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통신 XIX (존재의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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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 김명기
- 작성일 : 08-08-07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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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통신 XIX (존재의 이유)

첫 번째 소식 - 한 달 후의 농촌?
네?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한 달여 만에 말 먹일 건초를 사려고 전화를 걸었다가 그만 깜짝 놀랐다. 말건초 알팔파가 38만원에서 58만원으로 오른 것이다. 152% 상승. 직원은 친절하게도 묻지도 않은 것 까지 대답해 준다.
9천6백 원 하던 소 사료는 한포에 몇 천 원씩 올라서 만 몇 천 원씩이구요. 9월 중에는 2천 원정도 씩 또 올라서 2만 천원대까지 오를 겁니다.
세상에. 한두 달 사이에 219% 상승. 이게 우리나라 축산업의 현실이다. 이래서야 어디 축산업이 남아남을 수 있을까? 사료 값은 폭등하고, 한우 값은 폭락. 게다가 미국산 쇠고기는 이제 검역만 남아있다. 소를 먹여서 수익을 낸다는 것은, 이제 어림도 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그래 한우 키우시는 분들은 다들 어떻게 하신대요?
뭔 대책이 있겠어요? 다들 죽을라카지. 소 값이 또 떨어져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몬하고들 있다카이. 이러다 분신하는 농부가 또 생긴 담에야 정부가 어쩌고저쩌고 소 잃고 외양간 안고치겠능교?
사료 배달하시는 기사 분은 아무 대책 없다고 고개를 내젓는다. 도시에서야 쇠고기 값이 싸지는구나. 많이 먹자. 사료 값이 올랐다고? 하는 식의 강 건너 불구경을 할 수도 있겠지만, 농촌의 현실은 절박하기 그지없다. 불길한 예감이 든다. 이러다가 정말 인사사고가 날 수도 있겠다.
말 기르는 한 범부(凡夫)의 머리로는 도저히 헤어날 길이 보이지 않는다. 한 달 후의 농촌? 한 달 후의 축산업? 이런 식으로라면 발등의 불은 곧 축산업과 농업 전체를 태울 것이다. 반만년이나 농경 사회였던 우리가 농업 없이도 완전하게 버틸 수 있을까?
전원농촌은 더 이상 구호가 아니다. 농촌이 살아나갈 새로운 외나무 길이 되어 버렸다. F.T.A. 를 통해 얻는 막대한 수익을 농촌의 전원 화를 위해 쓰고, 전원 화 된 농촌에 도시민들이 휴식과 재충전을 위해 찾아오는 새로운 수익구조와 도농간의 파이프라인을 구축해야 한다.
이제 농촌은 생산 농촌으로써의 활력을 잃었다. 도시와 농촌이 어울려 다함께 잘살 수 있는 길을 찾아야만 한다. 펜션과 통나무 집, 주말 농장, 웰빙 먹거리, 특화된 관광 상품으로 잘 가꾸어진 레저 스포츠와 휴식을 위한 공간으로 탈바꿈 해야만 한다. 그것도 지금, 여기서, 즉시, 필사적으로!
두 번째 소식 - 존재의 이유
그러니께 19년 전이다. 내가 해평 장에 갔는데, 거기서 어떤 노인분이 내 이름을 부르는 기야. 그래가꼬 보니까, 갓에 의관 정제하시고 두루마기까지 잘 차려 입은 한 70쯤 되어 보이는 노인이 나를 부르데. 내가 해평에서는 좀 알려진 인물이라 무조건 인사부터 했재. 아이고 어르신. 그랬더니 그 어른이, 야야 내가 니 동창아니가?
호오 그래서요?
그래가꼬 다시 보니까, 정말 내 동창인기라. 그러니까, 51살인데, 완전 새하얀 할아버지가 안 된나? 같이 대폿집에 가서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그 친구가 5대 독자라카이. 집안에서 16살에 장개를 안 보냈나? 그런데 그 친구가 또 독자만 낳은기라. 그 친구 아들도 또 15살에 장개를 보내가꼬 아들을 또 독자만 낳은기야. 가 손자가 7대 독자가 된기재.
야아, 정말 손이 귀한 집안이네요.
그런데 막걸리 몇 잔 마시면서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5~6살 먹은 꼬맹이들이 들어오면서, 증조할아버지 어서 집에 드가요. 하는기라, 그 손자가 또 장가를 가서 8대째엔 아들 셋을 안 나았나? 가가 51살에 증조할아버지가 된기라. 아니재, 45살에 된기재 아아들이 컸으니까. 가도 죽었는데, 아마 고손자까지는 보고 죽었을기라.
어른은 내가 잠시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는 사이에 이야기를 마치셨다. 아마 필사적(?)으로 노력을 한 결과 자손이 번창하게 되어 다행이긴 하지만, 그 친구 분은 평생을 손이 끊어질까 아슬아슬하게 사신 것 같다.
주변의 모든 생물을 보면, 나고, 자라고, 번식하고, 죽고, 이 뫼비우스의 띠를 영원히 반복하고 있다. 어쩌면 그 생물들이 생존하는 모든 이유를 한가지로 축약하자면 결국 대를 이어간다는 것, 다음 시대를 살아갈 존재를 남기는 것. 그게 다가 아닐까?
요즘은 너나 할 것 없이 하나 둘만 낳아 모두가 독자(獨子)이지만, 20년 전과 지금 달라진 것은 무엇일까? 아예 아이를 낳지 않고 본인들만 행복하게 살자는 커플도 심심치 않게 발견되는 시대. 그 합리적인 판단은 과연 옳은 것일까? 그렇다면 우리가 태어나고 존재하는 이유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우리는 현대인인 우리가 과거의 선조들보다 영리하고, 진화되고, 발전 되었다는 착각 속에 산다. 어쩌면 지금의 관습과 제도는 선조들이 이미 모두 겪어본 실패와 경험을 모은 지혜의 산물일지도 모른다. 현재의 우리는 아무 대책 없이 그 모든 것을 파괴한 다음, 우리 세계의 미래를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처럼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 영국에 이런 속담이 있다.
새로운 똑똑한 짓보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바보짓이 더 낫다.
세 번째 소식 - 나이든 자의 두려움
어떠셨어요?
뭐가?
젊으셨을 때 사업하시면서 두렵지는 않으셨나요?
그기 무신소리고?
저는 요즘 두려워요. 20대에 처음 사업을 할 때엔 무조건 밀어붙였지요. 원청회사에서 일본 제품 그대로만 하라고 했는데, 제어 소프트웨어를 완전히 뜯어 고쳐서 제 마음대로 한글화했죠. 만약 실패하면 막대한 위약금을 물어야 했는데두요. 인천 육갑문 제어 소프트웨어 작업을 할 때도, 실수하면 자동차를 가득 실은 수출 용 컨테이너선이 넘어진다고 그 프로젝트 다들 맡지 말라고 해도 전혀 두렵지 않았는데, 요즘은 두렵습니다.
그런 걱정은 다들 안하나. 나도 전 재산을 다 들여서 건물 안지인나? 그칸데도 허가는 안 나재, 비는 억수 같이 쏟아지재, 밤새도록 기둥 붙잡고 밤을 샌 적이 있었다카이.
매번 목요일 저녁까지는, 혹시나 이번 수업에 안전사고는 나지 않을까? 출근하기로 한 보조교관이 멋대로 결근하지는 않을까? 말 운반차는 고장 없이 괜찮을까? 말들은 말썽 부리지 않을까? 혹시 수업이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지는 않을까? 수많은 걱정으로 잠을 제대로 못 이룹니다. 그런데 실제로 금요일 승마 수업을 하면 곧바로 힘이 나요. 현장에서 말과 함께 아이들을 가르치다보면 수많은 걱정을 다 잊게 되요.
일이 재미있으면 안되나? 그기 최고 아이가? 일이 재미있으마 힘든 것도 모른다카이.
열심히만 하면 되는 일인데, 왜 이렇게 매번 두려운 것인지? 이제 나이가 들어가나 봅니다.
걱정만 하는기 아이라, 그만큼 열심히 준비하고 일처리를 단디하면 된다카이.
어른의 위로를 받으며 소주잔을 들었지만, 나는 여전히 두렵다. 월요일저녁. 피로와 여독에 정신 차릴 수 없을 정도로 힘들어도,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마음 가볍기만 하다. 그리고 화수목 삼일동안 나는, 또 걱정과 두려움에 떨며 간신히 몸의 피로를 던다. 이윽고 금요일. 나는 다시 두려움과 마주칠 준비가 되는 것이다.
오늘 밤. 두려움과의 거리 이틀. 나는 하나하나 수많은 걱정꺼리들을 다시 꺼내 점검한다. 익숙하면서도 언제까지나 친근해지지 않은 나이든 자의 두려움. 그러나 나는 두려움을 회피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틀 뒤면 다시 트럭을 운전하고, 말을 달리고, 작열하는 태양, 장대 같은 폭우 속에서도 꿋꿋하게 버틸 것이다.
나는 두려움과 걱정을 넘어, 내 가슴 속의 두려움으로 곧장 달려간다. 두려움뿐만 아니라, 승마를 배우는 학생들의 미소를 향해 달려간다. 보람과 걱정은 삶이 지닌 야누스의 얼굴이다. 두려움은 내게 사려와 지혜를 더해줄 뿐, 결코 나를 삼키지 못한다. 나는 나를 알고 있다. 이제 그럴 나이다.
네 번째 소식 - 신체건강한자
어제 오전 나는, 젊은이들에게 몇 가지 조언을 했다.
원래 건강하게 태어난 말들이 사소하게 잘 못된 식습관으로 마르거나, 거칠어지거나, 도태된다. 저기 마른 말들은 사료를 물에 섞어 곤죽을 만들어 먹거나, 건초를 발로 긁어 못 먹게 만들거나, 밥통의 사료를 밖에 쏟아 똥과 뒤섞어 놓지. 그 결과 더 많이 먹고도 살이 안찌는 거다. 말이 마르면 성격이 급해지고, 사소한 일에 잘 놀라거나, 쉽게 피로하고 잘 다치지. 그러면 폐기되는 거야.
사람도 마찬가지 아닐까? 애초에 건강하게 태어났지만, 흡연과 지나친 음주와, 편식, 스트레스성 폭식. 그런 저런 이유로 건강을 해치지. 말과 다른 것은 말은 우리가 관찰자의 입장에서 보기 때문에 쉽게 그 상황을 알지만, 인간은 제 눈 속의 들보를 결국 알지 못해. 결국 자신을 망치는 것은 자기 자신이지. 사회생활도 건강, 공부도 건강이야. 기초체력이 되어야만 나머지가 준비되는 거지.
나는 이제 곧 50대에 진입하는데, 가장 팔팔해야할 너희 20대의 학생들이, 노동량에서 내 1/5도 못하면서 헉헉거려. 내가 일하는 양의 1/2이라도 하면 인정해 줄게. 체력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면, 먼저 담배도 끊고 식습관도 고쳐. 대부분 힘이 달려 업무가 처지면, 건강을 회복할 생각을 않고 핑계를 먼저 떠올려. 나는 요즘 신입사원모집에 신체건강한자. 라는 문구를 피부로 느끼고 있는 중이야. 그거, 그냥 넣어둔 문구가 아니더라구.
나는 세상에서 가장 필요 없는 말이 바로 충고라고 생각한다.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에게 대부분의 충고는 잔소리다. 누군가의 조언이 절실해서, 정문일침의 한마디가 닫힌 미래를 열어줄 것만 같은 그때에, 스스로 필요해서 귀를 연다면 그건 제대로 된 의미의 충고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마저도 멋대로 해석되고 각색되어 엉뚱한 결과를 낳게 될 확률이 크다. 결국 원망이 돌아오는 것이다. 결국 충고는 80%의 잔소리와 19.9%의 원망과 0.1%의 정확도를 가진 아주 부자연스러운 행동이다.
나는 지금 후회하고 있다.
다섯 번째 소식 - 로그아웃의 문제
흔히 소통의 문제라고 한다. 다양성에 관한 문제라고도 한다. 그만큼 세상이 복잡해진 것이다. 얼마 전 새벽시간에 노약자 석에 앉아 사랑을 속삭이던 커플을 보았다. 하필 거기에 앉아서 그래야 할까? 보는 사람은 참 답답했노라고 하자,
요즘 노인들은 노약자석이 노인 석인 줄 착각하시는 것 같아요.
새벽에 비어 있는 시간이면 상관없잖아요? 노약자가 오면 비켜 주면 되는 것이고.
그게 불법은 아니잖아요?
등등 만만찮은 불만의 소리와 오히려 지나친 노인 분들의 횡포(?) 관한 성토를 들었다. 그러니 노약자가 아닌 사람은 절대로 노약자석 근처에도 안 간다는 식의, 고정관념을 가진 유신시대의 중년은 당황할 수 밖에.
예전에 어느 어른께 들었는데, 한국의 맛은 눈물의 맛이라고 하더군.
그게 무슨 소리죠?
응, 예전 며느리들은 매운 시집살이에 울고, 아궁이 매운 연기에 울고, 그 눈물의 짠맛이 우리네 밥상의 간 맛이 된 것이라는군.
그런 여성 비하적인 말씀이 어디 있어요?
응? 그게 무슨? 그 어른은 예전 고생하시던 어머님을 생각하고, 그 손맛이 그리워서 하시는 말씀 같은데...
그럼 여자들이 시집살이 하고, 부엌에서 밥이나 하며 찔찔 우는 그런 여성상이 옳다는 건가요? 그런 비참한 상태의 여성이 만든 음식이 입맛에 맞네. 어쩌고 하시는 분들은 정말 최악이에요.
허어, 나는 할 말을 잊고 말았다. 물론 어린 여학생의 발언에 다독다독 타이를 내용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예 서로 다른 곳을 보는 마당에 그런 차근차근한 몇 마디가 다 무슨 소용일까? 그저 세월이 지나고 아이를 낳고, 나이가 들면 저절로 알게 될 수도 있는 일인데...
어느 분이 내게 소통의 문제라고 하기에 나는 로그아웃의 문제라고 했다. 로그 인 해서 할 말다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로그아웃. 그것으로 끝이다. 소통의 개시도 일방적이지만, 소통의 끝도 일방적이다. 현실에서라면 누가 통성명도 없이 중요한 사안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대화를 나눌까?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나저나, 나 역시 만만치 않게 나이가 들어가나 보다, 점점 젊은이들과의 소통이 어려워진다. 어째서 자꾸만 배은망덕하고 가볍게만 느껴지는 것일까? 기원전 2천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4천 년 전, 메소포타미아 지방 수메르 인들의 설형문자에서도, “요즘 젊은 것들은 버릇이 없어서 큰일이여.” 라고 한탄하는 글이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마지막 소식 - 발에 달린 엔진
그래가꼬 호텔을 빼껴뿌렸다카이.
이야기는 제 4공화국 시절로 돌아간다. 대구의 어느 큰 호텔 사장이 정권에서 성금을 걷는 것에 반대했다가, 주거래은행에서 대출금을 즉시 갚으라는 바람에 호텔이 경매에 넘어갔다는 이야기. 그 후 알거지가 된 그 사장은 속병으로 죽었다는 이야기. 군화발이, 힘과 폭력이 난무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얼매나 억울했겠노?
하지만 나는 궁금하다. 그런 억지와 폭압의 시대에 대해 어른들은 늘 관대하다.
그때엔 그렇게 해야만했재. 안그러면 경제발전 우예했겠노? 그래했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이만큼 사는기다.
역사엔 IF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잠시 생각해 본다. 그때 그렇게 억지와 폭압으로 몽매한 백성들을 다스리지 않았다면 우리는 여전히 미개발 후진 국가로 남아있을까? 마음 속에서는 아니라고 답하지만, 독재나 군인정치를 벗어난 지난 민주시대를 생각하면 확신할 수 없다. 박대통령을 넘어서는 강한 리더 쉽과 눈에 보이는 경제발전이 없다면, 여전히 그시대는 그리운 고도 성장기로 남아있겠지.
지금까지 역대 대통령이 유신독재를 폄하하면서도 넘어서지 못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불운한 현실이다. 어른들은 발에 엔진이 달렸던것 같은 그 신나는 시대가 그리운 것이다. 새로운 지도자들이 해야하는 일은 자명하다. 국민을 신나고 살맛나게 하는 것. 발에 엔진을 달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고성(古城) 아래 별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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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소식 - 한 달 후의 농촌?
네?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한 달여 만에 말 먹일 건초를 사려고 전화를 걸었다가 그만 깜짝 놀랐다. 말건초 알팔파가 38만원에서 58만원으로 오른 것이다. 152% 상승. 직원은 친절하게도 묻지도 않은 것 까지 대답해 준다.
9천6백 원 하던 소 사료는 한포에 몇 천 원씩 올라서 만 몇 천 원씩이구요. 9월 중에는 2천 원정도 씩 또 올라서 2만 천원대까지 오를 겁니다.
세상에. 한두 달 사이에 219% 상승. 이게 우리나라 축산업의 현실이다. 이래서야 어디 축산업이 남아남을 수 있을까? 사료 값은 폭등하고, 한우 값은 폭락. 게다가 미국산 쇠고기는 이제 검역만 남아있다. 소를 먹여서 수익을 낸다는 것은, 이제 어림도 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그래 한우 키우시는 분들은 다들 어떻게 하신대요?
뭔 대책이 있겠어요? 다들 죽을라카지. 소 값이 또 떨어져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몬하고들 있다카이. 이러다 분신하는 농부가 또 생긴 담에야 정부가 어쩌고저쩌고 소 잃고 외양간 안고치겠능교?
사료 배달하시는 기사 분은 아무 대책 없다고 고개를 내젓는다. 도시에서야 쇠고기 값이 싸지는구나. 많이 먹자. 사료 값이 올랐다고? 하는 식의 강 건너 불구경을 할 수도 있겠지만, 농촌의 현실은 절박하기 그지없다. 불길한 예감이 든다. 이러다가 정말 인사사고가 날 수도 있겠다.
말 기르는 한 범부(凡夫)의 머리로는 도저히 헤어날 길이 보이지 않는다. 한 달 후의 농촌? 한 달 후의 축산업? 이런 식으로라면 발등의 불은 곧 축산업과 농업 전체를 태울 것이다. 반만년이나 농경 사회였던 우리가 농업 없이도 완전하게 버틸 수 있을까?
전원농촌은 더 이상 구호가 아니다. 농촌이 살아나갈 새로운 외나무 길이 되어 버렸다. F.T.A. 를 통해 얻는 막대한 수익을 농촌의 전원 화를 위해 쓰고, 전원 화 된 농촌에 도시민들이 휴식과 재충전을 위해 찾아오는 새로운 수익구조와 도농간의 파이프라인을 구축해야 한다.
이제 농촌은 생산 농촌으로써의 활력을 잃었다. 도시와 농촌이 어울려 다함께 잘살 수 있는 길을 찾아야만 한다. 펜션과 통나무 집, 주말 농장, 웰빙 먹거리, 특화된 관광 상품으로 잘 가꾸어진 레저 스포츠와 휴식을 위한 공간으로 탈바꿈 해야만 한다. 그것도 지금, 여기서, 즉시, 필사적으로!
두 번째 소식 - 존재의 이유
그러니께 19년 전이다. 내가 해평 장에 갔는데, 거기서 어떤 노인분이 내 이름을 부르는 기야. 그래가꼬 보니까, 갓에 의관 정제하시고 두루마기까지 잘 차려 입은 한 70쯤 되어 보이는 노인이 나를 부르데. 내가 해평에서는 좀 알려진 인물이라 무조건 인사부터 했재. 아이고 어르신. 그랬더니 그 어른이, 야야 내가 니 동창아니가?
호오 그래서요?
그래가꼬 다시 보니까, 정말 내 동창인기라. 그러니까, 51살인데, 완전 새하얀 할아버지가 안 된나? 같이 대폿집에 가서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그 친구가 5대 독자라카이. 집안에서 16살에 장개를 안 보냈나? 그런데 그 친구가 또 독자만 낳은기라. 그 친구 아들도 또 15살에 장개를 보내가꼬 아들을 또 독자만 낳은기야. 가 손자가 7대 독자가 된기재.
야아, 정말 손이 귀한 집안이네요.
그런데 막걸리 몇 잔 마시면서 이야기를 듣고 있는데, 5~6살 먹은 꼬맹이들이 들어오면서, 증조할아버지 어서 집에 드가요. 하는기라, 그 손자가 또 장가를 가서 8대째엔 아들 셋을 안 나았나? 가가 51살에 증조할아버지가 된기라. 아니재, 45살에 된기재 아아들이 컸으니까. 가도 죽었는데, 아마 고손자까지는 보고 죽었을기라.
어른은 내가 잠시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는 사이에 이야기를 마치셨다. 아마 필사적(?)으로 노력을 한 결과 자손이 번창하게 되어 다행이긴 하지만, 그 친구 분은 평생을 손이 끊어질까 아슬아슬하게 사신 것 같다.
주변의 모든 생물을 보면, 나고, 자라고, 번식하고, 죽고, 이 뫼비우스의 띠를 영원히 반복하고 있다. 어쩌면 그 생물들이 생존하는 모든 이유를 한가지로 축약하자면 결국 대를 이어간다는 것, 다음 시대를 살아갈 존재를 남기는 것. 그게 다가 아닐까?
요즘은 너나 할 것 없이 하나 둘만 낳아 모두가 독자(獨子)이지만, 20년 전과 지금 달라진 것은 무엇일까? 아예 아이를 낳지 않고 본인들만 행복하게 살자는 커플도 심심치 않게 발견되는 시대. 그 합리적인 판단은 과연 옳은 것일까? 그렇다면 우리가 태어나고 존재하는 이유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우리는 현대인인 우리가 과거의 선조들보다 영리하고, 진화되고, 발전 되었다는 착각 속에 산다. 어쩌면 지금의 관습과 제도는 선조들이 이미 모두 겪어본 실패와 경험을 모은 지혜의 산물일지도 모른다. 현재의 우리는 아무 대책 없이 그 모든 것을 파괴한 다음, 우리 세계의 미래를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처럼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 영국에 이런 속담이 있다.
새로운 똑똑한 짓보다, 옛날부터 내려오는 바보짓이 더 낫다.
세 번째 소식 - 나이든 자의 두려움
어떠셨어요?
뭐가?
젊으셨을 때 사업하시면서 두렵지는 않으셨나요?
그기 무신소리고?
저는 요즘 두려워요. 20대에 처음 사업을 할 때엔 무조건 밀어붙였지요. 원청회사에서 일본 제품 그대로만 하라고 했는데, 제어 소프트웨어를 완전히 뜯어 고쳐서 제 마음대로 한글화했죠. 만약 실패하면 막대한 위약금을 물어야 했는데두요. 인천 육갑문 제어 소프트웨어 작업을 할 때도, 실수하면 자동차를 가득 실은 수출 용 컨테이너선이 넘어진다고 그 프로젝트 다들 맡지 말라고 해도 전혀 두렵지 않았는데, 요즘은 두렵습니다.
그런 걱정은 다들 안하나. 나도 전 재산을 다 들여서 건물 안지인나? 그칸데도 허가는 안 나재, 비는 억수 같이 쏟아지재, 밤새도록 기둥 붙잡고 밤을 샌 적이 있었다카이.
매번 목요일 저녁까지는, 혹시나 이번 수업에 안전사고는 나지 않을까? 출근하기로 한 보조교관이 멋대로 결근하지는 않을까? 말 운반차는 고장 없이 괜찮을까? 말들은 말썽 부리지 않을까? 혹시 수업이 제대로 진행되지 못하지는 않을까? 수많은 걱정으로 잠을 제대로 못 이룹니다. 그런데 실제로 금요일 승마 수업을 하면 곧바로 힘이 나요. 현장에서 말과 함께 아이들을 가르치다보면 수많은 걱정을 다 잊게 되요.
일이 재미있으면 안되나? 그기 최고 아이가? 일이 재미있으마 힘든 것도 모른다카이.
열심히만 하면 되는 일인데, 왜 이렇게 매번 두려운 것인지? 이제 나이가 들어가나 봅니다.
걱정만 하는기 아이라, 그만큼 열심히 준비하고 일처리를 단디하면 된다카이.
어른의 위로를 받으며 소주잔을 들었지만, 나는 여전히 두렵다. 월요일저녁. 피로와 여독에 정신 차릴 수 없을 정도로 힘들어도,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마음 가볍기만 하다. 그리고 화수목 삼일동안 나는, 또 걱정과 두려움에 떨며 간신히 몸의 피로를 던다. 이윽고 금요일. 나는 다시 두려움과 마주칠 준비가 되는 것이다.
오늘 밤. 두려움과의 거리 이틀. 나는 하나하나 수많은 걱정꺼리들을 다시 꺼내 점검한다. 익숙하면서도 언제까지나 친근해지지 않은 나이든 자의 두려움. 그러나 나는 두려움을 회피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틀 뒤면 다시 트럭을 운전하고, 말을 달리고, 작열하는 태양, 장대 같은 폭우 속에서도 꿋꿋하게 버틸 것이다.
나는 두려움과 걱정을 넘어, 내 가슴 속의 두려움으로 곧장 달려간다. 두려움뿐만 아니라, 승마를 배우는 학생들의 미소를 향해 달려간다. 보람과 걱정은 삶이 지닌 야누스의 얼굴이다. 두려움은 내게 사려와 지혜를 더해줄 뿐, 결코 나를 삼키지 못한다. 나는 나를 알고 있다. 이제 그럴 나이다.
네 번째 소식 - 신체건강한자
어제 오전 나는, 젊은이들에게 몇 가지 조언을 했다.
원래 건강하게 태어난 말들이 사소하게 잘 못된 식습관으로 마르거나, 거칠어지거나, 도태된다. 저기 마른 말들은 사료를 물에 섞어 곤죽을 만들어 먹거나, 건초를 발로 긁어 못 먹게 만들거나, 밥통의 사료를 밖에 쏟아 똥과 뒤섞어 놓지. 그 결과 더 많이 먹고도 살이 안찌는 거다. 말이 마르면 성격이 급해지고, 사소한 일에 잘 놀라거나, 쉽게 피로하고 잘 다치지. 그러면 폐기되는 거야.
사람도 마찬가지 아닐까? 애초에 건강하게 태어났지만, 흡연과 지나친 음주와, 편식, 스트레스성 폭식. 그런 저런 이유로 건강을 해치지. 말과 다른 것은 말은 우리가 관찰자의 입장에서 보기 때문에 쉽게 그 상황을 알지만, 인간은 제 눈 속의 들보를 결국 알지 못해. 결국 자신을 망치는 것은 자기 자신이지. 사회생활도 건강, 공부도 건강이야. 기초체력이 되어야만 나머지가 준비되는 거지.
나는 이제 곧 50대에 진입하는데, 가장 팔팔해야할 너희 20대의 학생들이, 노동량에서 내 1/5도 못하면서 헉헉거려. 내가 일하는 양의 1/2이라도 하면 인정해 줄게. 체력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면, 먼저 담배도 끊고 식습관도 고쳐. 대부분 힘이 달려 업무가 처지면, 건강을 회복할 생각을 않고 핑계를 먼저 떠올려. 나는 요즘 신입사원모집에 신체건강한자. 라는 문구를 피부로 느끼고 있는 중이야. 그거, 그냥 넣어둔 문구가 아니더라구.
나는 세상에서 가장 필요 없는 말이 바로 충고라고 생각한다.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사람에게 대부분의 충고는 잔소리다. 누군가의 조언이 절실해서, 정문일침의 한마디가 닫힌 미래를 열어줄 것만 같은 그때에, 스스로 필요해서 귀를 연다면 그건 제대로 된 의미의 충고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마저도 멋대로 해석되고 각색되어 엉뚱한 결과를 낳게 될 확률이 크다. 결국 원망이 돌아오는 것이다. 결국 충고는 80%의 잔소리와 19.9%의 원망과 0.1%의 정확도를 가진 아주 부자연스러운 행동이다.
나는 지금 후회하고 있다.
다섯 번째 소식 - 로그아웃의 문제
흔히 소통의 문제라고 한다. 다양성에 관한 문제라고도 한다. 그만큼 세상이 복잡해진 것이다. 얼마 전 새벽시간에 노약자 석에 앉아 사랑을 속삭이던 커플을 보았다. 하필 거기에 앉아서 그래야 할까? 보는 사람은 참 답답했노라고 하자,
요즘 노인들은 노약자석이 노인 석인 줄 착각하시는 것 같아요.
새벽에 비어 있는 시간이면 상관없잖아요? 노약자가 오면 비켜 주면 되는 것이고.
그게 불법은 아니잖아요?
등등 만만찮은 불만의 소리와 오히려 지나친 노인 분들의 횡포(?) 관한 성토를 들었다. 그러니 노약자가 아닌 사람은 절대로 노약자석 근처에도 안 간다는 식의, 고정관념을 가진 유신시대의 중년은 당황할 수 밖에.
예전에 어느 어른께 들었는데, 한국의 맛은 눈물의 맛이라고 하더군.
그게 무슨 소리죠?
응, 예전 며느리들은 매운 시집살이에 울고, 아궁이 매운 연기에 울고, 그 눈물의 짠맛이 우리네 밥상의 간 맛이 된 것이라는군.
그런 여성 비하적인 말씀이 어디 있어요?
응? 그게 무슨? 그 어른은 예전 고생하시던 어머님을 생각하고, 그 손맛이 그리워서 하시는 말씀 같은데...
그럼 여자들이 시집살이 하고, 부엌에서 밥이나 하며 찔찔 우는 그런 여성상이 옳다는 건가요? 그런 비참한 상태의 여성이 만든 음식이 입맛에 맞네. 어쩌고 하시는 분들은 정말 최악이에요.
허어, 나는 할 말을 잊고 말았다. 물론 어린 여학생의 발언에 다독다독 타이를 내용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예 서로 다른 곳을 보는 마당에 그런 차근차근한 몇 마디가 다 무슨 소용일까? 그저 세월이 지나고 아이를 낳고, 나이가 들면 저절로 알게 될 수도 있는 일인데...
어느 분이 내게 소통의 문제라고 하기에 나는 로그아웃의 문제라고 했다. 로그 인 해서 할 말다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로그아웃. 그것으로 끝이다. 소통의 개시도 일방적이지만, 소통의 끝도 일방적이다. 현실에서라면 누가 통성명도 없이 중요한 사안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대화를 나눌까?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나저나, 나 역시 만만치 않게 나이가 들어가나 보다, 점점 젊은이들과의 소통이 어려워진다. 어째서 자꾸만 배은망덕하고 가볍게만 느껴지는 것일까? 기원전 2천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4천 년 전, 메소포타미아 지방 수메르 인들의 설형문자에서도, “요즘 젊은 것들은 버릇이 없어서 큰일이여.” 라고 한탄하는 글이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마지막 소식 - 발에 달린 엔진
그래가꼬 호텔을 빼껴뿌렸다카이.
이야기는 제 4공화국 시절로 돌아간다. 대구의 어느 큰 호텔 사장이 정권에서 성금을 걷는 것에 반대했다가, 주거래은행에서 대출금을 즉시 갚으라는 바람에 호텔이 경매에 넘어갔다는 이야기. 그 후 알거지가 된 그 사장은 속병으로 죽었다는 이야기. 군화발이, 힘과 폭력이 난무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얼매나 억울했겠노?
하지만 나는 궁금하다. 그런 억지와 폭압의 시대에 대해 어른들은 늘 관대하다.
그때엔 그렇게 해야만했재. 안그러면 경제발전 우예했겠노? 그래했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이만큼 사는기다.
역사엔 IF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잠시 생각해 본다. 그때 그렇게 억지와 폭압으로 몽매한 백성들을 다스리지 않았다면 우리는 여전히 미개발 후진 국가로 남아있을까? 마음 속에서는 아니라고 답하지만, 독재나 군인정치를 벗어난 지난 민주시대를 생각하면 확신할 수 없다. 박대통령을 넘어서는 강한 리더 쉽과 눈에 보이는 경제발전이 없다면, 여전히 그시대는 그리운 고도 성장기로 남아있겠지.
지금까지 역대 대통령이 유신독재를 폄하하면서도 넘어서지 못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불운한 현실이다. 어른들은 발에 엔진이 달렸던것 같은 그 신나는 시대가 그리운 것이다. 새로운 지도자들이 해야하는 일은 자명하다. 국민을 신나고 살맛나게 하는 것. 발에 엔진을 달게 만들어 주는 것이다.
고성(古城) 아래 별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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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백호영님의 댓글

유익하고 재밌는 산골통신. 잘 들었습니다. 오바! ^^
김명기님의 댓글
호오, 마치 무전기를 사용하는 것 처럼... 반갑습니다. ^~^
김동현®님의 댓글

정감있고 정갈한 글솜씨에 기분이 좋아지네요.
정성 가득한 글 잘 읽었습니다.
늘 건강하고 멋진 생활하세요.
임규형님의 댓글

첫 번째 소식은 정말 겁나는군요.
구조적인 문제 앞에 무력한 개인...요즘 제가 많이 생각하는 문제입니다.
혹 여섯가지 소식을 한꺼번에 올리고 휴가라도 가시나요?
김명기님의 댓글
인용:
원 작성회원 : 김동현®
정감있고 정갈한 글솜씨에 기분이 좋아지네요.
정성 가득한 글 잘 읽었습니다. 늘 건강하고 멋진 생활하세요. |
늘 공허한 독백이기만 한 글에 생동감 넘치는 댓글 너무 감사합니다.
무명작가는 이렇게 또 목을 축이고 세월 속으로 걸어들어갑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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