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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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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김명기
  • 작성일 : 08-04-22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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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대지와 무거운 구름 사이로 얇게 저며져 있던 들녘엔, 산 너머로 태양이 가라앉기 직전 비가 내렸다. 흑단처럼 검은 벌판, 노란 불빛이 새어나오는 컨테이너에서 삼겹살을 굽는다. 막소주도 이젠 얼마 남지 않았다. 맹렬한 속도로 줄어든다. 겨울과 봄의 경계에는 고뇌의 가지만 무성했던 모양이다.

지구가 구토 직전의 위장처럼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진다. 파란 식탁이 조금씩 기울어지는 것을 보니 세반고리관의 달팽이들이 단체로 이동을 하는 모양이다. ‘여긴 못 견디겠어. 술 냄새가 너무 지독해.’ 내게서 떠나지 못하는 단하나의 존재는 결국 나 자신 뿐이라는 저주도 이미 알고 있다. 사랑이 떠난 그 자리에 나는 영원히 머물게 되리라.

‘찌이잉’ 귀를 울리는 이명이 묵직한 침묵과 번갈아가며 규칙적으로 진공을 메운다. 문득 심장이 두근두근 고동치는 소리가 들린다. 소리 없이 밤바다로 떠나는 작은 어선의 뒤에 남은 잔물결처럼 밤이 일그러진다.

남은 고기들을 모두 모아 다시 굽는다. 그릇에 담아 문을 열고 복실이를 부른다. 희미한 그림자로 남은 앞산 너머까지도 들리는 것인지, 멀리서 옆집 개들이 먼저 낯선 음성에 컹컹거린다. 커튼이라도 열 듯 어둠 속에서 복실이가 다가온다. 온 몸이 활처럼 휘며 꼬리를 흔든다. 내게 너만큼의 열정이 있었다면 사랑을 지킬 수 있었을까?

텁텁! 복실이는 두 번 씹는 경우가 없다. 언제나 그렇다. 단호하게 고기 점을 식도로 넘겨 버린다. 딱딱한 슬픔 따위의 소화하기 어려운 것들을 쓸쓸하게 되새기는 일도 없다. 언제나 자신의 현재에 잘 적응한다. 인간인 나보다 우세한 유전자도 지니고 있다. 나도 고독이나 그리움 따위를 텁텁! 삼켜 삭이고 싶다. 한 밤 계단에 앉아 복실이와 무언의 대화를 나눈다.

이럭저럭 달팽이들이 이동을 마쳤는지, 평형이 맞지 않는 행성은 자꾸 어지럽게 일렁인다. 나는 걸음마를 배우는 허수아비처럼 휘적휘적 계단을 올라간다. 난간에 모인 빗방울들이 쪼르르 흘러 바닥으로 툭! 떨어진다. 이젠 소실점으로 빨려 들어간 기원전의 언젠가, 가슴 속의 묵직한 우울이 바닥에 툭툭! 떨어지는 것도 보았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계단을 다 오르고 침실의 문을 열면, 오늘은 또 꿈의 터널 속으로 사라진다. 막연한 상상 속의 종말은 살아있는 매일, 현실로 다가온다. 삶은 토너먼트가 아닌 리그전이다. 오늘 실패한 우리에게는 ‘다시’라는 기회가 남아 있는 것이다. 희망이란 그 정도다. 충분하다면 충분할 수도 있고, 모자란다면 욕심일 밖에 도리는 없다.

바닥없이 가라앉고 있는 잠자리에 누워서도 좀 채로 잠들지 못한다. 진공관 속에 Diana Krall이 조그맣게 들어가 When I Look in your eyes 라고 부드럽게 속삭인다. 마침내 쓸쓸한 내가 버터처럼 녹아 땅 밑으로 흘러내린다. 툭툭! 창밖에 낙숫물 떨어지는 소리가 공간 가득 메아리친다.

잠깐 눈을 뜨고 바라보는 어둠 속의 비현실은, 귀까지 먹먹한 고독으로 다가든다. 몇 가지 그리운 풍경이 울긋불긋한 요지경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천천히 천장을 지나고 결국 가슴 가득 차오른다. 울컥! 목구멍에 걸린 것은 견디기 힘든 연민이겠지.

그리운 것들이 슬픈 것인가, 슬픈 것들이 그리운 것인가? 몇 번이고 입안에서 질문하지만 잘 모르겠다. 별 없는 밤, 달팽이를 헤아리고 있다.



들녘의 고요한 별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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