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월요일, 아내를 만나러 가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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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 김명기
- 작성일 : 08-11-18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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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이 깬 것은 저녁 10시 32분. 내게는 한 밤이다. 팔공산에서 푸르거나 혹은 붉은 나무숲에 둘러 싸여 있던 내게 서울은 너무 지나치게 화려하다. 미국 발 경기침체로 고개 숙인 남자들을 고무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조금이라도 더 나은 수컷을 확보하기 위한 필사의 노력인지, 영하에 가까운 날씨에도 수많은 여인들은 거의 벌거벗고 다닌다.
도심 속 술 한 잔의 유혹과 잠깐 사이의 실수는 인터넷 신문 사이의 원색 화보만큼이나 가깝다. 대한민국 남성의 지위는 한 발만 잘 못 딛어도 영원한 나락으로 빠지는 만화영화 속의 낭떠러지다. 내가 지닌 마지막 마음속의 보물, 체면까지 버릴 수야 없는 일 아닌가.
나는 이미 중년의 끝자락에 서있고, 노안이 심해지고 있다. 술은 좋지만, 실수나 사랑타령은 싫다.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Jazz cafe는 일부러 반대방향이며 먼 대학로까지 가야만 한다. 피곤한 내게는 너무 무리한 일이다.
보통 오후 8시 정도면 잠자리에 든다. 그러면 자정 가량 눈이 떠지지만, 그저 뒤척뒤척 침대에 뒹군다. 중년의 침대는 여러 가지 면에서 이 세상 가장 안전한 곳이다. 애써 잠을 청하다보면 새벽이 어렵사리 다가오는 것이다. 매주 금요일부터 월요일 새벽까지의 삶은 점점 더 단순해진다. 어쨌든 아내는 저녁 10시 32분에 전화를 했다. 그래서 나는 잠이 깨었다.
자요?
응.
괜히 깨웠네요.
응.
전화 끊을게요.
아냐, 뭐든 더 말해봐.
아내는 내 서울살이에 대해 몇 가지 묻는다. 대개 춥지는 않느냐? 어디가 불편하지는 않느냐? 감기는 어떠냐? 챙겨준 약은 먹었느냐? 등이지만, 나는 그 조근조근한 음성을 들으며 태중의 아이처럼 편안함을 느낀다. 난리 같은 세상, 전쟁 같은 세상 속에 누가 내게 이런 사소한 것들, 그러나 삶에 있어서는 정말 중요한 것들을 궁금해 할까? 나는 그저 자신감을 잃어가는 중년 남자에 불과한데.
나는 걱정이에요.
왜?
당신이 여전히 젊어서.
나는 전화기를 들고 오른쪽 입술을 당겨서 미소 짓는다. 아마 위로의 말이겠지. 함께 이 세상의 노을을 보게 될 사람, 삶의 치열한 동료로써 건네는. 어쩌면 싱거운 그런 말들이 오후 10시 반, 한밤중의 검은 공간을 날아 서울과 팔공산을 오고간다. 나는 전화기에서 팔공산의 맑은 어둠과, 반짝이는 별빛이 흘러나오는 것을 느낀다. 초겨울 개울을 스치고, 낙엽을 스치고, 코끝에 와 닿은 차가운 공기마저도.
오늘은 월요일. 이제 분당정자초등학교의 승마수업이 끝나면 나는 아내를 만나러 간다. 앞으로 화수목 3일 동안은 아내와 함께 껍질 속의 호두처럼 느긋할 것이다. 흠... 뭘 먹을까? 우리 농장에서 말똥으로 재배한 무 농약 아삭아삭 배추전이나 정구지전에 더덕 막걸리? 상상만으로 입에 침이 고이는 월요일이다.
고성(古城) 아래 별자리...
www.allbaro.com
PS :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아내는 보드카로 스크루드라이버를 마련해 두었다. 나는 마시고 죽었다. 이글은 오후 2시에 일어난 나의 유령이 쓰고 있다.

댓글목록
서정학님의 댓글

항상느끼는 회원님의 짠한 글에 항상 감명을 받고 갑니다 내내 행복이 가득하시기를....
신 인수님의 댓글

항상 감동을 주시는 글, 감사히 읽고 있습니다.
부부간의 행복이 엿보이는 글, 잘 읽고 갑니다.
박상덕님의 댓글

사랑과 행복이 느껴집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강인상님의 댓글

늘 써주시는 정감어린 글에 감탄과 부러운 마음이 생깁니다.
김명기 선배님이 써주신 글과 사진을 대할 때면,
저도 모르게 사진보다 글에 더 집중되서 본다면 실례가 아닐런지요. ^ ^
좋은 글과 사진 감사합니다.
김재호S님의 댓글

너무 부러운 사랑과 행복함을 봅니다^^
배우고 싶은 따뜻한 사랑과 행복입니다..
김형배님의 댓글

참 아름다운 글입니다..
무척이나 푸근해지는..
^^;;
김대용ak님의 댓글

같은처지라 많은 부분 공감이 갑니다.
저는 아내 만나려 가는 길은 비행기 13시간 그리고 차로 한시간
아득하게 느껴지네요.
덕분에 그리움에 젖어봅니다.
미쉘/김기현님의 댓글

사랑이 듬뿍 묻어나는 글이네요..
행복하세요~!! ^^
김인택님의 댓글

김명기님 글을 읽으며 많은 반성을 합니다
오로지 한가지만으로 아내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것도 모자라, 이것저것 속깨나 썩히며 살고 있습니다
이세상에 가장 소중한 단 한사람인데....
좋은 글 잘 읽고 반성모드 돌입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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