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의 무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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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 김명기
- 작성일 : 09-01-22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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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무인도

프로젝터와 레이저포인터, 통계자료와 연구과제. 고심과 조심스러운 의견. 그리고 반론과 보충설명. 회의는 3시간여나 계속되었다. 새로운 세계의 개척. 즐거운 아이디어로 시작되었지만 생각들이 현실로 뛰쳐나오는 것은, 신생아의 탄생처럼 산고를 거쳐야만 한다. 회의실 204호. 느리고 무거운 시간은 이제 막 백악기를 지나고 있을 뿐.
어디에요?
응, 아직 회의 중
내일 대구 가지 않아도 된대요.
그래?
마지막 소식을 전하고 손 전화는 배터리가 소멸되었다. 물에 던진 돌멩이처럼 갑자기 죽었다. 수요일 오후 4시 이후의 시간들은, 착한 일을 한 기억이 없는데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어리둥절하게 주어졌다. 텅 빈 진공의 시간. 어쩌면 고민이 되었을 수도 있다. 잔뜩 당긴 활의 시위가 끊어진 것처럼, 일상과 긴장이 허무하게 풀어져버린 순간. 무엇을 할까? 어딜 갈까? 그러나 나는 1초도 망설이지 않았다. 나는 목표가 설정된 만화영화속의 로켓처럼 단호하게 발사되었다. 나는 친구에게 갈 것이다.
30년 지기 오래된 친구, 그와의 마지막 시간은 이미 일 년을 넘어간다. 미세조정이 잘못된 캡슐과 우주 모선처럼 우리는 몇 번이고 스치고 말았고, 약속은 좀처럼 실현되지 못했다. 그러니 오늘 가자. 가서 지난 시간들이 어떻게 꼬이고 풀렸는지, 함께 하지 못한 시간은 얼마나 멀었고 얼마나 아득했는지 가서 확인하자. 가서 그리움을 풀어내자.
차에 키를 넣고 시동을 건다. 손 전화 배터리가 없으므로 친구에게 미리 기별은 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는 사무실에 있을 것이다. 그는 나를 기다려 줄 것이다. 내 친구니까. 차는 천천히 후진을 한다. 대학 캠퍼스의 좁은 주차장을 빠져나오기 위해서다. 친구에게 가는 길은 먼저 후진을 해야 했다. 회색 콘크리트의 도시, 회색 하늘, 한겨울 오후의 잿빛 침묵. 그러나 친구에게 가는 나는, 흑백 사진 속의 핑크 빛 풍선처럼 명랑하다.

도로는 극심한 정체. 차창 밖으로는 1월의 한강이 천천히 뒤로 흘러간다. 강물은 단단하게 얼어있다. 강변도로의 자동차들도 얼어붙었다. 길은 느리고 아득하다. 나는 라디오를 켠다. 93.1MHz. 드뷔시가 흘러나온다.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한 손으로 더듬더듬 가방을 뒤져 책을 꺼낸다. 김훈의 신작, '바다의 기별'이다. 나는 그의 글자들을 아끼고 아껴, 야금야금 파먹고 있다. 슬그머니 차들이 움직인다.
정류장에서 담배를 피워 물면, 도무지 오지 않던 버스가 달려온다. 책장을 열면 코스 마지막 언덕을 오르는 마라톤 선수의 정맥을 도는 적혈구처럼, 자동차들이 갑자기 빠르게 움직인다. 느린 길을 가장 빠르게 만드는 법은, 손에 책을 들고 운전하는 것이다. 물론 다른 모든 빠른 것처럼 이것도 역시 위험하다. 권하지는 못한다. 나는 드뷔시를 들으며 운전을 하고, 거북이처럼 움직이는 자동차의 가다서다에 맞추어 책을 읽는다. 한강은 잠깐씩 뒤로 흘러간다.
나는 멈칫멈칫 나아가는 자동차 때문에 책에 집중하지 못한다.
'아들이 아버지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아버지의 나이가 되어야 하는 모양이다. 아버지의 육신도 이제는 풍화가 끝나서 편안할 것이다. 아버지의 죄업과 아버지의 방황과 아버지의 울분도 이제는 다 풍화되었을 터이다. 지난 한식 때 새로 심은 잔디가 잘 퍼져있다. -30쪽 '
물을 머금는 병아리처럼, 차가 움직일 때마다 길을 보고 다시 책을 보고. 나는 몇 번이고 30쪽에서 책 속의 길을 잃었다. 덕분에 30쪽의 구절은 몇 번이고 눈동자를 파고들어 가슴에 박혔다.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짐과 나이든 자들끼리의 공감에 속이 상했다. 이 구절은 곧 나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나는 어른이고, 어른은 하나도 빠짐없이 고독하다. 어른이 어른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에서는, 이른 봄 텅 빈 들녘을 맴돌던 차가운 바람이 떠오른다. 한마디 한마디가 얼마나 깊이깊이 아린 것인지를 절감한다. 그래서 나는 친구에게 간다. 새파랗게 젊던 미소년에서 중년의 어른이 된 지금까지, 늘 친구였던 친구에게 간다. 내 마음의 조그만 무인도. 변하지 않는 나의 낙원. 가서 나는 천둥벌거숭이가 될 수 있다.
이제 어른인 나는 어른이 된 친구에게 간다. 어린애처럼 들뜬 채 친구에게 간다. 사이드 미러 속의 한강은 한걸음씩 뒤로 흘러간다. 얼어붙은 한강을 오른쪽 뒤로 밀어내고, 운전대에 책을 올려놓고, 드뷔시를 들으며 천천히 친구에게 간다. 가서 우리 둘은 어린애처럼 시시덕거릴 것이다.
Mars No. 16
www.allbaro.com

프로젝터와 레이저포인터, 통계자료와 연구과제. 고심과 조심스러운 의견. 그리고 반론과 보충설명. 회의는 3시간여나 계속되었다. 새로운 세계의 개척. 즐거운 아이디어로 시작되었지만 생각들이 현실로 뛰쳐나오는 것은, 신생아의 탄생처럼 산고를 거쳐야만 한다. 회의실 204호. 느리고 무거운 시간은 이제 막 백악기를 지나고 있을 뿐.
어디에요?
응, 아직 회의 중
내일 대구 가지 않아도 된대요.
그래?
마지막 소식을 전하고 손 전화는 배터리가 소멸되었다. 물에 던진 돌멩이처럼 갑자기 죽었다. 수요일 오후 4시 이후의 시간들은, 착한 일을 한 기억이 없는데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어리둥절하게 주어졌다. 텅 빈 진공의 시간. 어쩌면 고민이 되었을 수도 있다. 잔뜩 당긴 활의 시위가 끊어진 것처럼, 일상과 긴장이 허무하게 풀어져버린 순간. 무엇을 할까? 어딜 갈까? 그러나 나는 1초도 망설이지 않았다. 나는 목표가 설정된 만화영화속의 로켓처럼 단호하게 발사되었다. 나는 친구에게 갈 것이다.
30년 지기 오래된 친구, 그와의 마지막 시간은 이미 일 년을 넘어간다. 미세조정이 잘못된 캡슐과 우주 모선처럼 우리는 몇 번이고 스치고 말았고, 약속은 좀처럼 실현되지 못했다. 그러니 오늘 가자. 가서 지난 시간들이 어떻게 꼬이고 풀렸는지, 함께 하지 못한 시간은 얼마나 멀었고 얼마나 아득했는지 가서 확인하자. 가서 그리움을 풀어내자.
차에 키를 넣고 시동을 건다. 손 전화 배터리가 없으므로 친구에게 미리 기별은 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는 사무실에 있을 것이다. 그는 나를 기다려 줄 것이다. 내 친구니까. 차는 천천히 후진을 한다. 대학 캠퍼스의 좁은 주차장을 빠져나오기 위해서다. 친구에게 가는 길은 먼저 후진을 해야 했다. 회색 콘크리트의 도시, 회색 하늘, 한겨울 오후의 잿빛 침묵. 그러나 친구에게 가는 나는, 흑백 사진 속의 핑크 빛 풍선처럼 명랑하다.

도로는 극심한 정체. 차창 밖으로는 1월의 한강이 천천히 뒤로 흘러간다. 강물은 단단하게 얼어있다. 강변도로의 자동차들도 얼어붙었다. 길은 느리고 아득하다. 나는 라디오를 켠다. 93.1MHz. 드뷔시가 흘러나온다. 한 손으로 핸들을 잡고 한 손으로 더듬더듬 가방을 뒤져 책을 꺼낸다. 김훈의 신작, '바다의 기별'이다. 나는 그의 글자들을 아끼고 아껴, 야금야금 파먹고 있다. 슬그머니 차들이 움직인다.
정류장에서 담배를 피워 물면, 도무지 오지 않던 버스가 달려온다. 책장을 열면 코스 마지막 언덕을 오르는 마라톤 선수의 정맥을 도는 적혈구처럼, 자동차들이 갑자기 빠르게 움직인다. 느린 길을 가장 빠르게 만드는 법은, 손에 책을 들고 운전하는 것이다. 물론 다른 모든 빠른 것처럼 이것도 역시 위험하다. 권하지는 못한다. 나는 드뷔시를 들으며 운전을 하고, 거북이처럼 움직이는 자동차의 가다서다에 맞추어 책을 읽는다. 한강은 잠깐씩 뒤로 흘러간다.
나는 멈칫멈칫 나아가는 자동차 때문에 책에 집중하지 못한다.
'아들이 아버지를 온전히 이해하려면 아버지의 나이가 되어야 하는 모양이다. 아버지의 육신도 이제는 풍화가 끝나서 편안할 것이다. 아버지의 죄업과 아버지의 방황과 아버지의 울분도 이제는 다 풍화되었을 터이다. 지난 한식 때 새로 심은 잔디가 잘 퍼져있다. -30쪽 '
물을 머금는 병아리처럼, 차가 움직일 때마다 길을 보고 다시 책을 보고. 나는 몇 번이고 30쪽에서 책 속의 길을 잃었다. 덕분에 30쪽의 구절은 몇 번이고 눈동자를 파고들어 가슴에 박혔다. 나는 눈시울이 뜨거워짐과 나이든 자들끼리의 공감에 속이 상했다. 이 구절은 곧 나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나는 어른이고, 어른은 하나도 빠짐없이 고독하다. 어른이 어른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에서는, 이른 봄 텅 빈 들녘을 맴돌던 차가운 바람이 떠오른다. 한마디 한마디가 얼마나 깊이깊이 아린 것인지를 절감한다. 그래서 나는 친구에게 간다. 새파랗게 젊던 미소년에서 중년의 어른이 된 지금까지, 늘 친구였던 친구에게 간다. 내 마음의 조그만 무인도. 변하지 않는 나의 낙원. 가서 나는 천둥벌거숭이가 될 수 있다.
이제 어른인 나는 어른이 된 친구에게 간다. 어린애처럼 들뜬 채 친구에게 간다. 사이드 미러 속의 한강은 한걸음씩 뒤로 흘러간다. 얼어붙은 한강을 오른쪽 뒤로 밀어내고, 운전대에 책을 올려놓고, 드뷔시를 들으며 천천히 친구에게 간다. 가서 우리 둘은 어린애처럼 시시덕거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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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김기현님의 댓글

읽고나니 왠지 오늘 날씨처럼 마음에 묵직한 구름이 덮이는 기분이네요.
나이먹는다는 것은
외로움, 그리고 그리움이 세월에 체질된 고운 먼지처럼 가슴에 쌓여가는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아버지가 많이 생각나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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