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 걸고 찍은 사진
페이지 정보
- 작성자 : 심규태(2)
- 작성일 : 08-09-05 13:37
관련링크
본문
점심 드시고 나른하실까봐 여행 이야기 좀 해드릴게요.
다들 아시겠지만, 디지털 카메라를 접하기 쉽지 않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첫 아이를 낳고, 아이한테만은 어린 시절 앨범을 좀 제대로 만들어서 평생의 추억으로 남겨주고 싶어서 큰맘먹고 그당시 최신 DSLR인 D70과 렌즈를 10원한장 깎지도 못하고 구입했습니다.
그해 여름, 운좋게 샌프란시스코와 LA를 보름 정도 구경하고 왔습니다. 대학원 연수로 다녀오는 거라 숙식도 다 해결되고, 가이드도 있다기에 돈은 한 50달러 챙겨갔습니다.
관련기관도 돌아보고, 이곳저곳 구경하면서 신나게 샌프란시스코 일정을 끝내고, LA로 왔는데, 아뿔사. 자유시간이 있지 뭡니까.
그 위험하다는 미국 밤거리;;도 돌아봤겠다, 무엇이 두렵겠냐 싶어 아침도 거르고 호텔 로비에서 지도 하나를 얻어 LA를 헤메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디즈니랜드 가서 아이 선물을 사고 싶었는데, 50달러로는 디즈니랜드 매표소 구경 밖에 못하겠더군요.
비버리힐즈쪽은 가이드가 '나중에 구경시켜 준다'기에, 나름대로 '오전에는 걸어서 동쪽으로 갔다가, 점심 먹고는 버스를 타고 해변 구경을 해야겠다' 싶어 호텔 앞에서 해가 있는 쪽을 향해 무작정 걸었습니다.
카메라를 들고 보이는 것마다 찍으면서 가니 힘들지도 않더군요. 큰 수퍼에서 아이 줄 64색 크레욜라 색연필을 단돈 2달러에 사기도 했습니다.
사람은 하나도 없는 철조망만 쳐진 길을 지나기도 하고, 무슨 호수공원도 지나고, 또 한참 걷다가 큰 고속도로를 가로질러 가니 드디어!! 빌딩들이 나타났습니다.
거기가 메인 스트리트였나.. 기억은 안나는데, 꼭 우리나라 동대문 시장처럼 사람도 바글바글하고 장사 하는 곳도 많더군요.
거기서 만족하고 돌아왔어야 했는데, '기왕 온거 더 가보자' 싶어 계속 걸었습니다.
다시 인적이 드물어지는데, 이상하게도 동네가 시커매진다는 생각이 들 때쯤엔 흑인 동네 한가운데였습니다. 올림픽 blvd. 라는 표지판은 봤는데, 정말 흑인들밖에 없더군요.
'아차' 싶어 신호등에서 길을 건너 돌아오려는데, 이미 사람들은 저를 그리 반갑지만은 않은 시선으로 보고 있고, 급기야는 웬 흑인 여성 한분이 말을 걸더군요. 너 누구냐, 왜 왔냐, 사진은 왜 찍냐. 등등.
정말 무서웠습니다. 처음 가 본 동네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이 우루루 몰려들고, 말도 안통하는데 기분이 어땠겠습니까.
그 와중에 신호등도 못 건너고, 신호등 건너려고 기다리던 사람들도 몰려들더군요.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손짓발짓으로 나쁜 사람이 아닌 것을 알리고, 평생 미국에 못와볼 제 친구들을 위해 사진을 구경시켜 주려고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분위기가 안좋아서, 찍은 걸 보여주면 총은 안쏘겠지 싶어 액정으로 찍은 사진을 확인시켜 줬더니..
난리가 났습니다. "오마이갓" "깟뎀" 하면서 사람들이 모여 제 사진기를 구경하는 겁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양반들도 그냥 신기해서 본 것일 뿐인데, 어떻게든 벗어나야겠다는 생각밖에 안들어서 '빠떼리, 노 빠떼리' 하면서 '전지가 떨어졌다'고 하고 신호등을 건넜는데, 웬 흑인이 길거리에서 머리를 말고 있었습니다.
손이 덜덜거렸지만 덜덜거리는 마음으로 허락을 얻고(카메라를 들면서 '아유오케이' 했습니다) 몇장 찍고 잘나왔다고 사진을 보여주니 좋아하더군요. 물론 그 와중에도 사람들이 구경하는 건 똑같았습니다.
공포심에 정신을 잃어갈 때 쯤, 한 아저씨가 오시더니 '어디 가냐'고 하는 겁니다. 손가락으로 저쪽이요 했더니, 혼자 가면 위험하니 자기가 데려다 준답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킹 오브 할렘'이며, 친구도 많고, 자기는 미국이 싫다는 둥.. 막 그런 얘기를 하면서 빌딩이 많은 그 동네까지 데려다 주더군요.
희안하게, '킹 오브 할렘'과 헤어지고 나니, 시야가 90mm에서 28mm 화각 정도로 트이고,가슴이 막 벅차오르면서 용기가 생기더군요. 사람들한테 말도 걸어 보고, 급기야는 가게에 들어가 물건을 구경하고, 15달러 부르는 가방과 지갑 세트를 10달러에 깎아 사 오는 쾌거도 이룩했습니다.
아침도 거르고, 점심도 거르고, 중간에 호수공원에서 1달러 하는 오렌지맛 음료수를 하나 사먹고 숙소로 돌아와서, 버스 타고 산타모니카(쌔너마니카라고 하더군요, 그사람들은) 해변도 보고 왔습니다. 저녁은 교수님이 주신 10달러로, 햄버거 사먹었습니다.
나중에 일행들에게 물어보니, 친척을 만나고 온 사람도 있고, 디즈니랜드에 다녀온 사람도 있더군요. 나름 제가 가장 다이나믹한 하루를 보낸 것 같아 뿌듯했습니다^^
그럼, 목숨 걸고 찍은 사진 몇 장 보여드립니다. 무조건 감도 1600에 최대개방으로만 찍던 시절이라 사진은 별로입니다.
도무지 표정을 알 수 없었던, 머리 하던 청년과,
나름 생명의 은인인, '킹 오브 할렘',
그리고, 15달러 하는 가방을 10달러로 깎아주는 인심 좋은 멕시코 아저씨.
마지막으로, 지금도 마음에 새기며 살고 있는 'Resistance is Defence in Action.'이란 글귀입니다.
몇년이 지난 지금도, 그때 생각을 하면 웃음이 납니다. 그리고, 길을 잃은 것 같은 사람을 보면 꼭 지나치지 못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오늘 오후도 즐겁게 보내시고, 보람찬 주말 보내십시오^^
댓글목록
안승국님의 댓글

저도 일본에서 밤길을 무작정 걷다가 길을읽고 밤새 해맨 기억이 있읍니다....동감이 가면서 재미있게 읽었읍니다..
채지현님의 댓글

핫~! 현지 사람들도 안 가는 곳을 그것도 걸어서... 장하시네요... ^^ 어릴적을 LA에서 보냈어도 한번도 못 가 본 곳인데요... West LA로 가셨던 모양이네요... 올림픽 불레바드 반대쪽으로 걸으셨다면 한인타운이었을텐데... 오히려 일생에 남으실 멋진 사진을 건지신 것 같습니다.
이현주님의 댓글

중간에 공포로 정신을 잃어가시던 부분부터 킹오브 할렘의 세례로 용기 백배를 얻으신 부분까지
너무 재미있어서 ㅋㅋ 웃으면서 읽었습니다.
저도 동네, 골목 사진을 매우 좋아해서, 어디로 출장을 가든지, 가장 사람 냄새 날 듯 한 골목으로
무조건 들어가는 버릇이 있습니다.
간혹은 공포스럽게 느껴지는 상황도 있었지만, 무리한 행동을 하지 않았을때... 그리고 먼저
편견없이 호의를 표현했을때... 늘 좋은 사진을 찍고, 주민들과 뜻 깊은 소통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경험은 많은 성장을 주는 것 같습니다.
위의 멋진 사진들보다, 두번째 가셨을때는 훨씬 더 좋은 사진을 만드실 수 있을꺼예요.^^
재밌는 글 감사히 읽었습니다.
조현갑님의 댓글

허허허.........좋은 경험을 하셨군요!
저는 인도의 켈커타에서 여권과 돈 카메라 모두 호텔침대 메트리스
속에 넣어두고 혼자서 불가촉천민이 사는 동네에 들어갔다가 살아나온게
지금생각해도 조상님이 돌보아주신것 같습니다.
언어로서 표현하기힘든 장면과 살벌한 분위기는 정말 지금생각해도
소름이 오싹하는군요!!! 인간이 사는곳이 결코아니더군요.
지옥중에 지옥인줄 알았습니다.
좋은 경험 하셨습니다!
이_동규님의 댓글

너무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_____^
15달러 부르는 가방과 지갑 세트를 10달러에 깎아 사 오는 쾌거를 이룩하셨다는 부분에서
웃음이 폭발했어요~ 멕시코 아저씨의 표정이 오버랩되면서요 ^^
여영기님의 댓글

아.. 재밌습니다..ㅋㅋ 나중에 저랑 같이 한번 가시죠...
저도 예전에 기숙사에 저랑 같이 방쓰던 흑인친구가 자기 친구들 다섯명을 끌고 들어온적이 있었습니다. 순간 방에서 도망칠까 망설였지만 쪽팔려서 그러진 못하고 .. 속은 엄청 쫄았지만 절대 쫄지 않은 표정과 행동으로 그들을 제 방에 맞이 했었던기억이 납니다.. 근대 몇분후에 급 친해져서 같이 놀았던기억이 나네요... 갑자기 보고싶네여 그자식들..ㅎㅎ
강웅천님의 댓글

그네들 생각보다 순박하고 좋은 사람도 많습니다.
제가 사는 동네도 할렘이 있고,
6개월 남짓 그들과 함께 지낼 일이 있어서 주말마다 찾아갔었는데
단 한번도 무례하게 행동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마도 자신들을 보호하려는 행동이 타인에게는 위협이 되었을 터 입니다.
특히나 카메라를 들고 다니며 찍는 것에 대해 유독 예민합니다. ^ ^
글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오윤석님의 댓글

허... 여행을 혼자 가면 격기 쉬울 수 있는 일화군요
무사히 잘 다녀 오셔서 다행입니다
이재유님의 댓글

예전에 있었던 일이 기억납니다. KTkim님과 장재민님이 함께 할렘에 가셨을때 마약상에게 카메라를 들이댔들때가..... 상당히 긴장했죠... 몸에 구멍뚤리고 그비싼 라이카 다뺐겨도 할말없는 상황...
이메일무단수집거부
이메일주소 무단수집을 거부합니다.
본 웹사이트에 게시된 이메일 주소가 전자우편 수집 프로그램이나 그 밖의 기술적 장치를 이용하여 무단으로 수집되는 것을 거부하며, 이를 위반시 정보통신망법에 의해 형사 처벌됨을 유념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