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괘릉과 숭복사지귀부에 관한 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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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강태훈
  • 작성일 : 03-04-25 10:32

본문

이 글은 원래 최흥태님의 글에 댓글로 올려야 할 성질의 것이나
내용이 많아 따로 올리게 되었습니다.


전근으로 경주를 떠난지 2달밖에 되지 않으나
벌써 경주는 오랫동안 가보지 못한 고향같이 느껴집니다.

최홍태님의 사진을 보니
"문화재 사진을 찍는 것은 그 유물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라고 한
어느 분의 말씀이 피부에 와 닿는군요.

* 최흥태님이 찍은 사진 중 귀부는 숭복사지에서 가져온 귀부(경주국립박물관입구쪽 오른쪽 정원에 전시되어 있는 것)를 찍은 것으로 보입니다.


아래 글은 괘릉과 숭복사지 귀부에 관하여 정리를 해 본 것인데 참고가 될 듯하여 감히 올려봅니다(원래 작성한 글에는 주석이 있으나 너무 장황한 듯하여 뺐습니다).


[괘릉]

1. 괘릉에 관한 첫 기억

내는 초등학교 1학년 시절 경주에 수학여행을 갔던 삼촌이 경주안내책자 한 권을 사왔다. 삼촌은 그 책(가로로 긴 종이를 자르지 않고 연이어 인쇄를 하여 한쪽 면을 읽은 다음 그 면은 접고 다음 면을 펼쳐서 읽도록 만들어져 있었다)을 쭈욱 펼쳐 놓고 나와 동생(그 당시 여섯 살이었다)에게 불국사, 석굴암, 첨성대, 에밀레종 등에 관하여 거짓말을 조금 보태서, 예를 들면 첨성대 속에 들어가 창으로 하늘을 보면 낮에도 별이 보인다느니 하는 식으로 이야기를 해주었다. 우리는 그 설명이 재미있어 수시로 경주이야기를 해달라고 하였고 삼촌도 귀찮아하지 않고 같은 내용을 여러 번 반복해 주었다. 삼촌이 서울로 유학을 간 후에도 우리는 그 책을 마치 어코디언 처럼 접었다 폈다 하면서 장난감으로 가지고 놀았다. 그러는 사이에 한글도 깨우쳐 해설을 읽어보게 되었는데 거기에 괘릉은 누구의 능인지 모른다고 쓰여 있었다. 나는 임금의 능이라면서 그 왕이 누군지도 모른다는 것은 이상하다고 여겨졌고 그 때문에 능의 이름도 괴릉(괴상한 능)이라고 지은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 때문에 그 이후 상당히 오랫동안 괘릉을 괴릉으로 잘못 알고 있었다.


2. 괘릉(원성왕릉) 가는길

괘릉은 불국사역 삼거리에서 울산 방면으로, 그러니까 박물관 앞에서 우회전 하여 7번 국도로 울산 방면으로 계속 가다가 위 역 삼거리(박물관 앞에서 불국사역 삼거리까지는 대략 9.1㎞ 정도 된다)를 지나 2.8㎞ 가량 더 직진하면 괘릉의 표지판이 나오는데 그 곳에서 좌회전하여 소나무들이 양쪽에서 시립(侍立)하고 있는 길을 따라 600m 가량 진행하면 도착할 수 있다. (박물관 앞에서부터 괘릉 까지는 대략 12.5㎞ 가량 된다.)


3. 괘릉

이 능은 신라 제38대 원성왕(재위기간 785년부터 798년까지)의 능으로 추정되는 이 왕릉은 괘릉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괘릉(掛陵)이란 이 곳에 왕릉이 조성되기 이전에 작은 연못이 있었는데 그 곳을 메우고 왕릉을 마련하였는데 왕릉의 내부인 현실(玄室)에 물이 고이기 때문에 바닥에 관(棺)을 놓지 못하고 허공에 걸어 놓았다고 하는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괘릉의 외형은 원형봉토분으로 지름은 23m, 높이는 6m 가량 된다. 봉분의 봉토를 보호하기 위하여 호석이 설치되어 있는데 호석은 목조건축의 석조기단과 같은 지대석 위에 높이 95㎝, 길이 120㎝ 정도 되는 면석을 붙이고 그 위에 갑석을 올렸다. 각 면석 사이에는 봉분 내부로 뿌리가 길게 뻗어 면석과 봉토가 붕괴되지 않도록 지탱해 주는 '탱석'을 배치하였는데 탱석의 앞면은 면석 보다 앞으로 다소 나와 있고 탱석에는 두 칸 걸러 하나씩 무관의 복장을 한 십이지상이 조각되어 있다. 왕릉의 주위에는 부채꼴로 생긴 판석을 깐 회랑이 있고 회랑 둘레에는 높이 170㎝ 가량 되는 돌기둥 42개을 세워 난간을 돌렸다. 돌기둥 사이에 2줄로 끼웠던 돌은 대부분 사라졌고 현재에 있는 것들은 새로 보충한 것이다. 봉분 바로 앞에는 안상문(眼像文)이 새겨진 석상(石床, 魂遊石)을 남쪽에서 동쪽으로 약간 치우치게 설치하였다. 봉분을 기준으로 남쪽으로 약 80m 떨어진 지점으로부터 동서로 25m 간격을 두고 봉분 쪽에서부터 돌사자 2쌍, 문인석 1쌍, 무인석 1쌍, 화표석(華表石) 1쌍을 좌우대칭으로 배치하였다.
통일신라시대의 완비된 능묘제도의 대표적인 이 능은 서역사람의 얼굴모습을 한 무인석에서 볼 수 있듯이 당나라와 활발한 문물교류를 통하여 당나라의 능묘제도를 받아들인 것이지만 탱석에 조각된 십이지상은 신라인의 창안이며 능에 있는 각종 석조물에서 볼 수 있는 힘찬 조각수법은 당시 신라문화의 독창성과 우수한 예술감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여기의 12지상은 정교한 세부적 표현보다는 단순하고 중후한 양식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양식은 9세기부터 보이는 불상의 괴체적(塊體的)인 처리, 둔중한 모델링, 정교성의 결핍, 약동적인 정신성의 결핍 등을 반영한 것이라 생각된다. 무복의 형식에서는 허리띠의 천의가 양발 옆으로 조용히 흘러내려 좌우로 벌리되 과장은 없으며 몌(袂)의 긴소매는 유연한 곡선을 이루며 흘러내려 끝이 말리고 있어서 성덕왕릉의 경직된 긴소매와 비교하면 꽤 장식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할 수 있으나 흥덕왕릉의 십이지상에 비해서는 그 장식의 정도가 약하다.
일반적으로 무인석이라고 불리는 석상은 키가 2.4m 가량 되는데 부리부리한 눈, 우뚝한 코, 눈, 덥수룩한 구렛나루를 한 서역인의 모습으로 근육이 툭툭 불거진 굵은 팔뚝, 한속에는 가시몽둥이를 집고 다른 손은 주먹을 불끈 쥐고 들어 올린 모습이다. 머리에는 터반을 쓴 듯하고 갑옷이 아니라 장식이 없는 부드러운 옷을 걸치고 있다. 이 주인공에 대하여는 페르시아인, 아리아인, 이란인 등 추측이 다양하고 주인공의 성격에 대하여도 무인상, 객사상, 병사상 등 여러 가지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그 뒷 모습을 보면 직경 10㎝ 정도되는 주머니를 차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 주머니에 대하여도 우리 고유의 복주머니라고 하기도 하고, 호인(胡人)들이 당나라 장안에 머물면서 주판 같은 것을 넣고 다니던 산낭(算囊)이라고도 한다.
그 다음에 서 있는 석상에 대하여도 종래에는 문인석 또는 신라인으로 이해하였으나 최근 다른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즉 앞에서 보면 문복을 착용한 듯 하나 옷 속에는 칼을 양손으로 움켜쥐고 있는 듯하고(옷소매 아래에 나와 있는 것이 칼로 보인다) 특히 뒷면에는 양당개라고 하는 갑옷을 입고 있는 모습이 확인되고 있는데 신라시대에는 문관과 무관의 구별이 없었다는 점 등을 근거로 위 석상을 문인석이라고 단정하기 어려우며 조각에 악센트를 준 짙은 눈썹이나 두 귀밑에서 턱 전체에 가지런히 빗겨진 턱수염을 고려할 때 신라인으로 보기 어렵다는 점 등을 논거로 위 석상은 위구르인이라는 것이다. 어쨌든 그 석상은 팔자 콧수염, 짧은 구렛나루, 가늘게 치켜 뜬 눈을 하고 사람을 쏘아보는 듯 한 표정을 짓고 있거나 (서쪽 문인석) 같은 모습이면서도 덤덤한 표정으로 능에 들어오는 사람을 보고 있는 듯 하다(동쪽 문인석). 더욱이 문인석이나 무인석의 눈에는 조그만 동공까지 뚫어 놓아 더욱 생생한 느낌을 준다.
그러면 왜 신라왕의 능묘에 신라인이 아닌 외국인의 모습을 배치하였는가에 관하여 김원룡 박사는 그당시 신라인들은 당의 능묘제도를 숙지하고 있어 능 앞에 문무인석과 객사를 도열시킬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나 그 당시 당과 대등한 관계에 있지 못하였던 점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욕구는 당연히 당의 제도의 축소 또는 자숙의 형태로 표현될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고 한다.
이 능에 있는 사자 네 마리는 성덕왕릉이나 흥덕왕릉의 것과는 달리 능 주위 네 귀퉁이에 있지 않고 능 앞쪽에 배치되어 있는데 그 대신 얼굴들은 모두 동서남북을 보고 있다. 사자들의 자세도 동적인데 그 중에서 서쪽 문인석 바로 옆에 있는 사자는 몸은 동쪽을 향해 있으면서도 고개를 남쪽으로 돌려 능을 찾는 사람을 보고 웃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특히 동쪽의 능 가까이 있는 사자는 나무 뒤에서 왼쪽 앞발을 슬며시 들고는 이빨을 드러내고 웃는 표정이어서 볼수록 재미가 있다.

4. 괘릉은 누구의 능인가 ?

괘릉이란 이름으로 역사서에 처음 기록된 것은 1669년 간행된 경주의 향토사를 적은「동경잡기」인데 이 책에서는 괘릉이 누구의 능인지 모른다고 하였다. 그런데 조선후기 어느 시기부터 문무왕릉이라고 전해져 왔다. 일제때 『朝鮮の風水』를 쓴 村山智順과 『朝鮮美術史』를 쓴 關野貞이 그러한 견해를 받아 들여 그들의 저서에 문무왕릉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今西龍은 신라의 동곡사{삼국유사에는 원성왕릉이 토함산 서쪽 동곡사(洞鵠寺)에 있다고 기재되어 있다}이며 고려시대 숭복사가 괘릉부근에 있다면 괘릉은 원성왕릉일 것이라고 추정하였었다. 해방후 정인보가 괘릉이 문무왕릉이 아니라 원성왕릉이라는 것을 여러 문헌기록을 통하여 고증하였고 이후 삼산오악조사단에 의하여 원성왕릉설이 강력히 뒷받침되었고 그 이후 여러 학자들에 의하여 정설로 굳어졌다.

원성왕은 내물왕의 12대손으로 이름은 경신이다. 혜공왕 말기에 이찬 지정이 친위혁명을 일으키자 상대등 김양상이 반혁명을 일으켜 지정과 싸우게 되었는데 경신은 이때 양상을 도와 지정을 무너뜨렸다. 그 덕분에 김양상(선덕왕)이 왕위에 오른뒤 상대등이 되었고 선덕왕이 죽자 신하들의 추대로 왕위에 오르는데 삼국유사에는 다음과 같은 꿈 이야기가 적혀 있다.

이찬 김주원이 수석 재상을 있을 때 경신은 각간의 지위로 그의 차석자리에 있었다. 경신은 꿈에 머리에 썼던 복두(*두건의 일종)를 벗고 흰 삿갓을 쓰고 가야금을 잡고 천관사 우물 속으로 들어갔다. 꿈에서 깨어나 점쟁이를 시켜 해몽을 하게 하였더니 "복두를 벗는 것은 관직에서 쫒겨 날 조짐이요, 가야금을 잡는 것은 칼을 쓸 조짐이요, 우물에 들어가는 것은 옥에 들어 갈 조짐이외다"라고 하였다. 경신은 이 말을 듣고 매우 걱정하여 문을 잠그고 출입을 하지 않았다. 경신은 집을 찾아온 아찬 여삼(餘三)에게 해몽한 이야기를 이야기 하였더니 여삼은 절을 하고 말하기를 "두건을 벗는 것은 자기 윗자리에 사람이 없다는 뜻이요, 흰 삿갓을 썼다는 것은 면류관을 쓸 조짐이요, 가야금을 들었다는 것은 12대 손자에게 왕위를 전한다는 조짐이요, 천관사 우물에 들어간다는 것은 궁궐에 들어 갈 조짐이외다."라고 하였다. 경신이 말하기를 "내 윗자리에 주원이 있는데 어떻게 윗자리를 차지할 것인가?"하니 아찬은 "청컨대, 몰래 북천(北川)신에게 제사를 지내면 될 것입니다."라고 하여 경신은 그대로 하였다. 얼마 후 선덕왕이 죽자 나라 사라들은 김주원을 왕으로 삼으려 하였으나 김갑자기 폭우로 시냇물이 불어 건널 수 없었다. 그래서 경신이 먼저 궁궐로 들어가 즉위하 자 대신들은 모두 따라와서 새로 즉위한 임금에게 절을 하고 축하해 주었다. 경신이 왕에 등극하였을 때는 여산이 이미 죽은지라 그의 자손들에게 작위를 내렸다.

선덕왕이 죽은 후 신하들이 원래 왕으로 추대하려고 한 인물은 선덕왕의 조카뻘 되는 김주원이었다. 당시 주원은 서라벌 도성에서 북쪽으로 20리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는데 때마침 내린 폭우로 알천을 건널 수 없었다. 그 사이에 상대등 경신의 측근들이 "임금이란 중책은 사람이 마음대로 정하는 것이 아닌데 폭우가 내리는 것을 보니 하늘이 김주원을 왕으로 세우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 상대등 경신은 전 임금의 아우로서 덕망이 높고 임금의 체통도 가졌으니 능히 왕으로 추대할 만하다"고 주장하여 조정의 분위기를 장악하여 경신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비가 그쳐 알천물이 줄어든 후 주원은 그 소식을 듣고 통탄하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폭우 덕에 왕위에 오른 원성왕의 치세는 순탄하지 않았다. 거의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가뭄이 들었기 때문이다. 가뭄은 자연스럽게 메뚜기떼의 창궐로 이어지고 그것은 또다시 흉년을 이어져 백성들이 기근에 허덕이는 사태로 확대되고 유랑민과 도적떼가 늘어나 국정을 흔들어 놓았다. 그 난국을 틈타 791년에는 이찬 제공이 역모를 획책하기도 하였다. 역모는 중간에 발각되어 실패로 돌아갔으나 이를 계기로 국정을 더욱 혼란으로 치달았다. 게다가 원성왕은 자식복도 없었다. 태자로 세웠던 큰아들 인겸이 791년에 병으로 죽고 둘째 아들 헌평을 태자로 세웠더니 그도 794년에 죽어버렸다. 원성왕은 끊임없이 지속되는 천재와 조정의 혼란 속에서도 확실한 업적 하나를 남겼다. 재위 4년에 처음으로 독서삼품과를 설치하여 학문의 깊이와 능력에 따라 벼슬을 내리는 조치를 취하였다. 춘추좌씨전, 예기, 문선을 읽어서 능히 그 뜻을 알고 아울러 논어와 효경에 밝은 사람을 상등으로, 곡례, 논어, 효경을 읽고 해석하는 사람을 중등으로, 곡례와 효경에만 지식이 있는 자를 하등으로 하였다. 이 정책이 시행되기 전에는 궁술과 인물만 가지고 관리를 뽑았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독서삼품과에서 관리를 뽑는 것은 획기적이라 아니할 수 없지만 골품제의 폐쇄성과 도당유학열(渡唐留學熱)의 고조로 인하여 소기의 성과를 거주지는 못하였다. 원성왕은 재위 14년인 798년에 죽었다.



[숭복사지 귀부]

이 숭복사지에 있던 귀부는 현재는 경주국립박물관 입구쪽 오른쪽 정원에 전시되어 있다. 경주지역에는 숭복사지의 귀부처럼 하나의 대석 위에 머리가 두 개를 조각한 귀부가 여럿 있다. 그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은 무장사지 아미타조상사적비를 받치고 있던 것으로 애장왕 1년(802년)에 조성된 것이고 그 다음에 조성된 것이 바로 숭복사지 귀부인데 진성여왕 10년(896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경주남산 창림사지 귀부는 그것이 조성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발견된 석탑지의 조성연대로 미루어 문성왕(839∼857년)의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승복사 귀부는 두 마리의 거북이를 한 개의 대석 위에 설치하였으며 그 거북이 등에는 직사각형으로 된 하나의 비좌(碑座, 비신이 놓이는 자리)를 조성하였다. 거북이 머리는 약간 비스듬히 직립의 형태로 표현하였는데 입 부분의 약간의 손상을 제외하고는 거의 완전한 모습이다. 또한 눈은 툭 불거진 형태로 되어 있어 용의 머리 모습으로 변해 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양 턱의 볼 수염이 옆을 타고 귀밑까지 뒤로 날리는 형상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짤막한 목 부분은 앞으로 불쑥 내밀고 있는 듯하고 그 목 부분에는 일련의 방울일 섬세하게 나타내고 있다. 거북이 등에 설치되어 있는 비좌 주변은 그 윗부분은 연꽃무늬이고 아랫부분은 변형된 구름무늬인 점이 특이하다. 여기 세워진 비석은 최치원이 지은 숭복사비로 그 파편이 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두 거북이의 각 오른쪽 발가락은 4개의 발톱을 조각하였고 왼쪽 발과 달리 살짝 발가락을 들고 있는 모습도 다른 귀부에서는 볼 수 없는 점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정교하기는 하나 지나치게 기교를 많이 부려 힘이 빠져 있는 느낌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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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최흥태님의 댓글

최흥태

소중한 글 고맙습니다.
뿌리깊은 문화재를 새롭게 해석할 능력은 아직 부족합니다만, 배우는 만큼 더 다가갈 수 있겠죠......
봄비가 계속내렸던 4월25일 탑골의 옥룡암을 다녀왔습니다.
조그만한 계곡으로 흐르는 물이 많아지고, 눈부신 신록과 함께 어울려 더 더욱 아름다운 곳이더군요.....
꽃이 지는 모습을 홀가로 담았습니다.







인용:
강태훈 님께서 작성하신 글
이 글은 원래 최흥태님의 글에 댓글로 올려야 할 성질의 것이나
내용이 많아 따로 올리게 되었습니다.


전근으로 경주를 떠난지 2달밖에 되지 않으나
벌써 경주는 오랫동안 가보지 못한 고향같이 느껴집니다.

최홍태님의 사진을 보니
"문화재 사진을 찍는 것은 그 유물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라고 한
어느 분의 말씀이 피부에 와 닿는군요.

* 최흥태님이 찍은 사진 중 귀부는 숭복사지에서 가져온 귀부(경주국립박물관입구쪽 오른쪽 정원에 전시되어 있는 것)를 찍은 것으로 보입니다.


아래 글은 괘릉과 숭복사지 귀부에 관하여 정리를 해 본 것인데 참고가 될 듯하여 감히 올려봅니다(원래 작성한 글에는 주석이 있으나 너무 장황한 듯하여 뺐습니다).


[괘릉]

1. 괘릉에 관한 첫 기억

내는 초등학교 1학년 시절 경주에 수학여행을 갔던 삼촌이 경주안내책자 한 권을 사왔다. 삼촌은 그 책(가로로 긴 종이를 자르지 않고 연이어 인쇄를 하여 한쪽 면을 읽은 다음 그 면은 접고 다음 면을 펼쳐서 읽도록 만들어져 있었다)을 쭈욱 펼쳐 놓고 나와 동생(그 당시 여섯 살이었다)에게 불국사, 석굴암, 첨성대, 에밀레종 등에 관하여 거짓말을 조금 보태서, 예를 들면 첨성대 속에 들어가 창으로 하늘을 보면 낮에도 별이 보인다느니 하는 식으로 이야기를 해주었다. 우리는 그 설명이 재미있어 수시로 경주이야기를 해달라고 하였고 삼촌도 귀찮아하지 않고 같은 내용을 여러 번 반복해 주었다. 삼촌이 서울로 유학을 간 후에도 우리는 그 책을 마치 어코디언 처럼 접었다 폈다 하면서 장난감으로 가지고 놀았다. 그러는 사이에 한글도 깨우쳐 해설을 읽어보게 되었는데 거기에 괘릉은 누구의 능인지 모른다고 쓰여 있었다. 나는 임금의 능이라면서 그 왕이 누군지도 모른다는 것은 이상하다고 여겨졌고 그 때문에 능의 이름도 괴릉(괴상한 능)이라고 지은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 때문에 그 이후 상당히 오랫동안 괘릉을 괴릉으로 잘못 알고 있었다.


2. 괘릉(원성왕릉) 가는길

괘릉은 불국사역 삼거리에서 울산 방면으로, 그러니까 박물관 앞에서 우회전 하여 7번 국도로 울산 방면으로 계속 가다가 위 역 삼거리(박물관 앞에서 불국사역 삼거리까지는 대략 9.1㎞ 정도 된다)를 지나 2.8㎞ 가량 더 직진하면 괘릉의 표지판이 나오는데 그 곳에서 좌회전하여 소나무들이 양쪽에서 시립(侍立)하고 있는 길을 따라 600m 가량 진행하면 도착할 수 있다. (박물관 앞에서부터 괘릉 까지는 대략 12.5㎞ 가량 된다.)


3. 괘릉

이 능은 신라 제38대 원성왕(재위기간 785년부터 798년까지)의 능으로 추정되는 이 왕릉은 괘릉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괘릉(掛陵)이란 이 곳에 왕릉이 조성되기 이전에 작은 연못이 있었는데 그 곳을 메우고 왕릉을 마련하였는데 왕릉의 내부인 현실(玄室)에 물이 고이기 때문에 바닥에 관(棺)을 놓지 못하고 허공에 걸어 놓았다고 하는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괘릉의 외형은 원형봉토분으로 지름은 23m, 높이는 6m 가량 된다. 봉분의 봉토를 보호하기 위하여 호석이 설치되어 있는데 호석은 목조건축의 석조기단과 같은 지대석 위에 높이 95㎝, 길이 120㎝ 정도 되는 면석을 붙이고 그 위에 갑석을 올렸다. 각 면석 사이에는 봉분 내부로 뿌리가 길게 뻗어 면석과 봉토가 붕괴되지 않도록 지탱해 주는 '탱석'을 배치하였는데 탱석의 앞면은 면석 보다 앞으로 다소 나와 있고 탱석에는 두 칸 걸러 하나씩 무관의 복장을 한 십이지상이 조각되어 있다. 왕릉의 주위에는 부채꼴로 생긴 판석을 깐 회랑이 있고 회랑 둘레에는 높이 170㎝ 가량 되는 돌기둥 42개을 세워 난간을 돌렸다. 돌기둥 사이에 2줄로 끼웠던 돌은 대부분 사라졌고 현재에 있는 것들은 새로 보충한 것이다. 봉분 바로 앞에는 안상문(眼像文)이 새겨진 석상(石床, 魂遊石)을 남쪽에서 동쪽으로 약간 치우치게 설치하였다. 봉분을 기준으로 남쪽으로 약 80m 떨어진 지점으로부터 동서로 25m 간격을 두고 봉분 쪽에서부터 돌사자 2쌍, 문인석 1쌍, 무인석 1쌍, 화표석(華表石) 1쌍을 좌우대칭으로 배치하였다.
통일신라시대의 완비된 능묘제도의 대표적인 이 능은 서역사람의 얼굴모습을 한 무인석에서 볼 수 있듯이 당나라와 활발한 문물교류를 통하여 당나라의 능묘제도를 받아들인 것이지만 탱석에 조각된 십이지상은 신라인의 창안이며 능에 있는 각종 석조물에서 볼 수 있는 힘찬 조각수법은 당시 신라문화의 독창성과 우수한 예술감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여기의 12지상은 정교한 세부적 표현보다는 단순하고 중후한 양식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양식은 9세기부터 보이는 불상의 괴체적(塊體的)인 처리, 둔중한 모델링, 정교성의 결핍, 약동적인 정신성의 결핍 등을 반영한 것이라 생각된다. 무복의 형식에서는 허리띠의 천의가 양발 옆으로 조용히 흘러내려 좌우로 벌리되 과장은 없으며 몌(袂)의 긴소매는 유연한 곡선을 이루며 흘러내려 끝이 말리고 있어서 성덕왕릉의 경직된 긴소매와 비교하면 꽤 장식적으로 변화하고 있다 할 수 있으나 흥덕왕릉의 십이지상에 비해서는 그 장식의 정도가 약하다.
일반적으로 무인석이라고 불리는 석상은 키가 2.4m 가량 되는데 부리부리한 눈, 우뚝한 코, 눈, 덥수룩한 구렛나루를 한 서역인의 모습으로 근육이 툭툭 불거진 굵은 팔뚝, 한속에는 가시몽둥이를 집고 다른 손은 주먹을 불끈 쥐고 들어 올린 모습이다. 머리에는 터반을 쓴 듯하고 갑옷이 아니라 장식이 없는 부드러운 옷을 걸치고 있다. 이 주인공에 대하여는 페르시아인, 아리아인, 이란인 등 추측이 다양하고 주인공의 성격에 대하여도 무인상, 객사상, 병사상 등 여러 가지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그 뒷 모습을 보면 직경 10㎝ 정도되는 주머니를 차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 주머니에 대하여도 우리 고유의 복주머니라고 하기도 하고, 호인(胡人)들이 당나라 장안에 머물면서 주판 같은 것을 넣고 다니던 산낭(算囊)이라고도 한다.
그 다음에 서 있는 석상에 대하여도 종래에는 문인석 또는 신라인으로 이해하였으나 최근 다른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즉 앞에서 보면 문복을 착용한 듯 하나 옷 속에는 칼을 양손으로 움켜쥐고 있는 듯하고(옷소매 아래에 나와 있는 것이 칼로 보인다) 특히 뒷면에는 양당개라고 하는 갑옷을 입고 있는 모습이 확인되고 있는데 신라시대에는 문관과 무관의 구별이 없었다는 점 등을 근거로 위 석상을 문인석이라고 단정하기 어려우며 조각에 악센트를 준 짙은 눈썹이나 두 귀밑에서 턱 전체에 가지런히 빗겨진 턱수염을 고려할 때 신라인으로 보기 어렵다는 점 등을 논거로 위 석상은 위구르인이라는 것이다. 어쨌든 그 석상은 팔자 콧수염, 짧은 구렛나루, 가늘게 치켜 뜬 눈을 하고 사람을 쏘아보는 듯 한 표정을 짓고 있거나 (서쪽 문인석) 같은 모습이면서도 덤덤한 표정으로 능에 들어오는 사람을 보고 있는 듯 하다(동쪽 문인석). 더욱이 문인석이나 무인석의 눈에는 조그만 동공까지 뚫어 놓아 더욱 생생한 느낌을 준다.
그러면 왜 신라왕의 능묘에 신라인이 아닌 외국인의 모습을 배치하였는가에 관하여 김원룡 박사는 그당시 신라인들은 당의 능묘제도를 숙지하고 있어 능 앞에 문무인석과 객사를 도열시킬 필요성을 느꼈을 것이나 그 당시 당과 대등한 관계에 있지 못하였던 점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욕구는 당연히 당의 제도의 축소 또는 자숙의 형태로 표현될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고 한다.
이 능에 있는 사자 네 마리는 성덕왕릉이나 흥덕왕릉의 것과는 달리 능 주위 네 귀퉁이에 있지 않고 능 앞쪽에 배치되어 있는데 그 대신 얼굴들은 모두 동서남북을 보고 있다. 사자들의 자세도 동적인데 그 중에서 서쪽 문인석 바로 옆에 있는 사자는 몸은 동쪽을 향해 있으면서도 고개를 남쪽으로 돌려 능을 찾는 사람을 보고 웃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특히 동쪽의 능 가까이 있는 사자는 나무 뒤에서 왼쪽 앞발을 슬며시 들고는 이빨을 드러내고 웃는 표정이어서 볼수록 재미가 있다.

4. 괘릉은 누구의 능인가 ?

괘릉이란 이름으로 역사서에 처음 기록된 것은 1669년 간행된 경주의 향토사를 적은「동경잡기」인데 이 책에서는 괘릉이 누구의 능인지 모른다고 하였다. 그런데 조선후기 어느 시기부터 문무왕릉이라고 전해져 왔다. 일제때 『朝鮮の風水』를 쓴 村山智順과 『朝鮮美術史』를 쓴 關野貞이 그러한 견해를 받아 들여 그들의 저서에 문무왕릉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今西龍은 신라의 동곡사{삼국유사에는 원성왕릉이 토함산 서쪽 동곡사(洞鵠寺)에 있다고 기재되어 있다}이며 고려시대 숭복사가 괘릉부근에 있다면 괘릉은 원성왕릉일 것이라고 추정하였었다. 해방후 정인보가 괘릉이 문무왕릉이 아니라 원성왕릉이라는 것을 여러 문헌기록을 통하여 고증하였고 이후 삼산오악조사단에 의하여 원성왕릉설이 강력히 뒷받침되었고 그 이후 여러 학자들에 의하여 정설로 굳어졌다.

원성왕은 내물왕의 12대손으로 이름은 경신이다. 혜공왕 말기에 이찬 지정이 친위혁명을 일으키자 상대등 김양상이 반혁명을 일으켜 지정과 싸우게 되었는데 경신은 이때 양상을 도와 지정을 무너뜨렸다. 그 덕분에 김양상(선덕왕)이 왕위에 오른뒤 상대등이 되었고 선덕왕이 죽자 신하들의 추대로 왕위에 오르는데 삼국유사에는 다음과 같은 꿈 이야기가 적혀 있다.

이찬 김주원이 수석 재상을 있을 때 경신은 각간의 지위로 그의 차석자리에 있었다. 경신은 꿈에 머리에 썼던 복두(*두건의 일종)를 벗고 흰 삿갓을 쓰고 가야금을 잡고 천관사 우물 속으로 들어갔다. 꿈에서 깨어나 점쟁이를 시켜 해몽을 하게 하였더니 "복두를 벗는 것은 관직에서 쫒겨 날 조짐이요, 가야금을 잡는 것은 칼을 쓸 조짐이요, 우물에 들어가는 것은 옥에 들어 갈 조짐이외다"라고 하였다. 경신은 이 말을 듣고 매우 걱정하여 문을 잠그고 출입을 하지 않았다. 경신은 집을 찾아온 아찬 여삼(餘三)에게 해몽한 이야기를 이야기 하였더니 여삼은 절을 하고 말하기를 "두건을 벗는 것은 자기 윗자리에 사람이 없다는 뜻이요, 흰 삿갓을 썼다는 것은 면류관을 쓸 조짐이요, 가야금을 들었다는 것은 12대 손자에게 왕위를 전한다는 조짐이요, 천관사 우물에 들어간다는 것은 궁궐에 들어 갈 조짐이외다."라고 하였다. 경신이 말하기를 "내 윗자리에 주원이 있는데 어떻게 윗자리를 차지할 것인가?"하니 아찬은 "청컨대, 몰래 북천(北川)신에게 제사를 지내면 될 것입니다."라고 하여 경신은 그대로 하였다. 얼마 후 선덕왕이 죽자 나라 사라들은 김주원을 왕으로 삼으려 하였으나 김갑자기 폭우로 시냇물이 불어 건널 수 없었다. 그래서 경신이 먼저 궁궐로 들어가 즉위하 자 대신들은 모두 따라와서 새로 즉위한 임금에게 절을 하고 축하해 주었다. 경신이 왕에 등극하였을 때는 여산이 이미 죽은지라 그의 자손들에게 작위를 내렸다.

선덕왕이 죽은 후 신하들이 원래 왕으로 추대하려고 한 인물은 선덕왕의 조카뻘 되는 김주원이었다. 당시 주원은 서라벌 도성에서 북쪽으로 20리 떨어진 곳에 살고 있었는데 때마침 내린 폭우로 알천을 건널 수 없었다. 그 사이에 상대등 경신의 측근들이 "임금이란 중책은 사람이 마음대로 정하는 것이 아닌데 폭우가 내리는 것을 보니 하늘이 김주원을 왕으로 세우는 것을 원하지 않는 것이 아닌가 ? 상대등 경신은 전 임금의 아우로서 덕망이 높고 임금의 체통도 가졌으니 능히 왕으로 추대할 만하다"고 주장하여 조정의 분위기를 장악하여 경신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비가 그쳐 알천물이 줄어든 후 주원은 그 소식을 듣고 통탄하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폭우 덕에 왕위에 오른 원성왕의 치세는 순탄하지 않았다. 거의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가뭄이 들었기 때문이다. 가뭄은 자연스럽게 메뚜기떼의 창궐로 이어지고 그것은 또다시 흉년을 이어져 백성들이 기근에 허덕이는 사태로 확대되고 유랑민과 도적떼가 늘어나 국정을 흔들어 놓았다. 그 난국을 틈타 791년에는 이찬 제공이 역모를 획책하기도 하였다. 역모는 중간에 발각되어 실패로 돌아갔으나 이를 계기로 국정을 더욱 혼란으로 치달았다. 게다가 원성왕은 자식복도 없었다. 태자로 세웠던 큰아들 인겸이 791년에 병으로 죽고 둘째 아들 헌평을 태자로 세웠더니 그도 794년에 죽어버렸다. 원성왕은 끊임없이 지속되는 천재와 조정의 혼란 속에서도 확실한 업적 하나를 남겼다. 재위 4년에 처음으로 독서삼품과를 설치하여 학문의 깊이와 능력에 따라 벼슬을 내리는 조치를 취하였다. 춘추좌씨전, 예기, 문선을 읽어서 능히 그 뜻을 알고 아울러 논어와 효경에 밝은 사람을 상등으로, 곡례, 논어, 효경을 읽고 해석하는 사람을 중등으로, 곡례와 효경에만 지식이 있는 자를 하등으로 하였다. 이 정책이 시행되기 전에는 궁술과 인물만 가지고 관리를 뽑았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독서삼품과에서 관리를 뽑는 것은 획기적이라 아니할 수 없지만 골품제의 폐쇄성과 도당유학열(渡唐留學熱)의 고조로 인하여 소기의 성과를 거주지는 못하였다. 원성왕은 재위 14년인 798년에 죽었다.



[숭복사지 귀부]

이 숭복사지에 있던 귀부는 현재는 경주국립박물관 입구쪽 오른쪽 정원에 전시되어 있다. 경주지역에는 숭복사지의 귀부처럼 하나의 대석 위에 머리가 두 개를 조각한 귀부가 여럿 있다. 그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은 무장사지 아미타조상사적비를 받치고 있던 것으로 애장왕 1년(802년)에 조성된 것이고 그 다음에 조성된 것이 바로 숭복사지 귀부인데 진성여왕 10년(896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경주남산 창림사지 귀부는 그것이 조성된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발견된 석탑지의 조성연대로 미루어 문성왕(839∼857년)의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승복사 귀부는 두 마리의 거북이를 한 개의 대석 위에 설치하였으며 그 거북이 등에는 직사각형으로 된 하나의 비좌(碑座, 비신이 놓이는 자리)를 조성하였다. 거북이 머리는 약간 비스듬히 직립의 형태로 표현하였는데 입 부분의 약간의 손상을 제외하고는 거의 완전한 모습이다. 또한 눈은 툭 불거진 형태로 되어 있어 용의 머리 모습으로 변해 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양 턱의 볼 수염이 옆을 타고 귀밑까지 뒤로 날리는 형상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짤막한 목 부분은 앞으로 불쑥 내밀고 있는 듯하고 그 목 부분에는 일련의 방울일 섬세하게 나타내고 있다. 거북이 등에 설치되어 있는 비좌 주변은 그 윗부분은 연꽃무늬이고 아랫부분은 변형된 구름무늬인 점이 특이하다. 여기 세워진 비석은 최치원이 지은 숭복사비로 그 파편이 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두 거북이의 각 오른쪽 발가락은 4개의 발톱을 조각하였고 왼쪽 발과 달리 살짝 발가락을 들고 있는 모습도 다른 귀부에서는 볼 수 없는 점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정교하기는 하나 지나치게 기교를 많이 부려 힘이 빠져 있는 느낌을 준다.

하석준님의 댓글

하석준

옥룡암의 부처님에대한 보수작업은 완료되었던지요.
1년전쯤 마지막으로 갔을 때에는 공사를 위한 준비작업중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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