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 묻은 구두는 안 닦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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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 김명기
- 작성일 : 09-01-07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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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흙 묻은 구두는 안 닦습니다. 가서 흙을 닦고 오세요.”
오늘 구두미화원에게 들은 이야기다. 나는 구두를 잘 안 닦는다. 새 구두를 사도 집에서 일 년에 한 두어 번 약칠을 하고는 그만이다. 화이트칼라의 삶을 포기한 뒤로, 신발을 미적인 표시를 내기 위해 신어야 할 일이 그만큼 없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마방에서 마분을 치우기 위해서는 신발 코에 쇠가 들어가 있는 안전화를 신고, 승마를 지도할 때 운동장에서 신는 말 부츠는 하루만 신어도 모래에 진흙투성이가 된다. 나는 진정한 rural life를 살고 있다.
실은 겨울 승마부츠를 아우에게 선물 받았다. 안에 털이 들어있는 따스한 부츠다. 게다가 아우의 마음이 들어있는 부츠라서 나름 신경을 써 주고 싶었다. 집에서 대강 구두약을 칠하는 것 보다는, 구둣방에서 한번쯤 제대로 약을 입히고 광을 내서 오래도록 신을 요량으로 구둣방에 들른 것이다.
나 역시 사회생활의 균형 감각을 완전히 잃은 것은 아니다. 예전에, 그러니까 상당히 형편이 괜찮을 때에도 이런 흙 묻은 구두를 닦곤 했다. 공장자동화 업무로 전국의 공사 현장을 다니다 보니 신사 구두에 흙 묻는 일은 예사였다. 공사장의 흙은 찰지고도 야물다. 그래도 나는 한 번도 이의를 듣지 못했다.

실은 지금이 그 당시보다는 좀 더 양호한 상태의 부츠를 신고 들어가 닦아 달라고 했다가, 이런 면박을 받은 것이다. 이해는 한다. 구두 닦는 이들도 흙먼지를 맡기는 싫을 것이다. 게다가 구두 미화원은 상당히 고소득의 직업이라는 소문도 들었다. 그러나 깨끗한 구두만 골라 닦는 구두 미화원이라니.
먼저 묵묵히 구두를 깨끗하게 닦아준 다음에,
“하지만 손님 이건 좀 지나치게 흙이 많이 묻었군요.”
라고 했다면 나는 오히려 그에게 미안했을 것이다.
내가 숲에서, 산에서 사는 동안 세상의 기준이 바뀐 것인지도 모르겠다. 10년 전에는 내게 상식이던 일들이, 이젠 몰상식이나 비상식으로 변해 버린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직업으로 구두를 닦는 사람은, 이 세상 누구보다도 구두 닦는 일에 충실해야만 할 것이다. 우아한 부자인 구두닦이에게 깨끗한 구두만을 맡겨야 하는 소시민도 마음 편하지는 않겠지.
앞으로는 그 구두미화원에게 구두를 맡길 일은 없을 것 같다. 깨끗한 구두를 뭣 때문에 돈 주고 닦는단 말인가? 어쩐지 본말이 뒤집힌 것 같다. 나는 오늘도 또 하나를 배운다. 언젠가 내가 제법 돈이 많은 승마선생이 되었을 때, 내가 하지 말아야 할 행동과 태도 하나를 미리 배운 것이다. 그건 고마운 일이다.
Mars No. 16
www.allbaro.com
PS: 오늘 강남지역에서 교육을 하다가, 한 미화원에게 물었다.
“이런 구두도 되나요?”
“당연하지요. 하지만 지금은 바쁘니까, 1시간 후에 오실래요? 잘 닦아드릴게요.”
이 구두미화원이 바쁜 것은 당연하다. 일은 마음이 먼저다. 무슨 일이든 초심을 잃는다면 만사휴의(萬事休矣)다.
댓글목록
김기현님의 댓글

우리 사는 요즘 세상이 그렇게 변한게 사실인것 같습니다.
가끔씩 당혹스러운 현상들을 보면서 속이 상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긴 호흡으로 숨을 몰아쉬고 찬찬히 돌아보면,
결국 정도를 걷는 사람이 잘되기는 하는것 같습니다.
사는데 있어서 더 많은 인내와 또는 더 많은 외면이 필요한 시대가 아닐까 싶군요.
김명기님의 댓글
세상이 점점 빨라지면서 제가 배운 것들을 틀렸다고 인정해야만 하는 현실이 가끔 숨막히게 합니다.
그냥, 처음에 옳다고 배운 것들이 죽을 때까지 옳은 것이 되면 안되는 것인지...
고서에서 배운 온고지신의 지식들이 다시 돌아보아지는 요즘입니다.
강인상님의 댓글

참 많은 생각을 던져주는 글입니다.
가슴 뭉클해지는 이유...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왠지 이 구두 이야기를 읽으면서,
마음 한켠이 불안하다...마지막에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 듭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후에 물어본 구두 미화원이 바쁜이유는 당연합니다.
마땅히 해야할 일을 하면서
누구에게나 그 본연의 기회가 닿았으면 좋겠습니다.
김명기 선생님 좋은 글 늘 감사합니다.
신 인수님의 댓글

직원이 더 필요해서 광고를 보고 내일 인터뷰하러 오라면,
내일은 친구랑 점심 약속이 있어서 안되고, 모레는 금요일이라 놀러 가야하고,
다음 주 화요일 쯤 인터뷰하러 갈 수 있다고......
일을 구하는 사람인지, 취미로 일을 하려고 하는건지...
요즘 세상은 참 많이 달라졌습니다.
박명균님의 댓글
세월의 흐름에 따라 사람마저 변하는거야 어쩔 수 없지만
그러지 않아야 할, 그렇게 변할리 없다고 생각한 주위 사람마저
그런 세월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자기 스스로를
상실해 가는 사람들을 보면 정말 안타깝습니다.
김명기님의 댓글
젊은 친구들의 해석은 또 다르더군요...
일을 구하는 사람인지, 취미로 일을 하려고 하는건지... <=== 여기에 비슷한 논조의...
無限/박성준님의 댓글

변화를 너무 뭐라 나무라지 마세요.
좀 다른 이야기를 해 드릴까요??
변해 가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렇습니다.
21세기 사람을,
20세기 사람이,
19세기 사람의 감시 아래 가르친다는것이 참 어렵습니다.
이렇게 세상이 변해 가고, 그 변하는것 을 막을수 없으니,
나도 따라 변해야 하겠지만,
변하는것이 힘들다고 해서, 변하는것을 막아서는 안되겠지요.
전제는 좋은쪽 으로의 발전과 변화 입니다.
- 흙이 잔뜩 달라 붙어 있는 신...
그 신을 닦아야만 하는 미화원은 기분이 상했을 수도 있겠단 생각을 한번은 해 봐주세요.
양나라님의 댓글

세상에는 변하지 말아야할 것...아니 더디게 변화되어야 할것들까지 빠르게 변화되는 것에 뭍히어 같이 변화되는 모습이 안타갑습니다.
특히나 한국사회가 선진국이라는 나라들보다 그런것이 많은 것 같습니다.
언젠가부터 사람들이 오른쪽으로 다니기 시작하더군요.."편리"라는 것만을 따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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