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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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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김명기
  • 작성일 : 08-12-10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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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출사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니지만, 지나치게 바빴다. 과부하다. 온 몸은 물먹은 휴지 같고, 머리는 성에가 낀 유리창이 되었다. 관자놀이 부근의 동맥에 규칙적인 압력이 느껴진다. 나는 쉬어야 한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뭔가 보람 찬, 흥미진진하고 새로운 먹잇감 때문에 한발씩 규칙적으로 나아가는 것은 즐겁다.

하지만 인생에는 헝클어진 낚싯줄을 풀어내는 것 같은 나날이 있다. 전혀 새로운 것은 없고 달라지는 것도 없다. 무풍지대에 멈추어 서서, 그저 잘 못 연결된 인연의 줄을 정리해야 하는 것이다. 어쨌든 개운하기는 하겠지. 그래도 나가자. 더 이상은 참기 어렵다.

나는 반팔셔츠에 두터운 파카를 입고 산으로 갔다. 집 뒤의 산에는 성(城)이 있다. 나는 파인더를 통해 잊고 있던 겨울을 발견한다. 팔공산의 겨울은 포근하다. 나는 셔츠 아래로 땀이 솟아나는 것을 느낀다. 이따금 불어주는 찬바람이 오히려 고맙다. 이제 산은 모든 것을 버리고 웅크리고 있다. 아니면 기다리고 있는 것이겠지. 산은 현명하다. 기다림보다 더 적극적인 행동은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산성의 벽돌 위에는 수많은 이름들이 있었다. 광수와 혜진, 철수와 미미, 범진과 미진... 그들은 변하지 않는 단단한 산성의 벽돌에 이름을 새겼지만, 아마 성곽은 그들을 지켜주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알고 있다. 뭔가 단단하고 확고한 것들 위에 이름을 새기는 행위는, 다만 불안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들은, 그들의 사랑에 드리운 그늘과 불안을 돌 위에 토해 놓았을 뿐이다. 그리고 그 행위는 그들의 물거품 같은 사랑만큼이나 무의미한 것이 되었다.

나는 그 부서진 이름들 위에, 그 성문 위에, 그 성의 총안과 돌 틈에 핀 잡초 위에 카메라 렌즈를 겨냥했다. 카메라는 건조한 소리를 내며 셔터를 여닫는다. 나는 사진들을 보고 내가 셔터를 눌렀던 순간을 반추할 것이다. 그 사진들은 더 오래된 기억 속으로 나를 안내할 것이고, 나는 카메라와 사진 속에서, 과거와, 더 깊은 과거와, 마침내 심연 속에 가라앉아 물고기들의 시체 속에 갇혀있던 해묵은 기억들 사이에서 길을 잃게 될 것이다.

사진은 현실을 카메라에 담는 것이 아니다. 사진은 눈앞의 피사체를 정밀하게 복사하는 것도 아니다. 사진은 과거와 미래, 현재와 기억 사이를 이어주는 복잡한 지하철 노선이다. 사진 한 장에 담긴 향기와 음성, 작은 나뭇가지를 흔들던 바람, 비둘기 같은 어깨 위에서 흘러내리던 머리카락, 그리고 계절의 이정표들.

영원히 멈추지 않은 웃음, 미소 또는 울음, 그 하얀 뺨 위에 백만 년 동안이나 멈추어 있는 눈물. 그 한 방울의 눈물 위에서 쪼개지던 햇살. 기쁨과 슬픔, 행복과 불행, 사랑과 이별, 손에 쥐거나 잡지 못했던 아쉬운 갈망을 담아낸다. 곱은 손으로 카메라를 쥐고 있는 내 주위로 시간이, 세월이, 추억과 한숨이 검은 하늘의 별자리처럼 빠르게 맴 돌고 있다.



씽씽 거리는 카메라 셔터, 점점 뜨거워지는 기억과 어지럽게 떠오르는 얼굴들. 어느 순간 나는 셔터 누르기를 멈춘다. 메마른 산 아래의 빈 들을 쓸고 올라온 겨울바람이 얼굴과 목 언저리를 스친다. 대나무 숲 사이로 숨어드는 까치를 바라본다. 잠깐 사이에 열기가 잦아든다. 나는 이윽고 기억의 좁은 오솔길을 천천히 걸어 나와 겨울 속에 멈춘다.

마른 갈대숲을 바라보자니 막걸리 한 잔이 간절하다. 바람 탓일까?




고성(古城) 아래 별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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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강인상님의 댓글

강인상

사진 한 장이 갖는 의미는

그 순간을 어쩌면 기억보다도 더 잘 잡아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생활의 기록으로써의 사진이라면..

그 사진이 잘 찍힌 사진이 아닐지라도 관계 없습니다.

그저 그 순간이 생각나 보고 싶어지면 다시 보여줄 수만 있어도 참 좋습니다.



김명기 선배님 멋진 겨울 출사이야기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김명기님의 댓글

김명기

집이 팔공산 가산산성 근처라 그냥 주변 한 바퀴를 돌아 보았습니다. ^~^
어디 멀리 가서 대단한 출사를 하는 것도 좋겠지만,
그저 주변의 소소한 일상을 담는 것을 더 좋아하는 편이라, 이런저런
생각을 좀 풀어 보았습니다.

원매근님의 댓글

원매근

이상하게 김명기님 사진이 여지껏 한번도 보인 적이 없습니다. 프로그램 문제인것 같기도 한데,
조만간 새컴퓨터가 오면 다시 시도해 봐야 겠네요. 좋은 글 항상 감사히 읽고 있습니다.

문원식님의 댓글

문원식

slr클럽에 연재하고 계신 글들도 항상 잘읽고있습니다.

여기서뵈니 반가움이 두배됩니다..

김명기님의 댓글

김명기

인용:
원 작성회원 : 원매근
이상하게 김명기님 사진이 여지껏 한번도 보인 적이 없습니다. 프로그램 문제인것 같기도 한데,
조만간 새컴퓨터가 오면 다시 시도해 봐야 겠네요. 좋은 글 항상 감사히 읽고 있습니다.


아이고 이거 정말 다행이다 싶습니다. 저는 사진에는 정말 막눈이라,
아예 포기하고 편안하게 보이는대로 막샷을 날립니다. ^~^

번쩍번쩍하는 새 컴퓨터로 보면 더 엉망인 사진인데, 어쩌지요?

김명기님의 댓글

김명기

인용:
원 작성회원 : 문원식
slr클럽에 연재하고 계신 글들도 항상 잘읽고있습니다.

여기서뵈니 반가움이 두배됩니다..



아 그러시군요. 정말 반갑습니다.
사진 쪽은 여기와 SLR 에만 글을 올리고 있습니다.

사진이 엉망인데도, 내년 1월 월간 DC에 글과 사진이 실린다고 합니다.
참... 이젠 드러내 놓고 돌맞게 생겼네요...

문원식님의 댓글

문원식

이런 경사스런일이.. 축하드립니다..

구매해서 한번 봐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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