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omas Hoepker와 짧은 대화(부제:매그넘 전시회를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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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 강인상
- 작성일 : 08-07-28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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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omas Hoepker
-독특한 스타일의 컬러 피처사진과 르포르타주 사진으로 1968년 권위있는 독일사진작가협회의 문화상을 비롯하여 수많은 상을 받았다.
그는 사진작가뿐만 아니라 포토디렉터(미국판 ‘지오’지 78-81)와 아트디렉터(‘슈테른’지 87-89)로도 유명하다.
포토샵의 레이어처럼, 중첩된 구성은 깊이가 있어 더욱 시각적 흥미를 자아낸다. Hoepker는 서울의 상징인 남산타워를 촬영하면서 콘크리트 조형물을 이미지에 포함시켜 프레임 안에 또 하나의 프레임을 만들었다. 그 결과 우리에게 무언가를 통해서 본다는 적극적인 감각을 불어넣어 생동감을 주고 주피사체인 남산을 더욱 강조시켜 서울을 매력적인 볼거리로 구성해 내었다.-
지난 금요일, 7/25
예정에 없던 서울을.
그것도 매그넘 전시전을 다녀왔습니다.
사실 그날이 방학을 하고 지인들과 함께 부산을 가기로 한 날이었는데,
갑작스런 태풍에 가질 못하고
아쉬운 마음에 그대로 아침 차를 타고
서울 예술의 전당으로 향했습니다.
2시 즈음 도착해서 전시관을 둘러보기 시작했습니다.
다양한 연령대의 관람객들이 많이 오시더군요.
어린 초등학생부터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들까지.
한 가지 놀라우면서도 흥미로웠던 것은
제가 직업이 있다보니 초등학생들끼리만 이런 사진전에 온다는 것이
참 놀랍고, 재미있었습니다.
한편으로 서울에 산다면 이런 문화적 혜택을
우리 아이들도 누릴 수 있는 것인가. 에 대한 자문도 해보았습니다.
한참을 둘러보던 중.
어느 노신사와 그 옆에 젊은 통역을 맡아 보시는 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토마스 휍커(Thomas Hoepker).
사실 매그넘 전시회가 아니었다면 그를 더 늦게 알았을 것이고,
또한 지구의 반대편에 사는 그를 직접 만나 대화를 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결정적으로 김봉섭 선배님의 배려가 없었다면 모두 불가능한 일이었을 겁니다.
전시장의 곳곳을 돌면서 전시회 전반을 캐논 디카로 촬영을 하더군요.
전시회를 구경하러 온 사람들에게도 매번 흥미로운 시선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가 휍커라는 사실은, 그의 주위에 멀지 않은 곳에서 관람을 하던 중.
통역하시는 분을 통해서 알 수 있었습니다.
또한 그의 남산타워 작품 앞에서는 소년같은 수줍음을 드러내며 기념촬영을
망설이는 것을 보고, 무척 인상깊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같이 동행아닌 동행을 하다,
저도 모르게 용기를 내어 같이 기념촬영을 할 수 있었습니다.
대화를 영어로 청하자, 영어로 답해주는 센스가 참 좋았습니다.
내 카메라를 같이 따라다니시는 매그넘 코리아 관계자 분께 건내주자,
그가 말했습니다.
"가지고 있는 카메라, 라이카가 아니냐. 혹시 아버지의 카메라를 들고 나왔느냐?"
아니라는 저의 대답에..
"젊은 사람 같은데 M을 어떻게 구해서 사용하게 되었느냐?"고 물어보더군요.
간단하게 대답을 해주었습니다.
1936년의 독일 태생인 그의 손자벌인 제가 라이카를 쓰는 것이
꽤 재미있는 일이었나봅니다.
저 또한 그런 관심이 왠지 모르게 기분좋게 들렸구요.
또한 그 때 마침 마운트 되었던 6/8매를 보고는
"35미리 슈미크론 같다. 저 누키(eye)를 보니 단 번에 알 수 있었다."
라이카라는 관심사가 이렇게 전 세계에 퍼져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짧지만 즐거운 대화를 많이 했습니다.
곧 이어 사인회에 사인을 받으며
그의 남산 남산타워 사진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한 장 찍을 때는
특유의 여유와 재치를 저에게 사진과 함께 선물해주었습니다.
이번 매그넘 코리아 사진전에 대한 평이 분분하지만,
저는 그에 대해서는 함구하겠습니다.
대신.
어느 날 우연치 않게 봉섭선배님께서 주신 좋은 기회가
이렇게 이어질 것 같지 않은 인연을 이어준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합니다.
Leica라는 것은 단순히 사진이라기 보다.
이렇듯 많은 이야기를 낳을 수 있는 매개체가 될 수 있다는 것에
좀 더 애착이가고, 프라이드가 생기는 좋은 이유거리가
하나 더 생겼습니다.
追伸
이 자리를 비뤄 김봉섭 선배님께 다시 한 번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독특한 스타일의 컬러 피처사진과 르포르타주 사진으로 1968년 권위있는 독일사진작가협회의 문화상을 비롯하여 수많은 상을 받았다.
그는 사진작가뿐만 아니라 포토디렉터(미국판 ‘지오’지 78-81)와 아트디렉터(‘슈테른’지 87-89)로도 유명하다.
포토샵의 레이어처럼, 중첩된 구성은 깊이가 있어 더욱 시각적 흥미를 자아낸다. Hoepker는 서울의 상징인 남산타워를 촬영하면서 콘크리트 조형물을 이미지에 포함시켜 프레임 안에 또 하나의 프레임을 만들었다. 그 결과 우리에게 무언가를 통해서 본다는 적극적인 감각을 불어넣어 생동감을 주고 주피사체인 남산을 더욱 강조시켜 서울을 매력적인 볼거리로 구성해 내었다.-
지난 금요일, 7/25
예정에 없던 서울을.
그것도 매그넘 전시전을 다녀왔습니다.
사실 그날이 방학을 하고 지인들과 함께 부산을 가기로 한 날이었는데,
갑작스런 태풍에 가질 못하고
아쉬운 마음에 그대로 아침 차를 타고
서울 예술의 전당으로 향했습니다.
2시 즈음 도착해서 전시관을 둘러보기 시작했습니다.
다양한 연령대의 관람객들이 많이 오시더군요.
어린 초등학생부터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들까지.
한 가지 놀라우면서도 흥미로웠던 것은
제가 직업이 있다보니 초등학생들끼리만 이런 사진전에 온다는 것이
참 놀랍고, 재미있었습니다.
한편으로 서울에 산다면 이런 문화적 혜택을
우리 아이들도 누릴 수 있는 것인가. 에 대한 자문도 해보았습니다.
한참을 둘러보던 중.
어느 노신사와 그 옆에 젊은 통역을 맡아 보시는 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토마스 휍커(Thomas Hoepker).
사실 매그넘 전시회가 아니었다면 그를 더 늦게 알았을 것이고,
또한 지구의 반대편에 사는 그를 직접 만나 대화를 하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결정적으로 김봉섭 선배님의 배려가 없었다면 모두 불가능한 일이었을 겁니다.
전시장의 곳곳을 돌면서 전시회 전반을 캐논 디카로 촬영을 하더군요.
전시회를 구경하러 온 사람들에게도 매번 흥미로운 시선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가 휍커라는 사실은, 그의 주위에 멀지 않은 곳에서 관람을 하던 중.
통역하시는 분을 통해서 알 수 있었습니다.
또한 그의 남산타워 작품 앞에서는 소년같은 수줍음을 드러내며 기념촬영을
망설이는 것을 보고, 무척 인상깊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같이 동행아닌 동행을 하다,
저도 모르게 용기를 내어 같이 기념촬영을 할 수 있었습니다.
대화를 영어로 청하자, 영어로 답해주는 센스가 참 좋았습니다.
내 카메라를 같이 따라다니시는 매그넘 코리아 관계자 분께 건내주자,
그가 말했습니다.
"가지고 있는 카메라, 라이카가 아니냐. 혹시 아버지의 카메라를 들고 나왔느냐?"
아니라는 저의 대답에..
"젊은 사람 같은데 M을 어떻게 구해서 사용하게 되었느냐?"고 물어보더군요.
간단하게 대답을 해주었습니다.
1936년의 독일 태생인 그의 손자벌인 제가 라이카를 쓰는 것이
꽤 재미있는 일이었나봅니다.
저 또한 그런 관심이 왠지 모르게 기분좋게 들렸구요.
또한 그 때 마침 마운트 되었던 6/8매를 보고는
"35미리 슈미크론 같다. 저 누키(eye)를 보니 단 번에 알 수 있었다."
라이카라는 관심사가 이렇게 전 세계에 퍼져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짧지만 즐거운 대화를 많이 했습니다.
곧 이어 사인회에 사인을 받으며
그의 남산 남산타워 사진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한 장 찍을 때는
특유의 여유와 재치를 저에게 사진과 함께 선물해주었습니다.
이번 매그넘 코리아 사진전에 대한 평이 분분하지만,
저는 그에 대해서는 함구하겠습니다.
대신.
어느 날 우연치 않게 봉섭선배님께서 주신 좋은 기회가
이렇게 이어질 것 같지 않은 인연을 이어준 좋은 기회였다고 생각합니다.
Leica라는 것은 단순히 사진이라기 보다.
이렇듯 많은 이야기를 낳을 수 있는 매개체가 될 수 있다는 것에
좀 더 애착이가고, 프라이드가 생기는 좋은 이유거리가
하나 더 생겼습니다.
追伸
이 자리를 비뤄 김봉섭 선배님께 다시 한 번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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