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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고는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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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김명기
  • 작성일 : 09-03-23 23:34

본문

코고는 아내



한 밤, 인기척을 느끼고 잠이 깨었다. 침대위에 앉은 채, 잠깐 잠과 현실의 경계에서 혼미한 정신을 가다듬을 때, 거실 쪽에서 웅얼거리는 TV소리와 불빛이 새어 나온다. 뭐지? 침실 문을 열고 나가보니 아내가 부엌에 서 있다. 냄비와 밥솥, 커피 잔, 커피포트, 그리고 서류더미. 아내는 부엌 정물의 일부처럼 서서 총기 없는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아니, 지금까지 일하고 있었어?"
"네"
"지금 새벽 3시야. 좀 자야지 내일 또 나가지."
"네"

아내의 답변은 짧다. 그 답변엔, ‘나도 졸려요. 일이 끝나지 않아서 못 잤지요. 이거 깔끔하게 다 하지 않으면 잠이 올 것 같지 않아요. 이 일 너무 힘들어요.’ 등등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는 "네" 다. 나는 잠시 아내가 일하는 모습을 본다. 태엽이 다 풀린 인형처럼 느린 동작이다. 그녀의 피곤이 한밤 침묵의 공간을 넘어 내게 전해진다.

나는 다시 침대로 간다. 우리는 서로 알고 있다. 나는 두 시간 후 새벽 5시면 일어나야 한다. 6시부터는 사무를 보아야 하고, 8시에는 집에서 나가야 9시에 출근할 수 있다. 펄펄 뛰는 11마리의 말과 힘겨운 오전을 보낸 후, 정오부터는 말차에 말을 싣고 승마교실이 개강 된 학교로 가야한다. 거기서 6시까지 아이들과 행복한 오후를 보낸다. 귀엽고 착한 아이들이 건강한 말들과 즐거운 미소를 짓는 바라보는 일은 정말로 멋진 일이다. 그게 아니라면 이건 못할 짓이다.

나는 침대 속에서 잠시 바스락 거린다. 잠이 오지 않는 탓이다. 일을 돕지 못하는 미안함과 내일 치 걱정이 가슴 속으로 조금씩 고여 든다. 아내가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한 밤의 TV에서는 형체가 부서진,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와 발음의 덩어리들이 생쥐처럼 거실을 파고든다. 아내가 빨리 잠들 수 있어야 할 텐데, 아침엔 도둑고양이처럼 발을 들고 살금살금 출근해야겠다. 아내는 늦잠을 잘 수 있을까? 내일 아침엔 어느 학교로 가야 하는 것일까? 혼자 새우처럼 등을 굽힌 채 꼬리를 무는 생각에 빠져들고 있을 때, 탁! 거실 쪽의 불빛이 사라진다.

문이 열리고 아내가 들어온다. 침대의 왼쪽이 잠시 출렁이고 아내가 자리를 잡는 것이 느껴진다. 다행이다. 아내는 곧 일을 마칠 수 있었다. 나는 신기하게도 곧장 잠 속으로 굴러 떨어졌다.

잠깐 눈을 감았을 뿐이라는 느낌이 들었을 때, 나는 다시 잠이 깼다. 나는 알고 있다. 지금은 오전 4시 58분일 것이다. 꽤 오래전부터 알람을 맞춰 놓은 시간 바로 직전에 잠이 깨고 있다. 습관이란 놀랍다. 나는 눈을 뜨고 알람이 울리기를 기다린다. 잠시 눈을 감은 그 순간, 2시간이 흘러간 것이다. 나는 늪처럼 깊고 끈끈한 잠에 빠져들었던 모양이다. 이것도 다행이다.

누운 나의 왼편에서 작게 코고는 소리가 들린다. 아내가 코를 골고 있다. 많이 피곤했겠지. 지금 보상처럼 깊고 달콤한 꿈에서, 쌓인 피로를 초콜릿 조각처럼 조금씩 녹여가고 있다. 나는 아내가 코고는 소리를 듣는다. 어쩌면 이렇게 작고 조용하게 코를 골 수 있을까?

"당신 같이 똑똑하고 괜찮은 여자가 왜 나를 만났지?"
"그러게요."
"이건 실수야."
"맞아요. 하지만 나도 어쩔 수는 없어요."

나는 당신의 눈웃음을 떠올린다. 당신은 미소를 짓고 부엌으로 가서 커피 물을 끓였었다. 그리곤 늘 흥얼거리는 그 콧노래. 당신 스스로도 제목이 뭔지, 무슨 노래인지, 곡조와 가사 조차도 일정하지 않은 콧노래를 부른다. 종잡을 수 없는 당신의 콧노래. 요즘은 그 콧노래를 듣기 어렵다. 당신의 일이 당신의 한계를 벗어나고 있는 탓이다. 마음속의 기한은 4월 15일. 시간이 빨리가기를 기다리는 일은 중년의 내게는 드문 일이다. 아마 그쯤이면 우리 일은 고비는 넘길 것이다.

그 때쯤, 일과 마음의 갈등이 어느 정도 풀리면 한번 사랑한다고 쑥스럽게 말해볼까? 아저씨가 주책이라고 하지는 않을까? 나는 몸을 돌리고 슬그머니 한 손을 당신의 허리에 얹는다. 당신은 쌀쌀하게 엉덩이를 털며 돌아눕는다. 여자들의 본능은 무섭다. 깊이 잠들어 있으면서도 확실하게 반응한다. 아내는 아마 내게 화가 나 있을 것이다. 나는 어제 아내에게 몰아 친 일을 돌이킨다. 나는 평생 엔지니어다. 나는 엔지니어로 태어나서 엔지니어로 죽을 것이다. 정확한 시간에 정확하게 일이 이루어 지지 않으면 스스로 참아내지 못한다.

미리 예상하고 대비한 일이 제때에 이루어지지 않으면 더욱 그렇다. 나는 그 일이 제대로 마무리 될 때까지 백번이고 이백 번이고 확인한다. 그냥 수사적인 표현이 아니고, 진짜로 백번, 이백 번 확인한다. 그러니 아직 일에 서툰 아내는 얼마나 당황하고 놀랬을까? 아내는 내가 몹시 낯설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남편이 굳은 표정의 클라이언트라니, 아마 섭섭하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삶과 일은 생방송이다. 절대로 안 되는 것은 안 된다. 아내는 이미 사회인이고, 이 일에 중심에 서있다. 나는 마음 속의 또 다른 내가 혼잣말을 하는 것을 듣는다.

'언젠가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 웃으며 이 시간을 이야기 할 날이 있겠지. 여보, 미안하오.'



다행이 잠이 깬 것은 아닌 모양이다. 아내는 다시 조그맣게 코를 곤다. 나도 다시 검은 천장을 바라본다. 마치 색종이 같은 빛 무리가 회유하는 연어 떼처럼 몰려다닌다. 5, 4, 3, 2, 1. 손 전화의 알람이 울린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손 전화를 끈다. 아내는 잠에서 깨지 않았다. 나는 살그머니 침실 문을 닫고 나온다.

두터운 극장 커튼처럼 깊이 드리운 어둠 속에 손을 넣고, 거실 벽을 더듬어 전등을 켠다. 커피포트의 스위치를 올리자, 곧장 물이 끓는 소리가 들린다. 베란다로 부터 16층 아래의 대지엔 검은 어둠과 나른한 가로등. 창밖의 세계는 막 잠에서 깨어나려 하고 있다. 나는 낡은 군용 컵에 가루 커피를 붓는다. 커피향이 순결한 새벽 공기 속에 번진다. 오늘의 첫 번째 행복. 커피 잔을 들고 창가에 선다. 아직도 옅은 미명만 산 너머에 머물고 아침은 멀다. 나는 당신의 미소를 떠올린다. 그리고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을 애써 보지 않으려 한다.


Mars No.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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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박성원/인피니티님의 댓글

박성원/인피니티

저는 아직 미혼입니다만, 행복한 가정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훈훈합니다.

김병준mukino님의 댓글

김병준mukino

글이 참 좋습니다..... 천천히 한번 더 읽어봅니다....^^

정철원님의 댓글

정철원

무슨 작은 일이 계셨던가 봅니다.

저의 살아가는 모습을 들킨 듯한 묘사에

내심 놀랐습니다

강인상님의 댓글

강인상

김명기 선배님 글에는

늘 묻어나는 따뜻한 냄새가 있습니다.


촉촉하면서도 진득한...

마음에 다가오는 글 감사합니다.

임재식님의 댓글

임재식

참 맛나게 읽었습니다.
미안하기도 하고 때론 지겨운듯 하기도하지만
삶은 참 아름다운것 같아요.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서
그냥 누군가에게 미안하고 안스러운 마음이 듭니다.

권재환님의 댓글

권재환

평생 엔지니어라고 하시지만... 글솜씨나 글속에 묻어나는 감정들이 절대 엔지니어같지 않아 보이세요...
이렇게 사람에게서 이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을 때... 그 사람을 매력적이라고 표현하는 것 같습니다. ^^

김대용ak님의 댓글

김대용ak

주신글들 잘보고 있습니다.
부러움와 사는일에 대한 온기를 느낍니다.
고맙습니다^^

한수길님의 댓글

한수길

오랜만에 김명기님의 글을 대하는군요 자신에게 일어난 일들을 소설처럼 리얼하게 써내려가는 글에 빠져 보았습니다 ^^

유성수님의 댓글

유성수

삭막하다고 생각하던 라클 사이트에 담백하고 아주 정갈한 수필이 한편 올라왔네요.
제가 읽으면서 느낀 소감은
짧은 글 속에 아주 많은 이미지와 많은 영상이 함축된 글
이라고 생각 되어
위 글을 쓰신 분이 혹시 작가(글쓰는 일을 전문으로 하는 분) 아닌가 생각 했는데 엔지니어 시라구요?
(나도 사실 공대를 졸업한 엔지니어 출신인데 -)
위 글 내용에 무슨 의미를 함축하고 쓴 글인지 알 수는 없지만
(글 내용 받아 들이는 방법은 읽는 사람 마음 대로 이니까)읽는 사람 나름대로 내 마음 속에 받은
느낌을 말씀 드리자면 --- 글 내용이 정말 신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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