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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통신 XVIII (열대야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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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김명기
  • 작성일 : 08-07-28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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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통신 XVIII (열대야 보고서)



첫 번째 소식 - 잠자리 잡으러 가는 사람

이번에 새로 온 사람은 어떤가요?
잠자리 잡으러 간다.
그게 무슨 소리죠?
잠자리 잡으러 가는 사람처럼, 어리버리 하고 느리다는 뜻이다.
그럼 지난번 대학생보다 못한가요?
뭔 소리? 백배 천배 낫다카이. 시키는 일 잘하고, 게으름 안 피우고, 어디 뺀질거리는 대학생들과 비교나 할 수 있겠노? 가들은 일 시켜노마, 따라다니며 잔소리해야카고, 여기저기 집어 던진 쟁기 뒷정리 따로 해야카고. 아이고 내 다시는 그런 아아들 안 쓴다.

물론 젊고 똑똑한 학생들은 이 판단에 문제가 많다고 따지겠지만, 농장 일은 이론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땀을 흘리고 쟁기나 도구를 제자리에 놓고, 느리지만 꼼꼼하게 해야 하는 일이다.

그들에게는 아르바이트 일 뿐이겠지만, 그렇다고 대충해서는 아무것도 안 된다. 기회의 문은 무지개다리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다. 현재 내가 서 있는 이 자리, 이순간이 바로 기회의 현관인 것이다. 지금, 이 자리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지만, 기회의 문은 슬그머니 열린다.

잠자리 잡으러 가는 어리버리한 노인이, 젊고 건강한, 우수한 대학의 아르바이트 학생보다 백배 낫다는 실용적인 판단. 이 엄연한 현실을 빨리빨리 알아채지 못한다면, 이 시대 젊은이들의 고난은 좀 더 오래도록 끈질기게 계속 될 것이다.

세상에 노력과 성실만한 보증수표는 없다. 지금도 누군가 너를 주욱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그의 이름은 바로 찬스(chance)다.

두 번째 소식 - 잔소리의 먹이사슬

아유! 당신 뭘 한 거에요?
응 손 좀 씻었어.
아니, 그냥 손만 씻은 게 이 모양이에요? 화장실이 완전 물 바다네, 물 바다.

이건 내가 아내에게 늘 듣는 잔소리.

아니 니는 이게 뭐고?
설거지 한 건데요? 뭐가요?
아이고 설거지 좀 한 게 싱크대를 이렇게 물바다로 만드노?

저녁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를 하다 장모님께 잔소리를 듣던 아내. 이건 뭐 잔소리의 먹이사슬이네. 비트 갈은 주스 잔을 들고 슬그머니 웃던 나와 눈이 딱 마주쳤다. 살짝 입술을 깨무는 아내. 아이고, 큰일났다...



세 번째 소식 - 열대야 보고서

열대야에, 폭염주의보에, 한결 현대화 된 모습으로 다가온 여름이다. 현관문만 열면 곧바로 한증막이다. 그래도 이곳 팔공산은 서늘한 편이다. 나는 오늘 세벌의 셔츠와 두 벌의 바지를 땀으로 흠뻑 적실 것이다.

새벽에 말밥을 주고 마방의 마분을 치운다. 이것은 별로 힘들지 않은 일이다. 나는 천천히 마방을 치우고 말들에게 시원한 물을 준 뒤, 휴대용 연막 소독기로 마방 안팎을 구석구석 소독한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연기와 함께 파리와 모기들이 대 탈출극을 벌인다. 언덕 아래에서, 낮고 긴 소 울음소리와 가까운 사찰의 범종 소리가 다가온다. 다음 생에는 파리모기가 아닌 좀 더 그럴 듯한 생물로 태어나길...

마방을 치운 뒤에는, 어두컴컴했던 마방과 마방 입구에 전등을 다는 곡예를 한다. 사다리를 놓고 스파이더맨이 되어 마방 천정을 누비며 주렁주렁 전등을 단다. 육체적인 것 보다, 이마에 흐른 땀이 안경에 떨어지는 현상이 일종의 재난이다. 발 아래 500Kg짜리 말들이 흥분해서 푸드득 거리고, 나는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잡고 하우스 철봉에 매달린다.

말 운반 차량의 창고에서 일주일간 사용한 안전조끼와 말안장 패드, 헬멧 등을 모두 꺼내 세탁하고 햇빛에 말린다. 오늘은 햇살이 좋아서 다행이다. 말차 청소는 오후에 하자. 나는 이미 물에 빠진 사람처럼 흠뻑 젖었다. 나는 팬티만 입고 계곡 물에 풍덩 들어간다. 계곡의 싸늘함이 단숨에 뼈까지 차고 들어온다. 호오 무릉도원.

점심을 먹고 옷을 갈아입은 나는, 말 운반 차량으로 간다. 마당에서 올라 온 열기가 코끝을 후끈하게 만든다. 함께 일하는 아저씨가 성실한 사람인 것 같아 마음이 놓인다. 그와 함께 말차를 정리하고 마분 통을 비운다. 이제 말차는 말간 물로 목욕을 하고, 새로 일주일간 나와 함께 노동을 할 준비를 마친다. 말들을 반기는 아이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나는 슬그머니 미소 짓는다.

말들에게 점심을 주고 다시 한 번 마방의 마분을 치운다. 말들은 코를 내밀어 내 어깨와 목의 냄새를 맡는다. 나는 이제 그들의 일원으로 받아들여 진걸까? 그러냐? 말들에게 말을 건네자, 말들은 일제히 고개를 돌린다. 우연치고는 기가 막히다. 어쩌면 우연이 아니고 말들은 그들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표현한 것인지도 모른다. 다소 섭섭하지만 어쩌랴?

이제부터는 전화통을 붙들고 오후 내내 일을 해야 한다. 새로 뽑을 보조교관의 신상을 파악하고, 이력서를 추리고 그들과 전화 통화를 하여 옥석을 가려야 한다. 햇볕과 비, 눈을 맞으며 운동장에 서서 일해야 하는 승마교실 보조교관은 인기직종이 아니다. 하지만 나는 얼마나 매력적이고 미래가 있는 직업인지를 열심히 설명한다. 전국에 학교가 18,000개입니다. 지금 찾아가는승마교실은 겨우 3학교. 곧 본격적으로 초등학교에 승마가 보급되면, 그때는 정식 승마교사가 될 수 있을 겁니다.

게다가 8월 15일부터 있을 제 7차 기마국토대장정의 준비도 해야 하고, 관련 기관에 보도자료도 보내야 한다. 실은 모조리 하기 싫은 귀찮은 일이다. 나는 어느새 육체노동에 적응되었나 보다. 머리를 굴리는 것보다 땀을 흘리는 편이 백번 낫다.

나는 문득 모든 것을 치우고 방으로 들어온다. 에이, 이제부터는 좀 게으르게 시간을 보내야 하겠다. 나는 얼음물 한 잔을 곁에 두고, 장롱 속에서 발견된 낡은 카메라를 닦는다. 오래 된 L.P.의 지글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폭염주의보의 오후 4시를 보낸다. 이제 오후 6시가 다가오면 나는 세 번째로 셔츠를 갈아입고 마방에 갈 것이다.

차가운 물을 마신 말들은, 앞발로 바닥을 긁고 목으로는 푸르릉 거리며 저녁 사료를 보채겠지. 이윽고 팔공산의 오두막은 일몰 속으로 천천히 가라앉을 것이다. 개구리와 풀벌레가 한 여름 밤의 꿈을 찬미하는 동안, 나는 계곡 아래 흔들리는 조그만 불빛을 바라보며 소주잔을 기울일 것이다. 말을 기르는 한 남자의 여름밤. 열대야에 관한 보고서는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네 번째 소식 - 당신이 모르는 일

거리에 진열된 이것저것들을 보면
당신과 어울릴까 하고 생각해 본다는 것.

빠르고 거침없는 말을 전화기에 쏟아 붓고는
혼자 후회 하는 것.

함께 같던 장소를 혼자 지날 때면
그 순간 당신의 향기까지 생생히 떠오른다는 것.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더 많이
당신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

가끔 혼자 당신을 생각하다
콧날이 시큰해지곤 한다는 것.

다섯 번째 소식 - 모래알 뭉치기

일을 벌여놓고 보니 어쩌다 중소기업 비슷하게 되었다. 이미 7~8명의 보조 인원들이 함께 일하는 회사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건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 그러나 지금 단계에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이 단계를 ‘모래알 뭉치기’라고 한다. 이미 몇 번을 겪은 일이다.

도무지 마음이 맞지 않고, 뜻도 안 맞는 인원들을 모아, 새로운 일을 성공시키려고 하는 것. 이 과정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나는 알고 있다. 그들은 보수로 주어지는 몇 푼의 돈을 보고 있는 것이지 나와 같은 방향, 같은 미래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다. 관리자들은 이 점을 착각하면 안 된다.

일이 잘 되면 그들은 모두 초창기 멤버로써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것이다. 일이 잘 못되면 그럴 줄 알았다며 나를 비웃거나 화를 낼 것이다.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책임감과 노력일 텐데, 그런 것을 싸게 파는 곳은 없다.

고가의 임금을 주는 유능한 인력이라면 일말의 책임감을 느낄 줄 아는, 살아있는 인간을 구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으로서는 무리다. 그저 손과 발이 달려있는 사람들과 일하는 것도 다행이라고 생각해야한다. 또 그들을 고용해서 얻는 이득보다는, 그들이 칠 사고의 가능성을 미리 대비하는 것이 더 현명할 것이다.

주어진 현실. 이것을 탓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이 현실 안에서 부화 직전의 새처럼 조금씩 껍질을 깨고 탈출하여 언젠가는 비상해야한다. 너무 이르면 알 밖의 세상에 견디지 못할 것이고, 너무 늦으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속도조절과 조화.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그런 것들이다. 나의 알은 이제 막 부화하기 시작했다.

마지막 소식 - 긴 하루

저녁이 되자 하루살이가 말했다.

정말 길고 긴 하루였어.

인간은 아직 100년을 못산다. 지구는 이제 40억 살이 되었다. 오늘 나의 하루는 어땠나? 너무 길었던가? 너무 짧았던가? 나는 나를 납득시킬 정도의 하루를 살아냈나? 내 하루는 여전히 빠르고, 그리운 것들은 아직 너무나 먼 곳에 있다.


고성(古城) 아래 별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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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김창석님의 댓글

김창석

매번, 김선생의 글을 읽으며 진솔한 삶의 내음을 느낌니다.
우리나라에 다시금, 말을 사랑하고 가까이 할수 있는 기회를 준비
하시는것 같아 반갑습니다.
우리나라도 옛날에는 말이 생활의 일부였는데..... 성공하시길 기원합니다.

김명기님의 댓글

김명기

우리네 살아가는 일이 드라마나 영화 연극보다도 더 극적인 것 같습니다.
이곳의 모든 분들도 모두 자신을 주인공으로 하는 삶을 엮어가고 계시는 중일테지요.

승마 대중화는 이제 겨우 잔뿌리가 내리는 중인 것 같습니다.
요즘 농협중앙회에서도 드디어 승마에 눈을 돌리고 안성에 체험 승마장을 건립중입니다.
제가 컨설팅 중이구요.

조만간 여기저기에서 말을 타고 즐거운 미소를 짓는 가족들을 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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