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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걷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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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김명기
  • 작성일 : 08-10-22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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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걷이



저녁 무렵 칠곡에 일이 있었다. 낡은 마티스는 거친 산길에 파도처럼 흔들흔들 언덕길을 내려간다. 저녁 안개가 옅게 낀 산골엔 농부들의 가을걷이가 바쁘다. 그러다 문득 추수를 마치고 논 한가운데 앉아 막걸리 잔을 기울이는 농부들을 보았다.

나는 잠깐 차를 멈추고 카메라를 꺼냈다. 일 년 농사를 마무리 지으며 동료와 함께 나누는 막걸리 한 잔. 마른 논 한가운데 앉은 농부들의 행복과 기쁨이 내게도 그대로 전해 온다. 그때 익숙한 음성이 내게 말을 걸어온다. 바로 내 안의 나다.

어때? 너 지금 행복해?
글쎄. 차분한 하루. 삼겹살에 소주도 마시고, 힘들지만 열심히 일할 수 있고. 아이들과 젊은이들의 미소를 마음껏 볼 수 있다는 것. 그게 행복이라면 나는 분명히 행복한 것이겠지.
응, 조금 시니컬한 표현인 걸? 그건 지난 10년 동안도 그래왔잖아?
아 그래, 덧붙여서 열심히 내조하는 아내와, 팔공산의 사계를 유화처럼 감상 할 수 있는 것. 힘들지만 돌탑을 쌓듯 조금씩 이루어 가는 일. 나의 신념과 성실, 신뢰를 믿어 주는 벗들. 그래, 당장 큰돈과 보다 안락한 삶과 멋지게 지은 내 개인 주택에 살지 못한다는 것을 불행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언젠가는 이루겠지만, 서둘러서 될 일은 아니지.
다행이네. 제법 철들었군. 너는 이미 그 모든 것을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가는 모래알갱이처럼 바람에 날려버린 기억이 있잖아.
맞아, 그땐 모든 것들이 너무나 당연했지. 그래서 소중한 줄 전혀 몰랐어. 이젠 적어도 그런 바보짓은 하지 않겠지.
지금은 땀 흘리며 일하는 순간이나, 아주 작은 성취가 다가오는 그 순간들을 차근차근 잘 기억해 두려해. 어쩌면 모든 것이 이루어질 그 순간보다. 지금의 이 조심스러운 시간들 일 분 일 초가, 하나하나 소중한 행복 알갱이들 일지도 몰라. 그 때 지금의 이 소중한 순간을 기억하지 못한 다면 너무 허무하지 않겠어? 아마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마티스는 다시 덜컹덜컹 언덕길을 내려가고, 나는 막걸리 생각이 간절하다. 그 농부들에게 슬쩍 한 잔 얻어먹고 올걸 그랬나? 하지만 나는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머리를 흔든다. 지금은 그들의 행복을 지켜 본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 막걸리는 그들의 땀으로 빚은 그들의 막걸리다. 이방인인 내가 섣불리 얻어 마신다고 해도, 그들이 지금 느낄 그 맛을 그대로 느낄 수는 없다. 나는 내 손으로, 나만의 가을걷이와, 나만의 막걸리를 빚어야 하는 것이다. 그 결과뿐만 아니라, 과정 역시 충분히 행복할 것임을 이미 짐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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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강인상님의 댓글

강인상

요즘 출근하다보면 벼베기가 한창입니다.

김명기 선배님의 사진과 글을 접하니 저 또한 그 모습을 담고 싶어집니다. ^ ^


늘 좋은 사진과 글 감사히 잘 보고 있습니다.

김인택님의 댓글

김인택

마음을 행복하게 해주는 글입니다
저도 식당을 하면서 텃밭에 무우랑 배추랑 고추 감자따위를 심고 행복해 합니다
행복은 멀리 있는게 아니더군요
가난해도 마음은 항상 부자로 살고 싶습니다
좋은 글과 사진 고맙습니다.

김명기님의 댓글

김명기

강인상, 김인택 선배님과 라이카 클럽의 모든 선배님들도 올 가을 뜨거운 땀방울이 맺힌 풍성한 가을 걷이를 하게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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