게 된 것은 전남 ‘보성다원(寶城茶園)’이었지요.
보성다원은 1941년 일본인 사업체인 ‘경성화학’이 만든 것이었는데,
해방 후 해군기술연구소가 관리하다가 사업가 장영섭(張榮燮)씨 소유가 되었습니다.
장씨는 찻잎을 이용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차밭에 포함된 임야를 가꾸기 위해 구입했다가
군사정권의 차밭 지원 정책으로 뜻밖의 사업을 하게 되었지요.
그렇게 해서 태어난 것이 ‘대한홍차’라는 한국의 첫 홍차 공장입니다.
대한홍차는 사업이 번창했습니다. 차밭을 계속 확장하면서 여러 곳의 야생 찻잎을 사들여
홍차를 만들었지만 폭증하는 국내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지요.
그러나 차의 수요 문제를 전혀 예상하지도 않은 채 외화절약과
국산품 애용이란 정책을 강행한 나머지 홍차 공급은 금방 벽에 부딪혔지요.
미리부터 차밭을 조성해 놓은 뒤에 홍차 수입을 금지시켜야만 옳았을 터이지만
아무런 준비없이 단행된 차 관련 정책은 오히려 혼돈만 부추겼을 뿐이었지요.
홍차 소비량을 감당할 수 없게되자 홍차 생산업자들은 고춧잎과 감잎을 염색하여
가짜 홍차를 유통시키다가 발각되어 마침내 소비자로부터 외면당하고 말았지요.
1974년 ‘대한다업(大韓茶業)’, ‘동양홍차(東洋紅茶)’, ‘한국제다(韓國製茶)’, ‘화개제다(花開製茶)’ 등이
홍차 생산에서 이른바 녹차(綠茶)를 생산하는 체제로 부랴부랴 변신을 서두르게 될 때까지,
녹차를 만들어 시중에다 판매한 사람은 김복순, 조태연 부부가 유일했습니다.
물론 해남 대흥사와 사천 다솔사에서 나름의 비법으로 녹차를 만들어
차살림을 꾸리고는 있었으나, 시중에 판매할 수 있을 만큼의 수량도 아니었거니와
일반인들에겐 잘 알려져 있지도 않았지요. 이처럼 녹차 만드는 기술을 대중화시키면서
국가의 비호를 받는 홍차에 맞서 녹차를 보급한 최초의 인물이 바로 김복순, 조태연 부부였지요.
이들이 녹차 만드는 일에 한 평생을 헌신하게 된 것은 개인사로서의
불행과 혹독한 시련 속에서 이룩된 것이어서 더욱 값진 문화유산이 되고 있습니다.
녹차 만드는 일을 꿈꾸던 이들 부부에게 기회를 가져다 준 것은 군사 쿠데타였지요.
군사정권의 명령으로 부산역 광장에다 수입물품을 산더미처럼 쌓아 놓고 불태울 때
이들 부부 눈에는 불타는 커피와 홍차가 보였지요.
그들은 한국인이 음료로 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음을 깨닫고
녹차를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지요. 그날부터 차나무가 있는 곳을 수소문하기 시작했습니다.
박창희 기자 (2002-11-17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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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이효성님의 댓글

좋은 일에는 언제나 정직하고 성실하게 묵묵히 수고하시는 분들이 있다는 사실에 다시금 귀한 교훈을
깨닫습니다. 경륜이 부족한 국가 정책 입안자들의 시행착오 또한 그 시대를 가늠하는 잣대가 되는 듯
합니다. 좋은 글 계속 기대됩니다. 그리고 감사드립니다.
강웅천님의 댓글

어려운 여건에서 큰 일을 이루어내신 두분의 노고에 감사드리고,
전통을 이어 한국차를 어어가시는 조선생님께 격려를 보냅니다.
글 잘읽었습니다.
박경복님의 댓글

꿈, 인내, 헌신, 열정이야먈로... 얼마나 값진 것인가를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
강인상님의 댓글

조성욱 님 부모님께서 우리나라 녹차의 주인공이셨군요.
소중하고 값진 이야기 잘 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신 정식님의 댓글

좋은 이야기 좋은 소식으로 전해 듣고 있습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의신에 있는 지인으로부터 우전을 구했는데
요즈음은 그 이의 업이 바뀌어 그때 그때 필요한대로 조달하고 있습니다.
이 글을 보니 더욱 차 맛이 달리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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