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香油(향유)고래가 사라져 버린 구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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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김명기
  • 작성일 : 08-09-11 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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香油(향유)고래가 사라져 버린 구멍



낙엽이 비에 젖어 파충류처럼 번들거리는 모습을 보며 잠깐 숲을 걸었습니다. 밤송이의 잔해들이 어지러운 것을 보면, 이상한 날씨이기는 해도 계절은 이미 착실한 가을입니다. 이곳 서식지의 숲에는 은행나무가 별로 없습니다. 아마 지금쯤 서울의 이곳저곳은 은행나무가 온통 비에 젖은 鋪道(포도)를 샛노랗게 물들이고 있지 않을까? 슬며시 궁금해집니다. 벌써 2주일 째 서식지의 측백나무 숲을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어쩌면 나무늘보가 되어 가거나, 새로운 종의 변변치 않게 낡은 나무 한 그루로 변신하여 가는 중인지도 모릅니다. 누구도 "어? 어쩐지 점점 나무가 되어 가는 것 같은데?" 라는 말을 하여줄 사람이 없으므로 더욱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어쨌거나 나는 자신을 잘 돌아보지 않으니까요.

어제 내린 비는 귀가 멍멍할 정도로 온통 세상을 메웠습니다. 하루종일 일정한 소리가 가슴에 고여드는 것은 '고장났나?' 하고 한번씩 전화기를 들어 볼 정도로 고요가 언제까지고 계속되는 진공상태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비가 나뭇잎을 적시는 소리 이외엔 어떤 소리도 들려 오지 않습니다. 까치도 복실이도 모두 비오는 날에는 발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다니는 모양입니다. '이런 고적한 동네에는 도저히 못살겠다'고 소리들이 봇짐을 싸서 이사를 가는 상상을 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Saltacello의 Something's coming을 종일 반복하여 들었습니다. 누구도 다가오지 않았고, 빗소리에는 역부족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달리 방법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다시 오늘입니다. 검은 숲의 조밀한 나뭇가지를 뚫고 거실에까지 햇살을 찔러 넣습니다.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 새가 잡고있던 가지를 놓고 하늘로 날아오르는 소리, 밤송이가 떨어져 낙엽 위로 구르는 소리, 바람이 창을 흔드는 소리가 몇 배나 커졌습니다. 정적 속에 놓여져 있던 귀는 아무래도 지나치게 예민한 모양입니다.



문득 삼청동의 그 노란 은행나무길이 생각났습니다. 언제나 그 길의 어귀쯤에 차를 세워두고 함께 부드럽게 구부러진 길을 따라 걸었습니다. 바람이 불면 은행나무 잎이 거리를 쓸고 지나갔고, 당신은 그럴 때마다 조금 더 깊숙이 내게 기대어 왔었습니다. 발아래 바스락거리면서 밟히는 낙엽을 바라보며, 당신은 말했었습니다. "언제까지라도 당신과 이곳을 걸었으면 좋겠어요." 그 말은 영원할 수는 없다는 일종의 暗示(암시)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때 나는 알지 못하였습니다. 말을 마친 당신이 강한 흡인력으로 나를 안았고, 지나가던 사람들의 흘깃거리며 웃을 때 나는 아무 것도 몰랐습니다. 사랑에 빠진 사내를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겠지요. 그래서 사랑을 잃은 사내를 구제할 수 있는 것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저 턱으로 당신의 하얀 정수리를 툭툭 치며 "이.상.한. 소.리. 좀. 그.만.하.라.구. 어.디. 멀.리. 가.기.라.도. 하.는.거.야?"라고 장난처럼 말하였을 뿐입니다. 군밤 냄새가 어디선가 다가와 코끝에 걸립니다.



어제 밤에는 두텁게 깔린 구름 사이로 빠르게 지나는 달님이 하도 예뻐서, 한 동안 테라스에 멈추어 서서 바라보았습니다. 숲과, 구름과, 경사진 통나무집의 지붕과, 조그만 외등과 그리고 언제까지고 제 자리에 머무른 달님이었습니다. "나 요즘 소원을 많이 빌어요. ", "그래? 무슨 소원?", "그냥...", "말해봐.", "그냥 언제까지고 이렇게 달을 함께 바라볼 수 있었으면 하는 그런 것들이에요.", "에이 시시하다. 그게 다야?", "네... 시시하지요? 하지만 이런 시시한 것들이 내 인생에서 사라진다면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을 것만 같아요. 언제까지고 내 곁에 있어 주실거지요?", "그러지 뭐."

바람이 친절할 만큼만 불어, 당신의 향기가 동그랗게 우리를 감싸고 있었던 그 밤이 기억납니다. 당신을 사랑하였던 시간은 어쩌면 하늘을 나르는 향유고래를 매일 바라보는 일 같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신기하고, 황홀하고, 가슴 벅찬 기쁨의 나날이었고, 매일 같이 파란 하늘 가득 제자리에 떠 있는 고래를 바라보는 넉넉한 일상이 되어 버린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언젠가 고래가 갑자기 사라진 그 자리만큼 커다란 구멍이 뚫린 가슴에서, 얼굴을 돌릴 정도로 차가운 바람이 새어 나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처럼 비현실적인 이야기일 것입니다. 이따금, '정말 당신이 내 인생에 정말로 실재했었나? '따위가 문득 궁금할 때에 더욱 그렇습니다.



세계가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못 하고 일주일의 정상에서 딱 멎어 버린 듯한 수요일 저녁이면, 늘 우리는 와인을 조금씩 마셨던 기억입니다. 길리 쯤에서 라비올리 정도의 가벼운 식사와 몇 잔의 와인을 마시고 돌아오는 늦은 저녁이 많았습니다. 헤드라이트 불빛이 천천히 오른쪽으로 벽을 밝히다가 엔진 소리가 멈추고, 금새 귀뚜라미 소리가 맑게 울립니다. "석 잔이나 마셨지? 거봐, 당신은 와인한텐 못 당한다니까." 차가 멈추면, 와인킬러라고 별명을 붙였던 당신은 조금 붉게 상기된 얼굴로 천천히 나의 입술을 찾곤 했었습니다. "엇! 누구 오잖아?", "괜찮아요. 이대로 가만히 있어요." 운전석에서 시트를 젖히고 누운 채 서로의 입술을 가볍게 물고 숨을 죽이고 있으면, 누구인지 알지 못할 사람이 또각, 또각 발소리만으로 다가 왔다가 멀어졌습니다. 세상은 우리와 완전하게 떨어져 있었고, 우리는 깊은 숲 속에 처음 피어오른 아카시아 꽃을 발견한 새끼 벌처럼 행복했습니다. 크지 않은 은행나무 두 그루가 가로등에 반사되어 까만 하늘 위에서 노랗게 빛나고 있었고, 영원히 세상과 그 정도만 떨어져 있기를 소망했습니다.



그 그림엽서 같은 작은 주차장을 바라보며 당신의 방 창가에서 의자에 앉은 나는, 당신을 뒤로 안고 긴 머리를 틀어 올린 당신의 어둠 속에서도 투명하게 빛나는 목덜미에 코를 바싹대고 있었습니다. 밤은 Aqua blue로 깊어지고 달빛을 받은 당신의 목도 파랗게 물들어 있습니다. 어깨를 감아 쥔 당신의 손이 제법 단단하게 나를 감싸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당신 힘센걸?", "그래요 그러니 쉽게 나를 떨구어 놓은 생각은 꿈도 꾸지 마세요." 지금은 그 오래 전의 밤과 동일한 깊이의 가을입니다. 오늘밤엔 하늘이 더 맑아지고, 별들도 말끔하게 초롱거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함께 길을 걷고, 식사를 하고, 와인 잔을 부딪치고, 키스를 하던 그 시시한 일상은 오늘밤 더 많이 공허할 것입니다.

새벽녘, 창 틈으로 들어온 바람이 상당히 차갑습니다. 일교차가 많이 나는 것 같습니다. 겨울이나 여름은 늘 일정한 온도와 비슷한 하루를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을이나 봄은 상당한 일교차와 함께 이제 항온과 등온으로부터, 일종의 恒常性(항상성)으로부터 이별해야 할 때입니다. 나도 모르게 스산해 지는 것은 어쩔 수 없습니다. 하여 이 어수선한 때에 이별을 한다는 것은 견디기가 더욱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어느 것 하나 머물러 있는 것은 없습니다. 떠나가고 사라지고 지워집니다. 변화가 심해지는 시간 속에, 가장 일상적으로 늘 함께 하던 따듯한 사람까지 만날 수 없는 다른 시간 속으로 떠나보낸다는 것은, 아무래도 변화치고는 지독한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나 이별, 봄이나 가을은 우리에게 옷깃을 여미게 하고 무엇인가를 준비하게 합니다. 대개는 쓸쓸한 것들입니다. 그 변화의 水位(수위) 차로 우리는 행복이나 불행을 맛보며 사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다가올 언젠가, 당신이 우리 둘에게 함께 익숙한 거리를 지나고, 그곳에 노란 은행나무 낙엽이 아무리 수북하게 쌓였다고 해도 아무 것도 떠올리지 못한다면, 당신은 이미 모든 것을 잊고 행복한 여인이 되어 있는 것이겠지요. 그러고 보니 삼청동 거리를 걸으며 지나치게 쓸쓸해 할 것이, 어쩐지 나뿐일 것 같아서 15배쯤 더 고독한 가을입니다. 아무래도 향유고래가 사라져 버린 그 커다란 구멍으로 또 다른 가을이 다가오는 것인가 봅니다. 몇 번째인가를 세어보는 것도 어쩌면 시시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갈구하였고, 결국은 머리 위에서 파랗게 빛나던 고래와 함께 떠나보낸 그 시시하지만 눈물 나도록 안타까운 일상들이요...



측백나무 숲을 따라간 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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