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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통신 V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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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김명기
  • 작성일 : 08-04-08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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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통신 VII



첫 번째 소식 - 벚꽃 통신

다른 해보다 열흘먼저 피었다카이.

볼에 와 닿는 봄바람이 아직은 쌀쌀한 이른 아침. 활짝 핀 벚꽃나무 아래에서, 텃밭에 직접 재배한 향기 진한 돌미나리를 손질하며 어른은 아쉬워하신다. 다른 해에는 보름에 맞추어 꽃이 피어, 커다란 달 아래 자태를 뽐내는 벚꽃이 절경이라는 말씀. 나는 상상으로 부족한 2%를 채운다.

벚나무 아래 가만히 귀 기울이면 어디선가 조그만 사이렌 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들어보니 벚꽃 나무엔 벌들이 가득하다. 벚나무가 아니라 벌 나무다.

저것들도 겨울나려면 지금부터 부지런히 꿀을 따야제.

사람 사는 세상, 아무리 복잡하다 해도 자연은 순리대로, 순서대로 흘러간다. 봄이다. 꽃에, 달빛에도 취하기 일쑤다. 사방으로 춤추는 봄바람에 꽃향기가 솔솔 불어오고, 골 아래 산사에서는 노스님의 독경소리가 들려온다.

두 번째 소식 - 짧지만 너무 좋은.

오늘은 날씨도 좋으니까, 밖에서 드시지요.

삼동초와 돌미나리를 다듬어 대나무 바구니에 담고, 된장찌개를 내온다. 시원한 오이냉채와 싱싱한 야채 무침. 아무래도 뭔가 섭섭하다.

우리가 소가? 풀만 멕이게.

어른의 농담으로 농협에 가서 목살 한 근을 사온다, 자 방금 밭에서 딴 싱싱한 야채들과 기름기 뺀 멋진 목살. 이러니 소주가 빠질 수 없다.

해장 하시죠.

이래서 농촌의 아침 식탁엔 소주잔이 오고간다. 하루가 길고 할일도 많으니, 그저 한 두 잔씩들이다. 그래도 꽃향기 섞인 상큼한 바람, 친절한 햇살 속의 아침식사는 우리 삶의 가장 찬란한 축복 중의 하나다. 한겨울 길고 지루한 을씨년스러운 시간을 넘어, 지금 눈앞의 기적을 보여주는 벚나무처럼. 이 순간, 비록 짧지만 너무 좋기에.

세 번째 소식 - 두한족열위팔분

두한, 족열, 위팔분이라카이.

식사 때면 어른이 늘 하시는 말씀이다. 머리는 차게 발은 따듯하게, 음식은 80% 정도만 먹으라는 선현들의 지혜다. 그리곤 이렇게 말씀하신다.

근데 말이야. 내가 아는 의사는 음식을 저울로 달아 먹었는데, 위암으로 죽었다카이. 내도 평생 두한족열위팔분을 지켰는데, 지금 당뇨로 고생하고 안 있나?
아이고 젊었을 때는 어디 그랬소? 고기를 12인분이나 먹고, 내기로 계란 50개 묵고, 술도 내키는대로 마셨제. 그기 다 젊었을 때 몸을 함부로 굴려 그런기라.
그런가?

마나님의 날카로운 지적에 어른은 뒷머리를 긁으신다. 정말 이 세상에 새로운 것은 없다. 어른 말씀만 잘 들어도 인생이 제대로 굴러갈 수 있다. 그런데도 나를 비롯한 젊은 바보들은 늘 비싼 대가를 치르고서야 교훈을 얻곤 하는 것이다. 선현의 말씀 하나하나가 보석처럼 빛나는 것을 다시 발견하기 시작한 나이가 되었다. 그것만도 얼마나 다행인지.



네 번째 소식 - 숲 속의 사람들

글을 쓰다 보니, 가끔 사람들이 숲으로 찾아온다. 외로운 사람들이다. 그들은 나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소주잔을 기울이고, 낡은 L.P. 를 뒤적여 음악을 듣고 모처럼의 미소를 짓는다. 그러나 그들의 외로움이 소멸된 것은 아니다. 전혀 아니다.

다만 그들은 나도 그들만큼 외로운 존재라는 것. 또는 내가 그들보다 더 외로운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돌아가는 것이다. 혹은 이 세상에 외롭지 않은 사람 따위는 없다는 것을 한 번 더 확인하고 안도하게 될지도 모른다. 어쨌든 외로운 사람이 외로운 사람을 만났고, 여전히 외로운 채로 돌아가게 되는 것.

사람들 사이에 머문다는 것.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다는 것. 그런 것으로 고독이 사라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 일은 매일아침 거울을 보며, 나는 할 수 있어. 라고 나직이 외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결국 오늘 역시 아무 것도 할 수없는 사람들의 공허한 다짐.

어쩌면 그들은 나와 대화를 나눈 것이 아니라, 말없이 그들을 바라보던 숲 속의 나무들. 그 나무들 사이를 조용히 스치던 바람. 겨울 밤하늘의 또렷한 별빛. 탁탁 소리를 내며 타오르던 장작불을 바라보며, 모처럼 스스로의 내면과 이야기를 나눈 것일지도 모른다. 부디 내면의 자신과 화해라도 했으면 좋겠다.

어느 날 갑자기 나라는 존재의 자아를 느끼게 된 유년시절의 첫 기억부터, 우리는 단 한 번도 단단하고 확고한 고독에서 벗어날 수 없다. 현실과 삶과 고독은 스위스 시계의 톱니바퀴처럼 잘 맞물려 돌아가는 것이다. 꾸준하고 성실하게 고장 나는 일도 없이.

나는 그 고독을 글로 그려낸다. 매일 새로 돋아나는 고독을 그려낸다. 그래서 글을 쓴다는 것은 외로운 일이다. 무명작가가 글을 쓴다는 행위는 어쩌면 세상에서 제일 외로운 일인지도 모른다. 한겨울, 괴로운 꿈에서 깨어나 눈 내리는 설원에 홀로 서게 된 개구리처럼. 오늘은 문득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지나친 자기연민인가? 그래도 할 수 없다.

마지막 소식 - 사랑은 뽕짝처럼

이제 낼모래면 무덤이다.

어른들은 머지않아 돌아가실 것을 입에 달고 사시지만, 음악은 늘 빠른 템포의 뽕짝이다. 늘어지고 애원하는 음악은 영 파의다. 아무래도 좀 더 활기차고 건강하게 사시려는 의지의 반영일 것이다. 덕분에 얼치기 농부인 나도 뽕짝에 어깨를 들썩이며 수레를 끌고 지나고, 삽질을 하고, 말똥을 치우고, 삼동초 쌈을 볼이 터지도록 입에 우겨 넣는다. 슬슬 뽕짝 매니아가 되어 가는 것이다.

남자들이 징그러운 소리 하는 것은 어쩐지 듣기 좋아요.

예전에 어떤 여인이 그렇게 말하던 것이 생각난다. 맞다. 우리 모두가 싸르트르나 보봐르 부인이 아닐진대, 사랑 앞에서 실존주의니 순수이성비판이니를 운운하는 자는 오히려 머저리다. 그저 마음에서 나오는대로, 그 순간의 진실을 담아 말하는 것. 그 이상의 고백이 어디 있으랴.

하늘이 내게 천년을 빌려 준다면, 천년을 하루같이 당신을 위해 살겠소. (뽕짝가사) 단 하루를 살더라도 당신과 함께라면 (뽕짝가사)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뽕짝가사) 좋다. 벚꽃이 온 세상을 뒤덮은 봄밤. 남자가 차분하고 그윽한 눈빛으로 이렇게 말해준다면, 어떤 여자라도 이 유치한 대사에 넘어가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아니라면 평생 혼자 살아야지. (미국에서는 끝까지 터지지 않는 팝콘 옥수수를 노처녀라고 한대나 뭐래나?)

봄, 사랑에 취한 젊은이들이 여의도 윤중로를 거닐면서 뽕짝 가사 같은 소리들을 하건 말건, 팔공산 깊은 골 중년 초보 농부는 건초수레를 밀며 혼자 흥이 나서 흥얼흥얼이다. 인생도 뽕짝처럼, 사랑도 뽕짝처럼.


고성(古城) 아래 별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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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박진호님의 댓글

박진호

글도 사진도 너무 좋군요..

김명기님의 댓글

김명기

이제 시골살이에 슬슬 재미를 붙여가는 중입니다. 눈을 통해 가슴까지 산골이 자리 잡으려면 아직도 조금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

홍경표님의 댓글

홍경표

'사람 사는 세상, 아무리 복잡하다 해도 자연은 순리대로, 순서대로 흘러간다.'
삶이 외롭다는것도 인간의 순리겠지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김명기님의 댓글

김명기

그 고독을 이겨내야지만, 삶의 쇼생크 탈출이 가능하겠지요. ^~^

cho sungju님의 댓글

cho sungju

낼은 아마도 그 허름한 식당에서
우렁 강된장 비빔밥을 먹게될 듯.....음

김명기님의 댓글

김명기

그 허름한 식당은 어디신지... ^~^
어쩌면 우리를 충분하게 하는 것들은 의외로 사소한 것들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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