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잦은질문모음
  • TOP50
  • 최신글 모음
  • 검색

Forum

HOME  >  Forum

Community

산책

페이지 정보

  • 작성자 : 김명기
  • 작성일 : 08-10-09 15:33

본문



산책

새벽부터, 어른과 함께 말을 매어 산자락을 걸었다. 새벽안개가 걷히기 시작하는 오전 7시. 팔공산의 다락 논은 아침 햇살을 받아 황금빛이다. 이미 한 두 곳은 벼를 베어 말리고 있는 곳도 있다. 마른 벼의 구수한 향기가 소나무 숲을 스쳐온 바람과 함께 폐를 상쾌하게 씻어 준다.

말 타이 좋나?
그래 좋다. 니 오도바이캉 바꾸까?
말 준다고 내가 타내나? 줘도 몬탄다카이.

73세 자신 동네 노인분이 벼를 베다가, 우드득 허리 펴고 웃으며 농을 거신다. 검고 주름진 얼굴, 새하얀 백발. 하지만 가을 농부의 얼굴엔 여유가 가득하다.

요즘 농부들은 밥 안 묵어도 배 부르제. 마카 농사져서 손해들 보았겠지만, 농부들이 어데 그렁거 따지나? 농부들은 그저 베가 누렇게 익고, 그 베 찧어 손자들 입에 햅쌀밥이 수저 가득가득 들어가는 걸 보는 재미. 그 재미에 세월 가는 줄 모른다 카이. 이 베 다 비고 나면 논이 얼매나 쓸쓸할꼬? 또 한살 먹는 기재.

아침 햇살이 쏟아지는 어른의 모자 위, 고추잠자리 한 마리 잠시 쉬었다 날아간다.

이 배추밭 주인이오?
네, 말 타이 보기 좋습니다.
배추가 아주 참하네.
올개는 태풍도 없고, 배추농사가 잘 될 것 같심다.
우리 배추도 아주 참하이, 곧 밑둥 묶어야 할 것 같소. 말똥을 거름으로 넣었더니 배추가 아삭아삭하이 얼매나 단지 몰라요.
근데, 말 가까이서 보니 아주 크고 무서버요.
하하하 이기 그래도 순하기 짝이 없소. 얼매나 순한데?

동네 어른들과 말씀을 나누시느라, 말을 타고 가는 아침 산책길은 오히려 더디기만 하다. 하지만, 노인 분들께 바쁜 일이 또 무엇일까? 그저 누렁 소 울음소리 음악 삼아,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도 나누고, 어느 집 배추가 잘 되었는지, 어느 집 벼는 언제 베는지. 풍년으로 곳간이 가득해진 보기 좋은 이웃집들도 둘러보시고. 시간 되면 탁주도 한잔씩 나누고. 말 탄 나그네도, 벼 베는 농부도 가을 들녘에 내린 축복으로 느긋하기 짝이 없다.

산골 시간은 소걸음, 노인 세월은 말 걸음이다카이.

팔공산 자락 황금 빛 다락 논 사이 좁은 오솔길엔, 말 탄 노인과 한 중년이 가다서다를 반복하고 있다.
추천 0

댓글목록

강인상님의 댓글

강인상

대화에서 시골 산책의 분위기가 물씬 풍깁니다.

아울러 사진까지도 빛이 납니다.


사실은 말을 타고 싶은신 것 보다

마을 어른들과 교감하는 것이 더 좋으신 것이 아닐까합니다. ^ ^


늘 좋은 글과 사진 감사합니다.

김건세님의 댓글

김건세

왜 제가 보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는 걸까요?...^^
평화가 그 안에 있습니다.

peace!! yeah!(요건 애교입니다.ㅋ)

최영선님의 댓글

최영선

글을 읽고 나니,
마음이 평온해집니다.
마음에 숨어있던 분노도, 조급함도, 경쟁심도...

훌륭한 글 고맙습니다.

김인택님의 댓글

김인택

바쁘게 살다보니 오랫만에 명기님 글을 읽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말씀을 전해 주시니. 읽기가 아주 편합니다
저도 배추를 조금 심었는데 일부 종자선택이 잘못되어 혹뿌리병에 시달리는 녀석들이 있어 가슴이 아픕니다
식당일 하며 날짜를 정하여 급히 심느라 하루를 기다리지 못하고 다른곳에서 사다 보탰더니 그놈들이 병들기 시작합니다
좋은글 잘 읽고 갑니다.

개인정보처리방침

닫기

이메일무단수집거부

닫기
닫기
Forum
Gallery
Exhibition
Collection
회원목록
잦은질문모음
닫기

쪽지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