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통신 II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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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 김명기
- 작성일 : 08-05-01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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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통신 IIX

첫 번째 소식 - 산골 생맥주집
오두막에서 1.5 Km 정도 산을 내려가면 카페가 하나 있다. 거기서 생맥주도 팔고 있다. 이 근동에서 유일한 곳이다. 처음 거처를 옮길 때부터 눈여겨 봐둔 집이다. 산 속에서 생맥주를 마실 수 있다니... 거품이 넘치는 생맥주잔 모양의 파란 네온 등이 켜진 그 카페를 생각하면, 나는 늘 입에 침을 고였다. 얼마 전 드디어 그 집을 찾았다.
여기 생맥주 500cc 둘 주세요.
조그만 바구니에 안주용 과자가 먼저 나오고 하얀 거품이 찰진 황금빛 생맥주가 서리 낀 잔에 가득 담겨 나온다. 열심히 일하며 땀 흘린 뒤에 생맥주 한잔! 차가운 맥주가 목을 따갑게 넘어가며 삶의 의욕과 생기를 내 몸에 흘려 넣는다. 탁! 소리가 나게 테이블에 잔을 내려놓고 나는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며, 입술에 묻은 거품을 혀로 핥는다.
캬아! 이런 게 사는 맛이지! 너무 마시면 안되니까, 한 잔만 더 하지.
여기 맥주 한 잔 더 주세요.
추가로 주문을 한 뒤, 어쩐지 안주를 시키지 않은 것이 조금 미안해져서 변명을 한다.
식사 한지 얼마 안되어서요.
아니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찾아 주신 것만도 얼마나 고마운데요.
고운 미소와 함께 인사를 내려놓은 여주인은 잠시 후 맥주 두 잔을 가져온다.
어? 우리는 한잔만 주문했는데?
아뇨, 두 분이 맥주 마시는 모습이 너무 맛나게 드셔서요. 한잔은 제가 드리는 겁니다. 맛있게 드세요.
이래서 생맥주집 여주인은 아주 간단하게 두 모주꾼을 단숨에 단골로 만들고 말았다. 여기는 팔공산. 깊은 산골. 하지만 솨아아 소리는 내며 터지는 생맥주 기포처럼 쿨 한, 제대로 된 생맥주집이 하나 있다. 도시의 친구들을 약 올릴 자랑거리가 또 하나 생겼다.
내일 날 맑으면 일찍 일마치고, 그 집 테라스에 앉아 생맥주 한잔 앞에 두고 톨스토이의 비밀일기나 마저 읽어 볼까나?
두 번째 소식 - 파괴의 날
화장실에 백열등이 나갔다. 갈아 끼운 지 일주일도 안됐는데 웬일이지? 유리로 된 전등 커버를 벗기려 하자, 우지직 하며 전등 커버가 테두리만 남고 부서진다. 유리조각이 욕실 바닥에 쏟아져 내리며 산산조각이 된다. 타일 바닥 위의 유리 조각은, 어쩐지 영화의 끔찍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이래서야 전등 갈아 끼우는 것 보다 욕실 바닥을 치우는 것이 더 큰일이 되었다.
새로 만든 CD의 곡들을 들으려 할 때, 앰프의 진공관 하나가 팍 소리를 내며 새빨갛게 달아오른다. 곧 불이라도 날 기세여서 얼른 관을 뺏다. 장갑을 꼈는데도 그 열기가 느껴진다. 그런데도 좌우 스피커에서 소리가 다 난다. 트랜스 방식이 아니라는 전문가의 애매한 대답을 듣고, 대구에서 진공관 살 수 있는 곳을 수소문 한다.
몇 가지 자료를 찾아 USB메모리에 옮기려 하자, 컴퓨터가 멈춘다. 리셋을 시키자, 새로 설치한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가 문제라며, 복잡한 코드 번호와 공포의 파란화면이다.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그 복잡한 코드는 도대체 누굴 위한 걸까? 결국 소비자는 보나마나고 전문 수리공이나 알아볼까?
이런 것은 전문영역에서 뭔가 기술적인 문제가 있을 때, 기술자들끼리의 암호 같은 것이다. 나 역시 공학도라 대략 짐작한다. 일반 소비자는 알아채지 못하게 하는, 결국 생산품의 문제를 수리공은 알지만, 생산자와 A/S 수리공 그 둘은 계속 돈을 벌고, 그 비용은 소비자가 부담하는 식. 이 간단하고 효율적인 야바위는 산업사회가 계속 되는 한 영원히 지속되리라.
마이다스처럼 황금을 만드는 것도 아니고, 손대는 것 마다 고장이 연속되자 마침내 나는 기가 꺾인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이것들을 다 수리하자면 내일은 무척 번거로운 날이 되겠지.
세 번째 소식 - 이상한 꿈
아직도 생생한 이상한 꿈을 꾸었다. 깊은 밤, 괴기 영화에 나올 법한 초가집. 나와 또 한사람이 그 집 안방에서 누구인지 모르는 할머니에게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꿈에서는 이런 설정이 이상하게도 납득이 된다.) 뭔가 엉덩이가 스물 거려서 멍석을 들고 보니, 30~40 Cm쯤 되는 크고, 검고, 반질거리는 등딱지의 지네들이 바글바글하다. 지네들의 발들이 방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자글자글 들린다. (그러나 아무도 놀라지 않는다.)
검은 지네는 내 항문을 열고 들어온다. 그 느낌이 아주 생생하다. 할머니는 그 지네가 내장의 병을 막고, 내 운수를 지켜 줄 것이라고 한다. 나는 그대로 믿는다. 항문 바로 안쪽에서 커다란 지네가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진다. 이 지네가 내 몸의 다른 쪽으로 옮겨가면 어쩌지? 조금 걱정은 된다. 그러다 잠이 깨었다. 꿈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현실 속에서는 보통 끔찍한 일이 아니다.
이게 무슨 꿈일까? 길몽인가 흉몽인가? 실은 그런 꿈에 연연하진 않지만, 너무 생생하고 이상한 꿈이라 조금 궁금하기는 하다. 그러나 사람의 삶이 한낱 꿈에 달려 있을까? 노력과 용기. 사람의 운명은 자신의 손에 달렸다. 여하튼 오늘은 산 아래 구름이 오두막처마까지 내려온 날이다.
네 번째 소식 - 길들이기

말을 키우다 보니, 내가 기르는 말이 다른 어느 말보다 튼튼하고 살찌고 건강하기를 바란다. 처음 말을 샀을 때, 안장이 돌아갈 정도로 말랐었다. 늘 노심초사 최고급 사료와 축협 건초, 시장에서 당근 파치를 얻어 먹이고, 말의 장에 좋다는 콩기름과 사과식초에 비타민 영양제, 천일염.
아유 형님, 말들은 그렇게 키우면 안돼요. 나 밥 먹을 때, 말도 먹고, 나 굶으면 말도 같이 굶고 그래야죠. 2대에 걸쳐 말을 기르는 아우의 걱정이다. 그랬거나 말거나 나는 먹였고, 드디어 말들은 튼튼해졌다. 문제는 이때부터 시작됐다.
말들은 건강하고 힘이 넘치면 곧장 거만해지고, 예민해지고, 난폭해지고, 반항적이 된다. 비실비실 힘이 없을 때는 아무 곳이나 가자는 곳 모두 잘 가더니, 온 몸에 힘이 넘치자 제가 가고 싶은 데로만 가려한다. 빙글빙글 제자리에서 돌며 등에 탄 주인에게 반항하다, 급기야 뒷다리를 들고 엎드리거나 앞다리를 번쩍 들고 로데오를 한다.
산성에 오르는 아스팔트길에서 말은 미친 듯 반항을 하다가 미끄러졌다. 말의 무릎에 상처가 났다. 나는 말을 돌려 농장으로 돌아와 치료부터 하고 말을 바라본다. 말도 나를 바라본다. 말의 근육은 힘이 넘쳐 부들부들 떨리고, 눈에는 반항기가 가득하다. 이럴 때 방법은 두 가지다.
한가지는 조마삭으로 말의 힘을 빼고 순종하도록 훈련을 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많이 들고, 힘이 차 날뛰는 말을 훈련시키다 보면 말이 스스로 자기 발을 차거나 허리와 다리를 삘 수도 있다.
다른 한가지는 말의 밥을 굶겨 일단 힘부터 빼는 것이다. 하지만 배식 때마다 다른 말들이 밥 먹는 것을 바라보는 그 슬프고 애절한 눈빛이라니, 가슴이 아파서 못할 짓이다. 하지만 나는 뭔가 방법을 선택해서 말과 나 모두 만족하고 안전하게 기승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문득 이반데니소비치의 하루가 생각난다. 수용소의 시간. 인간이 인간에게 하던 길들이기 방식으로 말을 길들이기 시작한 것일까? 인간이 동물을 길들이기 시작한 방법으로 인간을 길들이기 시작한 것일까? 인간과 인간, 인간과 동물의 길들이기에 대해 생각해본다. 인간은, 세계는 여전히 전쟁 중이다.
다섯 번째 소식 - 맥주 병 열기
어제 몇 달 만에 처음으로 페트병 맥주를 내 손으로 땄다. 지난해 12월부터 산골에서 말을 키우고 밭을 갈며 살았다. 거름 수레를 끌고, 쟁기를 쥐고, 용접을 하고, 사료를 나르고, 건초더미를 옮기고. 얼음이 둥둥 뜬 차가운 계곡물에 손을 씻었다. 요령 부족한 초보농부니 늘 손아귀가 부어있었다.
한동안 새끼손가락을 삐어 엄지검지중지 세손가락만으로 일을 했다. 난폭한 말을 길들이려 조마삭을 돌리거나 고삐를 잡을 때에도 적절한 부위에 적당한 힘을 주지 못하자, 나머지 손가락에도 마디마디에 통증이 옮겨간다. 결국 내 손은 두툼하게 부어오르기만 할 뿐, 제대로 힘을 주지 못하는 무능한 손이 되었다.
주먹을 쥐어도 힘이 들어가게 꼭 쥐어지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늘 이빨로 병마개를 돌려 열거나, 창피하게도 아내에게 이것 좀 열어줘. 하고 부탁해왔다. 그러다 어제는 드디어 내 손으로 맥주병을 딴 것이다. 드디어 거친 일에 익숙해 진 것일까? 손에 제대로 힘이 붙은 것일까? 의사가 아니니 알 길은 없다. 하지만 자못 감격스럽다. 나는 다시 맥주병을 열 수 있다.
쓰다 보니 또 맥주 타령이다. 내가 맥주를 좋아하기는 정말 좋아하는 모양일세.
마지막 소식 - 나는 작가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비록 글을 써서는 돈 한 푼 벌지 못하는 무명작가지만, 그렇게 생각한다. 작가라는 단어는 때로 품 안의 밤송이다. 내 안의 작가라는 기준은, 내가 납득할 수 없는 것, 그래서 내가 남에게 설명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게 한다.
그 누구도 아닌 내가 나를 잠깐만 기만하면 되는 일. 그러면 자잘한 이익과 즐거움도 생기는 법이지만, 돈 한 푼 벌지 못하는 내 안의 무능한 작가는 단호하게 거절한다. 그러다 보니 나와 타인의 다툼보다는 내안의 생활인과 내안의 작가가 다투는 일이 적지 않다. 대개는 작가의 고집이 이기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현실의 나는 더욱 가난하고 고단한 무명작가다.
남이 가진 것 중 욕심나는 것이 없고, 별 것도 없지만 내가 가진 것만으로도 부족한 것이 없으니 나는 무명작가의 삶을 제법 잘 살만한 사람이다. 담장 밖에서 야인으로 살아온 지 대략 10년. 그간의 경험이 내게 그렇게 말하니 믿어도 괜찮다.
4월 말의 오후 6시 18분. 침실의 서쪽 창이 붉게 물든다. Cliff richard 의 Visions. 새들은 둥지로 돌아가고, 개들은 땅에 엎드려 있다. 산골은 이제 밤을 맞을 준비를 한다. 나는 낡은 L.P. 를 꺼내 Chet Atkins의 기타연주 Vincent를 들으며, 고단하지만 달콤한 잠을 맞을 것이다.
깨어나면 내일은 찬란한 5월.
고성(古城) 아래 별자리...
www.allbaro.com
첫 번째 소식 - 산골 생맥주집
오두막에서 1.5 Km 정도 산을 내려가면 카페가 하나 있다. 거기서 생맥주도 팔고 있다. 이 근동에서 유일한 곳이다. 처음 거처를 옮길 때부터 눈여겨 봐둔 집이다. 산 속에서 생맥주를 마실 수 있다니... 거품이 넘치는 생맥주잔 모양의 파란 네온 등이 켜진 그 카페를 생각하면, 나는 늘 입에 침을 고였다. 얼마 전 드디어 그 집을 찾았다.
여기 생맥주 500cc 둘 주세요.
조그만 바구니에 안주용 과자가 먼저 나오고 하얀 거품이 찰진 황금빛 생맥주가 서리 낀 잔에 가득 담겨 나온다. 열심히 일하며 땀 흘린 뒤에 생맥주 한잔! 차가운 맥주가 목을 따갑게 넘어가며 삶의 의욕과 생기를 내 몸에 흘려 넣는다. 탁! 소리가 나게 테이블에 잔을 내려놓고 나는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며, 입술에 묻은 거품을 혀로 핥는다.
캬아! 이런 게 사는 맛이지! 너무 마시면 안되니까, 한 잔만 더 하지.
여기 맥주 한 잔 더 주세요.
추가로 주문을 한 뒤, 어쩐지 안주를 시키지 않은 것이 조금 미안해져서 변명을 한다.
식사 한지 얼마 안되어서요.
아니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찾아 주신 것만도 얼마나 고마운데요.
고운 미소와 함께 인사를 내려놓은 여주인은 잠시 후 맥주 두 잔을 가져온다.
어? 우리는 한잔만 주문했는데?
아뇨, 두 분이 맥주 마시는 모습이 너무 맛나게 드셔서요. 한잔은 제가 드리는 겁니다. 맛있게 드세요.
이래서 생맥주집 여주인은 아주 간단하게 두 모주꾼을 단숨에 단골로 만들고 말았다. 여기는 팔공산. 깊은 산골. 하지만 솨아아 소리는 내며 터지는 생맥주 기포처럼 쿨 한, 제대로 된 생맥주집이 하나 있다. 도시의 친구들을 약 올릴 자랑거리가 또 하나 생겼다.
내일 날 맑으면 일찍 일마치고, 그 집 테라스에 앉아 생맥주 한잔 앞에 두고 톨스토이의 비밀일기나 마저 읽어 볼까나?
두 번째 소식 - 파괴의 날
화장실에 백열등이 나갔다. 갈아 끼운 지 일주일도 안됐는데 웬일이지? 유리로 된 전등 커버를 벗기려 하자, 우지직 하며 전등 커버가 테두리만 남고 부서진다. 유리조각이 욕실 바닥에 쏟아져 내리며 산산조각이 된다. 타일 바닥 위의 유리 조각은, 어쩐지 영화의 끔찍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이래서야 전등 갈아 끼우는 것 보다 욕실 바닥을 치우는 것이 더 큰일이 되었다.
새로 만든 CD의 곡들을 들으려 할 때, 앰프의 진공관 하나가 팍 소리를 내며 새빨갛게 달아오른다. 곧 불이라도 날 기세여서 얼른 관을 뺏다. 장갑을 꼈는데도 그 열기가 느껴진다. 그런데도 좌우 스피커에서 소리가 다 난다. 트랜스 방식이 아니라는 전문가의 애매한 대답을 듣고, 대구에서 진공관 살 수 있는 곳을 수소문 한다.
몇 가지 자료를 찾아 USB메모리에 옮기려 하자, 컴퓨터가 멈춘다. 리셋을 시키자, 새로 설치한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가 문제라며, 복잡한 코드 번호와 공포의 파란화면이다.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그 복잡한 코드는 도대체 누굴 위한 걸까? 결국 소비자는 보나마나고 전문 수리공이나 알아볼까?
이런 것은 전문영역에서 뭔가 기술적인 문제가 있을 때, 기술자들끼리의 암호 같은 것이다. 나 역시 공학도라 대략 짐작한다. 일반 소비자는 알아채지 못하게 하는, 결국 생산품의 문제를 수리공은 알지만, 생산자와 A/S 수리공 그 둘은 계속 돈을 벌고, 그 비용은 소비자가 부담하는 식. 이 간단하고 효율적인 야바위는 산업사회가 계속 되는 한 영원히 지속되리라.
마이다스처럼 황금을 만드는 것도 아니고, 손대는 것 마다 고장이 연속되자 마침내 나는 기가 꺾인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이것들을 다 수리하자면 내일은 무척 번거로운 날이 되겠지.
세 번째 소식 - 이상한 꿈
아직도 생생한 이상한 꿈을 꾸었다. 깊은 밤, 괴기 영화에 나올 법한 초가집. 나와 또 한사람이 그 집 안방에서 누구인지 모르는 할머니에게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꿈에서는 이런 설정이 이상하게도 납득이 된다.) 뭔가 엉덩이가 스물 거려서 멍석을 들고 보니, 30~40 Cm쯤 되는 크고, 검고, 반질거리는 등딱지의 지네들이 바글바글하다. 지네들의 발들이 방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자글자글 들린다. (그러나 아무도 놀라지 않는다.)
검은 지네는 내 항문을 열고 들어온다. 그 느낌이 아주 생생하다. 할머니는 그 지네가 내장의 병을 막고, 내 운수를 지켜 줄 것이라고 한다. 나는 그대로 믿는다. 항문 바로 안쪽에서 커다란 지네가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진다. 이 지네가 내 몸의 다른 쪽으로 옮겨가면 어쩌지? 조금 걱정은 된다. 그러다 잠이 깨었다. 꿈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 현실 속에서는 보통 끔찍한 일이 아니다.
이게 무슨 꿈일까? 길몽인가 흉몽인가? 실은 그런 꿈에 연연하진 않지만, 너무 생생하고 이상한 꿈이라 조금 궁금하기는 하다. 그러나 사람의 삶이 한낱 꿈에 달려 있을까? 노력과 용기. 사람의 운명은 자신의 손에 달렸다. 여하튼 오늘은 산 아래 구름이 오두막처마까지 내려온 날이다.
네 번째 소식 - 길들이기
말을 키우다 보니, 내가 기르는 말이 다른 어느 말보다 튼튼하고 살찌고 건강하기를 바란다. 처음 말을 샀을 때, 안장이 돌아갈 정도로 말랐었다. 늘 노심초사 최고급 사료와 축협 건초, 시장에서 당근 파치를 얻어 먹이고, 말의 장에 좋다는 콩기름과 사과식초에 비타민 영양제, 천일염.
아유 형님, 말들은 그렇게 키우면 안돼요. 나 밥 먹을 때, 말도 먹고, 나 굶으면 말도 같이 굶고 그래야죠. 2대에 걸쳐 말을 기르는 아우의 걱정이다. 그랬거나 말거나 나는 먹였고, 드디어 말들은 튼튼해졌다. 문제는 이때부터 시작됐다.
말들은 건강하고 힘이 넘치면 곧장 거만해지고, 예민해지고, 난폭해지고, 반항적이 된다. 비실비실 힘이 없을 때는 아무 곳이나 가자는 곳 모두 잘 가더니, 온 몸에 힘이 넘치자 제가 가고 싶은 데로만 가려한다. 빙글빙글 제자리에서 돌며 등에 탄 주인에게 반항하다, 급기야 뒷다리를 들고 엎드리거나 앞다리를 번쩍 들고 로데오를 한다.
산성에 오르는 아스팔트길에서 말은 미친 듯 반항을 하다가 미끄러졌다. 말의 무릎에 상처가 났다. 나는 말을 돌려 농장으로 돌아와 치료부터 하고 말을 바라본다. 말도 나를 바라본다. 말의 근육은 힘이 넘쳐 부들부들 떨리고, 눈에는 반항기가 가득하다. 이럴 때 방법은 두 가지다.
한가지는 조마삭으로 말의 힘을 빼고 순종하도록 훈련을 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많이 들고, 힘이 차 날뛰는 말을 훈련시키다 보면 말이 스스로 자기 발을 차거나 허리와 다리를 삘 수도 있다.
다른 한가지는 말의 밥을 굶겨 일단 힘부터 빼는 것이다. 하지만 배식 때마다 다른 말들이 밥 먹는 것을 바라보는 그 슬프고 애절한 눈빛이라니, 가슴이 아파서 못할 짓이다. 하지만 나는 뭔가 방법을 선택해서 말과 나 모두 만족하고 안전하게 기승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문득 이반데니소비치의 하루가 생각난다. 수용소의 시간. 인간이 인간에게 하던 길들이기 방식으로 말을 길들이기 시작한 것일까? 인간이 동물을 길들이기 시작한 방법으로 인간을 길들이기 시작한 것일까? 인간과 인간, 인간과 동물의 길들이기에 대해 생각해본다. 인간은, 세계는 여전히 전쟁 중이다.
다섯 번째 소식 - 맥주 병 열기
어제 몇 달 만에 처음으로 페트병 맥주를 내 손으로 땄다. 지난해 12월부터 산골에서 말을 키우고 밭을 갈며 살았다. 거름 수레를 끌고, 쟁기를 쥐고, 용접을 하고, 사료를 나르고, 건초더미를 옮기고. 얼음이 둥둥 뜬 차가운 계곡물에 손을 씻었다. 요령 부족한 초보농부니 늘 손아귀가 부어있었다.
한동안 새끼손가락을 삐어 엄지검지중지 세손가락만으로 일을 했다. 난폭한 말을 길들이려 조마삭을 돌리거나 고삐를 잡을 때에도 적절한 부위에 적당한 힘을 주지 못하자, 나머지 손가락에도 마디마디에 통증이 옮겨간다. 결국 내 손은 두툼하게 부어오르기만 할 뿐, 제대로 힘을 주지 못하는 무능한 손이 되었다.
주먹을 쥐어도 힘이 들어가게 꼭 쥐어지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늘 이빨로 병마개를 돌려 열거나, 창피하게도 아내에게 이것 좀 열어줘. 하고 부탁해왔다. 그러다 어제는 드디어 내 손으로 맥주병을 딴 것이다. 드디어 거친 일에 익숙해 진 것일까? 손에 제대로 힘이 붙은 것일까? 의사가 아니니 알 길은 없다. 하지만 자못 감격스럽다. 나는 다시 맥주병을 열 수 있다.
쓰다 보니 또 맥주 타령이다. 내가 맥주를 좋아하기는 정말 좋아하는 모양일세.
마지막 소식 - 나는 작가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비록 글을 써서는 돈 한 푼 벌지 못하는 무명작가지만, 그렇게 생각한다. 작가라는 단어는 때로 품 안의 밤송이다. 내 안의 작가라는 기준은, 내가 납득할 수 없는 것, 그래서 내가 남에게 설명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게 한다.
그 누구도 아닌 내가 나를 잠깐만 기만하면 되는 일. 그러면 자잘한 이익과 즐거움도 생기는 법이지만, 돈 한 푼 벌지 못하는 내 안의 무능한 작가는 단호하게 거절한다. 그러다 보니 나와 타인의 다툼보다는 내안의 생활인과 내안의 작가가 다투는 일이 적지 않다. 대개는 작가의 고집이 이기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현실의 나는 더욱 가난하고 고단한 무명작가다.
남이 가진 것 중 욕심나는 것이 없고, 별 것도 없지만 내가 가진 것만으로도 부족한 것이 없으니 나는 무명작가의 삶을 제법 잘 살만한 사람이다. 담장 밖에서 야인으로 살아온 지 대략 10년. 그간의 경험이 내게 그렇게 말하니 믿어도 괜찮다.
4월 말의 오후 6시 18분. 침실의 서쪽 창이 붉게 물든다. Cliff richard 의 Visions. 새들은 둥지로 돌아가고, 개들은 땅에 엎드려 있다. 산골은 이제 밤을 맞을 준비를 한다. 나는 낡은 L.P. 를 꺼내 Chet Atkins의 기타연주 Vincent를 들으며, 고단하지만 달콤한 잠을 맞을 것이다.
깨어나면 내일은 찬란한 5월.
고성(古城) 아래 별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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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장재민님의 댓글

미국 사진작가 Walker Evans 가 떠올랐읍니다.
"사진이란 일종의 글쓰기이며 삶은 거리에있다"
김몀기님의 글이 사진이 되어 떠오릅니다.
가끔은 글을 사진으로 보여주셨으면 하는 바램을 해봅니다.
김명기님의 댓글
요즘 사정이 있어서 사진을 잘 찍지 못하네요.
조만간 새로 카메라를 준비해서 이런저런 사물의 의미를
다시 새겨볼까 합니다.
산다는게 참 쉽지 않군요. ^~^
김창석님의 댓글

저도, 김몀기님의 글이 사진이 되어 떠오릅니다.
가끔은 글을 사진으로 보여주셨으면 하는 바램을 해 보다가도
글이 더 어울리는 분이라 생각합니다.
좋은 글 자주 오려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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