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 기울여 들어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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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 장지나c
- 작성일 : 08-10-17 0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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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난 궁금한게 무진장 많은 아이였는데 울엄마의 얘길 빌자면 대답하기 어려운 걸로만 골라서 질문을 하는 통에 알아서 해결하라고 백과사전을 출판사별, 종류별로 몇질이나 사셨다고 했다. 덕분에 학교도 들어가기 전부터 백과사전은 내 좋은 친구였다. 내 몸무게만큼 무겁고 컸던 그 책들을 끌어 안고는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그 안에 있던 모든 글씨들을 읽었다.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다시 그 단어들을 찾아서 읽고 또 찾아서 읽기를 반복했었는데 뭐니해도 큰 사전이 좋았던건 그림과 총천연색 사진이 있어서였다. 울퉁불퉁 못생긴 구근에서 자라났다는, 이름도 화려한 히야신스니 글라디올러스하는 꽃들의 사진을 보고는 구근의 이미지를 '미운 오리 새끼'와 같다고 너무도 황홀해 했다.
지금도 그런데 어릴 때니 좋거나 관심 가는 것에 대해 떠들고 싶어하는 성미는 얼마나 더 대단했겠는가. 엄마한테 말하면 정신없다고 하시니 언제나 내 얘길 잘 들어 주셨던 할무니를 붙잡고 그날 알아낸 구근에 대해 책을 펴고는 하나하나 설명하기에 바빴는데 울 할무니... 콩알만한 것 한테 잡혀서는 암것도 못하시고 이치에도 안맞았을 얘길 한참 듣더니 말씀하셨더랬다.
'대기만성이라는 말이 있대이. 뭐든 잘 클라믄 공도 마이 디리고, 시간이 걸리도 안 내치믄 잘 큰다는 말이데이. 니가 해준 얘기 있제? 오리도 백조가 됐다 안카드나. 그라니 니도 뭐시든 애끼고 잘 보살펴야 한데이'
할머니와 그녀의 세째 손녀는 우리가 깨달은 사실에 대해 뿌듯해 하며 잠이 들었다. 그날은 그렇게 끝났다. 그리곤 얼마 후에 무슨 영화였는지는 기억이 안나지만 엄청 화려한 궁전이 나오는 영화를 티비에서 봤는데 그때 날 사로잡은건 '샹들리에' 였다. (이름은 커서야 알았고 그때는 유리등이라고 불렀지만) 클로즈업으로 잡았던 그 샹들리에의 크리스탈 구슬이 바로 전날 부러져서 버려지길 기다리던 우리집 스탠드의 유리구슬과 똑같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유난히 반짝거리는 걸 좋아해서 화려했던 스탠드의 끝장남에 안타까웠던 그때. 내 머리를 스치던 생각 하나. 이 구슬을 심으면 샹들리에가 될지도 모른다! 하는데 까지 미쳤던 것이다. 물론 생각하고나선 얼른 실행으로 옮겼다. 스탠드 갓에 달려있던 구슬 중 가장 멀쩡한 것 하나를 골라 들곤 할머니를 불러댔다. 안쓰는 화분 하나 달라고. 그녀는 뭐하려고 그러냐고 물어봤고 심을게 있어서라고 대답하곤 화분을 받아들고 재차 확인하듯 물어봤다.
'할머니~ 할머니~ 잘 보살피면 어떤 거든 커지는거 맞죠? 맞죠?'
화분에 꾸욱하고 유리구슬 하나 밀어 넣고는 기대감에 들뜬 두눈 반짝이고 자신을 쳐다보던 손녀. 얼마나 당황하셨을꼬. 니는 빙신이가~ 이럴수도 없고, 기대하는 대답을 해줄 수도 없고. 지금에서야 알지만... 할머니도 참 나 때문에 욕봤다 싶다. 그런 내게 할머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야야... 뭐든 키울 때는 정성을 들이면 잘 자라는건 맞다. 그런데 아무리 정성을 들이도 내가 원하는데로는 안 자랄때도 있는기다. 그래도 밉다카고... 그라믄 못쓰는 기다. 쪼만한기 클라믄 울매나 힘들었겠노. 그그를 알아줘야 하는기다. 알긌나?'
물론 안다고 고개를 끄덕였었다. 정확하게 뭘 말씀하시는 건지는 몰랐지만 그땐 할머니께서 하시는 모든 이야기를 다 알아 먹은 듯 했었다. 그리고나서 한동안은 물도 주고... 베란다에서 햇빛이 가장 잘 들어오는 곳에다가 화분을 옮겨 놓기도 했었다. 하지만 꽤 긴시간 아무 소식이 없었다. 여느 때 같으면 금새 실증내고 다른 일에 정신을 팔았겠지만 유리구슬이 샹들리에가 될 지도 모른다는 내 희망은 금새 꺼지지 않았다. 그리고 쪼그리고 앉아서 화분을 지켜보는 시간과 비례하여 실망감도 늘어났을 때, 기적이 일어났다.
아침에 일어나선 별 기대도 안하고 습관처럼 물을 주러 베란다에 나갔는데 내 화분에 작은 나뭇가지 하나가 솟아난게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리고~ 그 나뭇가지엔 샹들리에는 아니지만 꽤 큰 브로치 하나가 데롱거리며 달려 있었다. 동그랗고 가운데가 뻥 뚤려 있는 모양이었는데 아침 햇살에 반짝거리던 그 빛이라니...ㅠ_ㅠ
일하시는 할머니 손을 끌어 베란다로 나가 화분을 보여 드렸을 때 할머니는 그저 '이쁜게 컸네' 이 말씀만 하셨다. 나는 고개가 부러져라 끄덕이곤 화분을 들고 밖으로 나가 수위 아저씨, 청소부 아줌마, 동네 친구들. 내가 아는 사람들 모두에게 자랑을 하고 다녔댔는데 그들이 어떤 반응이었는지는 전혀 기억에 없다. 남의 반응을 볼 사이도 없이 그 브로치에 폭 빠졌었구나... 지금은 생각하고 있지만. 아마도 우리 할머니는 내가 반푼이란 소리 안듣게 나중에 해명하고 다니지 않으셨을까...
그 후에는 할머니께서 미리 진짜 식물만 심게끔 유도하셔서 다른 '황당한' 것들을 심지 않았다. 하지만 그 사건은 내게 있어선 뭐든 공들여 키우면 어떤 모습으로든 크기 마련이라는 만고의 진리를 깨달았던 기적의 순간이었다.
*
왜 이런 얘기를 썼냐면... 얼마전 동창들을 만났는데 한놈이 고무나무를 키운다고 했다. 내가 농담으로 '고무나무에 농구공 달리라고 빌고 있니' 라고 했더니 그 친구놈이 '콘돔이 자라길 바라고 있지'라고 했었다. 그러자 또 한 친구가 둘이 똑같다며 막 구박을 했는데, 그때 반사적으로 '아냐~ 예전에 나 브로치를~'하고 반박 하다가 스스로 놀라서 말을하다 말았던 거다.
난 이미 그때의 내 나이만한 애가 두셋은 있어도 될 나이고, 유리구슬에서 샹들리에가 자란다는게 천부당 만부당 한 일이란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왜 여태 내가 브로치를 키우는데 성공했다고 믿고 있었을까? 의심할 필요도 없는 진실이라고 믿었기 때문일까? 그리고 어쩌면 이런 일을 홀딱 까먹고 있었을까?
아마도 거의 100% 그 브로치는 우리 할머니 소유였을 것이고, 미국 오기 전까지 피아노 위 인형한테 달아 놨던 건 기억이 나는데 다시 할머니가 가져가셨을 수도 있고 울엄니가 뚱쳤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 브로치가 이렇게 생생하게 기억이 나는데도 여태 까먹고도 잘 살았던걸 보면 사람의 기억이란게 얼마나 우습나 싶고 난 할머니가 내게 줬던 수 많은 것들 중 얼마나 많은 것들을 기억을 하고 감사해하며 살고 있나... 누가봐도 어른이라고 인정받는 나이지만 내 일에 바빠서 주변의 어려움이나 힘든 이야기에 얼마나 이해하려 노력했던가, 혹 어떤 일이든 자기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고, 누구도 해답까지 줄 순 없고 그게 어른이라고 세뇌하며 어렵게 꺼냈을 이야기들을 들어주는 것까지도 소홀하진 않았던가.. 새삼 반성하는 요즘이었다.
*
할머니. 그런 기억들을 제게 주셔서 새삼 고맙고 그리워요. 제가 세상에 조금이라도 쓸모있는 사람이 된다면 그건 다 할머니 덕분이야.
*
몇년전 1월에 일 때문에 그린건데... 제목이 '1년 키우기'였다. 어쩜 위의 기억들이 내 속에 있었기에 그리고 쓸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올 한해 이루고 싶은 11가지 소망의 씨앗을 준비하세요.
매달 하나의 씨를 심고 잘 돌보는 거에요.
한 달이 지나면 땅으로 옮겨 심어 더 크게 키우세요.
그렇게 1년을 정성껏 키워보세요.
아. 왜 11 가지냐구요?
1월의 싹은 이미 돋아났답니다.
모든 일을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용기'
댓글목록
손현님의 댓글

아름다운 글에, 이쁜 삽화입니다...
꼭두새벽에 미소가 절로 생기는군요.
요즘 딱히 하고 싶은 것도, 이루고 싶은 것도 없어서
시름시름 마음이 앓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며칠 후면 시월도 가고 연말 분위기로 떠들썩하겠죠.
남은 기간은 차분히 원래 품고 있었던 씨앗을 생각해보기로 하겠습니다.
애초에 뭘 틔우고 싶었던 씨앗이었는지...
좋은 글과 사진 감사합니다.
채지현님의 댓글

참 부유한 어린시절을 보내셨군요. 많은 부분이 공감이 갑니다. 엄마, 아빠가 맞벌이로 바쁘셔서 항상 끼고 살았던 백과사전이랑 동화전집이 생각나네요. 전 친가쪽 외가쪽 할머니, 할아버지가 다 일찍 돌아가셔서 무척 부럽습니다. 다만 외할머니 같은 수녀님이 계셔서 성당에 안 가던 주중에도 찾아가 열심히 이야기를 했던 일들이 기억이 나네요. 항상 제 이야기를 잘 들어 주셨는데...
추억을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그림 좋은 사진 감사합니다.
강인상님의 댓글

아이들의 호기심은 정말 귀중한 것입니다.
특히나 장지나 님처럼. ^ ^
호기심이 대답하기 어려울만큼 왕성한 아이들이
그 자신의 호기심을 하나하나 해결하다보면,
어느 새 훌륭한 어른으로 클 수 있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주변에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가 무슨 말을 하는지 가만히 들어보세요.
그 아이가 호기심을 품고 그에 대한 생각과 호기심을 해결하는 지금.
가장 중요한 순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좋은 글과 사진 감사합니다.. ^ ^
이현주님의 댓글

내가 빛이나는 사람이라면, 그건 내 마음속 뿌려진 씨앗 하나 때문 이라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내 마음속에 씨앗 하나를 뿌릴 수 있도록 작은 화분과 적당히 기름진 흙, 그리고 따듯한 빛과 물을 준
내 어릴 적 기억들....
늘 귀한 보석처럼 마음 가장 깊은 곳에 품고 살아갑니다.....
따듯한 글.. 감사해요.
신 정식님의 댓글

참... 몇차례나 읽고 또 읽고...
정말 훌륭한 할머니, 부모님을 두셨습니다.
아마도 우리 모두 그 예뻤던 추억을 다 잊고 살고 있는 것이 아닌지...
좋은 글 읽으며
저는 오늘도 또 옛날 사진 뒤적이며
장지나님 같은 추억은 없나 기억을 되살리고 있습니다..
허은순님의 댓글

지나님 덕분에 에너지가 솟았습니다. 고마와요.
김대석님의 댓글

길게 써 내려간 글을 모니터 상에서 읽으려면 여간 눈이 아리아리 한 것이 아닌데...
단숨에 읽어 내려갔습니다. 담담하게 써 내려간 글을 읽으면서 제 아이들 생각도 나고
저 어렸을 적 기억도 되살려 봅니다. 저 역시 유난히 호기심이 많았던 터라
호기심이 발동할 때마다 사실 `엄마`나 `할머니`보다는 `아버지`께서 차근차근 설명을
해 주시곤 했지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정승진님의 댓글

예쁜 그림처럼 마음을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글이네요.
감사합니다.^^
정해수님의 댓글

가슴이 찡하네요. 아름다운 이야기에 제 자신이 부끄러워집니다.
맨날 일 때문에 주말도 없이 아침 일찍 나가 밤늦게 들어와 자는 얼굴만 보는....
이번 주말에는 어떻게든 시간을 내서 아이들이랑 놀고 싶네요.
임규형님의 댓글

이 이야기를 구연동화 처럼 들려 주시면 더 좋겠어요.
아우, 눈 아파라...ㅋㅋ
잘 읽었습니다.
한번 믿은 것은 다시 살펴 보기가 더 힘들지요.
그래서 뭔가 확실히 안다고 생각할 수록 실제로 아는 것은 자기의 에고 밖에 없다고 그래요.
김형배님의 댓글

귀기울여 들어주기..
한 참을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너도 제 늦둥이 이야기 좀 잘 들어 주여야 겠습니다..
그 놈도 그렇게 궁금한 것이 많은 아이라서 말이죠..
장지나님의 할머님께서는
참으로 현명하고 어지신 분이었음에 틀림없다는 생각은 굳게 듭니다..
저도 그런 현명한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 제 늦둥이 아들놈에게 만이라도 말이죠.. ^^;;;
^^;;
이완재님의 댓글

가슴이 찡해지는 글을 읽고 스스로를 돌아보고 반성했습니다. 좋은글 고맙습니다.
강웅천님의 댓글

처음 읽고서 댓글을 적지 못했었습니다.
삭막해진 감성에 단비같은 멋진 글입니다.
돌아보아 몇개의 싹이 보이나 들여다 보았습니다만.... 빈 화분 뿐입니다.
좋은글 잘 보았습니다. 멋진 그림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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