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전 이 사진 찍는데 11년 걸렸습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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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 김필성
- 작성일 : 08-06-10 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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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의 일입니다. 당시 저는 학부생이었고, 예술장르하고는 거리가 먼 자연과학을 전공하고 있었습니다. 학부때 영화동아리에서 굴러먹은 덕에 영화에 대해서는 좀 주워들은 바가 있었습니다만, 정지해 있는 “사진”에 대해서는 아는 것도 없고, 관심도 없던 그런 학부생이었죠.
그런 저에게 어느날 같은 과 친구녀석이 다가와 이른바 “뽐뿌”를 넣더군요. 사진 강의를 들어볼 생각이 없느냐고 말입니다. 미술대학 산업디자인과 3학년 전공으로 사진 수업이 있는데, 과에서 여러 친구들이 뭉쳐서 같이 들어보자고 하는 겁니다. 결국 저를 포함한 몇 명의 친구들이 그 꼬임에 넘어가서, 전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무려 “미대 전공” 수업을 수강신청해버렸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부터 시작이었습니다. 당시는 디카따위는 생각도 못할 시절이었고, 그래도 전공수업을 듣는 것어서 학기 끝날 때쯤에는 포트폴리오도 제출해야 하는 상황이라 똑딱이 카메라같은 것 가지고는 수업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똑딱이로는 교수가 주문하는 대로 조리개 수치나 셔터 속도를 조절할 수가 없으니까요. 결국 고급 slr 정도는 사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그러려면 돈이 많이 들 수밖에 없잖아요. 하지만 우리집은 그렇게 재정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집이었거든요. 고민을 하던 저는 결국 충무로까지 무작정 친구를 따라 갔었고, 거기서 공중전화에 매달려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죠. 아들내미가 사진 수업을 듣고 싶은데 어떻게 안 되겠냐고요. 당시 한참을 대답 없으시던 어머니께서 한참 만에 수화기 너머로 “그래, 사거라”라고 대답하셨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런 우여 곡절 끝에 전 당시 많은 사진학과 학생들이 수업용으로 사용하던 EOS5 + 28-105mm 를 손에 넣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얼떨결에 사진 수업을 듣게 되었죠.
2.
전 본의 아니게 친구 따라 강남가는 심정으로 사진을 배우게 되었지만, 배워보니까 사진이라는 게 참 재미있더군요. 제 전공과도 묘하게 매치되는 데가 있고, 영화와도 분명히 다르고 말이죠. 어설프긴 해도 무언가 예술스러운 느낌이 드는 것 - 하지만 매우 철저하게 물리학적으로 계산된 결과물이기도 하죠 - 이 제 손에서 나온다는 것이 신기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사진을 찍고 다니는 것은 얼마 안 가 시들해지고 말았습니다. 사실 제가 이제껏 살아온 게 나름 우여곡절이 많았거든요. 그리고 그런 우여곡절을 겪은 이유가 결국은 경제적 상황 때문이었는지라, 사진을 찍는다는 것이 저에게는 점점 사치처럼 느껴졌습니다. 물론 필름으로 사진 찍고 현상해보는 것이 그렇게까지 큰 돈이 드는 건 아닙니다만, 일단 마음에 여유가 없으니 사진기를 들고 어딜 나가보는 것도 쉽게 되질 않더군요.
그렇게 점점 사진을 안 찍게 되었습니다만, 그래도 전 제 사진기 셋을 팔지는 않았습니다. 어머니께서 힘들게 결단을 내려 사주신 것이고, 그 전에는 영화든 뭐든 에 대해 “감상 및 비평“만 했지 뭘 만들어 볼 생각은 안 해보던 저에게 뭔가 직접 창작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녀석이었으니까요. 그냥 언젠가는 저 녀석들을 꺼내서 사진을 찍어볼 수 있겠지라는 막연한 생각을 하면서, 주위에서 안 쓸 거면 팔아버리라고 조언하는 사람들을 애써 무시하면서 전 그냥 제 사진기를 모셔놓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10여년이 흘러가고 말았죠.
3.
그동안 전 여러가지 일을 겪었고, 드디어 조금은 여유를 가지고 살 수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어려운 상황인 건 여전했지만, 그래도 불안하기만 했던 미래가 어느 정도 안정되게 되었거든요.
그런 상황이 되자 조금씩 옛날 생각이 나더군요. 사진을 다시 찍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다시금 들기 시작한 겁니다. 그동안 거의 잊고 있었는데, 그게 없어진 게 아니라 제 속 어딘가 짱박혀 있었던 겁니다.
그렇게 저는 다시금 사진을 찍어볼 생각을 갖게 되었고, 마침내 있는 돈 없는 돈 다 털어서 사진기에 다시 투자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제 EOS5는 잘 모셔놓은 상태에서 말이죠.
4.
이 게시물에 붙인 사진은 라이카 m6로 찍은 겁니다. 그런데 사실 이 라이카는 제 것이 아니고 제 동생 겁니다.
요즘 들어 불어닥친 dslr 열풍은 아마 다들 잘 아실 겁니다. 제 동생도 저도 많은 주변 사람들이 모두 사진기를 들고 다니는 상황이죠. 하지만 사실 제 동생은 사진에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옆에서 무슨 아빠백통이 어떻고, 5d가 어떻고 하는 이야기가 들려와도 그다지 반응이 없었어요.
그래도 하도 사진에 대해 하도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많이 듣다보니 나름 인터넷 사이트들에 올라온 사진들을 눈여겨 보게 되었답니다. 그러면 그렇게 보던 사진들 중에 마음에 드는 사진이 있지 않겠어요? 그렇게 마음에 드는 사진들에 대한 정보들을 찾아보니, 거의가 다 라이카로 찍은 것이었답니다. 그래서 어느날 제게 묻더군요. 라이카라는 사진기를 아느냐고.
그런 과정을 거쳐, 제 동생은 대학 강의 나가면서 모아 둔 저금을 털어 라이카를 샀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라이카 클럽에 가끔 사진도 올리는 열성적인 라이카 매니아가 되었죠.
그리고 전 제 동생 덕택에, 말로만 듣던 라이카로 사진을 찍어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게시물에 붙인 사진은, 제가 처음으로 라이카로 찍어본 사진입니다. 캐논 L렌즈의 빨간 띠를 구경해보는 것이 소원이던 제가, 11년만에 무려 “라이카”로 찍은 사진인 거죠.
5.
사실 전 사진을 잘 찍는 사람이 못됩니다. 애초부터 예술과는 영 거리가 먼 이공계 출신이고, 예술적 감각도 매우 둔합니다. 그래서 제가 찍은 사진에 제 자신이 불만스러워하는 경우가 더 많죠.
하지만 여전히 사진은 제게 매력적인 취미생활입니다. 사진기의 파인더를 통해 바라보는 세상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보는 세상과 확연히 다름을 이미 알아버렸기 때문이죠.
그래서 전 라이카 클럽의 고수님들같은 멋진 사진은 못 찍어도, 아마 평생 사진을 즐길 것 같습니다. 10여년 간 묻어놓고 살았어도 사진에 대한 마음이 사라지지 않은 걸 보면 말이죠. ^^
아래 6년 걸려 찍은 사진이라고 올라온 글을 보고, 용기 내어 한번 글을 올려봅니다. 모두들 편안한 밤 되시길 빕니다.
/nblue
m6 + summilux 50mm f1.4 2nd generation + RVP 100
댓글목록
조철현님의 댓글

글을 참 읽기 편안하게 잘 쓰십니다.^^
공학도면서 영화동아리에 들어가신것 부터가 내부에 예술적 기질이 숨어있기
때문 아니었을까요? 앞으로 좋은 사진 많이 올려주시길 기대하겠습니다.
김용준님의 댓글

아마 저를 포함한 우리 클럽 회원들께서도 김필성회원님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됩니다.
그래도 지금 이라도 사진에 대한 관심과 꿈을 다시 펼 수 있게 된게 얼마나 다행인지요.
글도 물 흐르듯 편안하게 공감가는 말씀이십니다.
아무쪼록 삶에 신선한 자극이 되는 시간이 되시길 빕니다.
그리고 혹시 동생분이 가끔 충무로에서 뵈는 우리 회원이신 김필수님 아니신지요? 그냥 궁금 해서 여쭤 봅니다.
다음 클럽 모임에는 두 형제분의 출현을 기대 하겠습니다.
정규택님의 댓글

헉!!!!!!! 선배님~~~~~~~~~~~ 충 성!
제가 시작한 6년 x 2 大 선배님께 충성은 당연합니다...^^
역시 대 선배님의 사진세계가 훨씬 깊고 풍성함이 느껴집니다.
앞으로 좋은 작품들 많이 보여주세요.. 충 성!
김필성님의 댓글

처음 쓴 글인데..따뜻한 리플들 감사드립니다. ^^
최_정원님의 댓글

저는 중2 배철수의 음악캠프 1회부터 찍었으니까 18년동안 내세울 사진은 한장도 없습니다...감축드립니다~~~~~~
김대용ak님의 댓글

사진과 같이한 잔잔한 삶의 이야기에 동감합니다.
저또한 어찌어찌한 일로 장농속에 가두어논 세월이 오래였지요.
늘 파인더의 세상이 궁금하여 가끔씩 그걸 들여다보며도 하고..
변변치 않은 실력이지만 주위분들을 촬영하는 재미가 솔솔 하였지요.
저는 사진에 대한 철학은 없지만 조그마한 기계가 주는 줄거움으로
비워있는 시간들을 같이 한답니다.
추억을 되돌려주는 기계!
전 그게 사진을 찍는 이유입니다.
좋은글 잘 보았습니다.
자주 뵙기를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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