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페이지 정보
- 작성자 : 박_상 욱
- 작성일 : 08-04-03 09:03
관련링크
본문
아버지 서재엔(서재라고 하기엔 좀 뭐한 공간이었지만) 언제나 시계책과 자료들로 언제나 가득차 있었다.
태어나서 한번도 허락없이 열어본 적이 없는 아버지의 책상 서랍을 돌아 가신뒤로 열었다.
아버지가 돌아 가신뒤로 어머니가 쓰고 계셨지만..
빳빳한 오천원권 지폐 한묶음을 책속에 끼워 넣고, 대충 옷가지 몇개를 배낭에 쑤셔 넣고서 집을 나섰다.
어쩌겠다는, 어디로 가겠다는 목적도 없이....
마음은 오히려 홀가분함에 불안감도 들지 않았다.
이 나이가 되도록 아버지 앞에 성적표를 보여준 일도 없었 지만 아버진 무엇 하나 간섭이나 또래 아이들이 겪는 흔한 꾸중 한번 하시지 않으셨다.
어릴때는 주어온 자식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기억나는 것은 아버지께서 심부름을 혹독하게 시키시는 것이다.
어디가서 무얼 해가지고 오라는 말씀 뒤엔 언제나 두번 이상을 다녀오곤했다. 어린 마음에 불만도 많았다.
한번 갈때 정확하게 무엇무엇 물어보고 오라고 하시면 될것을 다녀오면 덧붙이시는 것이다.
'그래서 그냥 왔니?'
'이것은 물어보지도 않고?'
또 갈수밖에 없었던 아버지의 물음에 궁색한 변명은 안 통했다. 지금 생각하면 하나의 훈련이었던 것 같다.
아랫사람에게 내가 그렇게 하게 됐으니까....
일을 성공리에 마무리짓기위해 안되는 이유를 확실하게 알아 오든지 아님,되게끔 스스로 알아서 풀기를 원하셨던 아버지의 교육방법이셨다.
다른집 아버지처럼 일찍 일어나라, 착한 학생이 되어야 한다라든지 성적이이게 뭐냐며 꾸지람 한번 듣고 싶을 정도였으니....
난 어릴때 잔소리가 그리웠다.잔소리는 어머니의 몫 이었으니까...
아버지는 성격이 불 같으셨고, 누구에게든 지지 않으시는 배짱 두둑하신 분이셨다. 난 그렇게만 아버지를 알았고 대부분의 사람들도 대단한 양반이라고만 말씀하시는 걸 들었으니 얼추 강한 면만 각인 된 모양이었다.
돌아가신 뒤에 알아버린 아버지의 또 다른 성격이 한동안 날 감동시키셨다.
고향에서 아버님 장례후에 고향 구석 구석을 인사차 돌아다닐때 한번도 뵙지 못했던 그 분들 입 에서 나오는 말들은 '선친은 정말 대단한 인물이셨지...정 도 많으셨고' '아이고, 참으로 은혜를 입었는데 돌아가셨 을때 문상 한번 가보지도 못하고..
그럴때면 난 인사대신 그 집에서 주는 농산물을 차에 싣고 오는 수밖에 없었다.
서울에선 들어보지 못한 말을 시골 구석 아버지 또래의 분들에게 듣게 되는또 다른 아버지의 성격...
세상을 뜨신지 18년이 되었지만 언제나 아버지의 거대한 산은 가슴에서 없어지질 않는다.
태어나서 가출은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3개월을 난 자유의 몸이라고 여기며 영장을 받기까지 떠돌며 내 젊음의 방향과 목적도 없는 지겨운 세상을 이겨보려 안간 힘을 쓰면서 보냈다. 입대 3일전 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서는 바로 아버지 에게로 찾아갔다.
난 아버지 무덤앞에 끓어 앉았지만 무얼 잘못했는지 정확하게 판단이 되지 않았다. 만약 잘못을 아느냐고 물으시면 대답을 어떻게 해야할지 아버지 앞에 설때까지 할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세상 구경 잘했냐?"
"...예"
"생각대로 마음 먹은대로 다하고 들어왔니?"
"...."
"가서 씻고 푹 쉰 다음 입대 준비하거라"
너무 간단한 질문 몇마디... 얼굴에 미소까지 지으시는 아버지를 느끼면서 나는 안도보다 가슴에 응어리 져있던 그 무언가가 서러워 그렇게 한참을 아버지의 무덤 앞에서 흐느꼈었다.
아버지의 무덤은 생전 정정하셨던 모습대로 잔디가 파랗게 자라서 탄탄해보였다.
탁 트인 무덤앞으로 멀리 운무에 가린 산자락 줄기가 보이고 저녁 무렵 무덤가에 앉아 하늘을 보면 노을은 그렇게 아름다울수가 없다.
고향을 갈때면 아버지 무덤을 찾아간다. 소주 한병을 사들고서....
살아계실때 주법은 배워주셨지만 한번도 함께 술을 마셔보지 않은 서운한 감정과 살아 생전 그리 즐기시진 않았지만 소주를 한잔드리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혼자 힘들때 난 아버지께 말씀드린다.
대답은 없으시지만 이 아들의 세상사는 이치가 바르건지 아버지에게 묻고 싶은 것이다.
살갗운 대화 한번 없었던 아버지와의 관계를 회복시키고 싶은 어설픈 효도 행식을 빌리는 나의 이기적인 애정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무덤에 자란 풀을 베어 내면서 아버지의 봉분을 어루만지며...
거구의 아버지를 한뼘의 땅속에 묻고서 몇날이 지나 늦은 겨울비가 쏟아졌다.
앞이 보이지 않는 비오는 밤중에 봉분이 흘러 내릴까봐 비닐을 들고서, 평소 아버지를 형이 아닌 마치 아버지처럼 믿고 따랐던 막내삼촌이 무덤을 가보니 벌써 비닐이 씌워 져 있었고, 아침 일찍 무덤을 가보니 비닐을 치우고 있는 어머님을 만나고 뒤 이어 올라오시는 몸이 불편하신 고모님을 보고, 세 분은 무덤가에서 또 한번 우셨다는 얘기를 훗날 듣고서 난 아직 멀었구나...
한동안 나 자신을 스스로 인정하지 못했지.
아버지 무덤을 갈때마다 차 트렁크에 낫을 사 둬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아직도 실현하지 않는 이기적인 아들의 사는 모습에 또 이런 말씀하실 게다
.
.
.
.
'아들아...!! 세상 구경 잘하고 있니?
오늘은 어머니를 모시고 아내와 같이 중국여행을 갑니다.
나이 40이 되서 처음으로 이런 형식을 빌려 효도를 하게되네요.
어젯 밤 짐 정리를 하다가 옛날에 적었었던 노트가 발견되었습니다.
대학교 3학년때 아버지가 갑작스레 돌아가시고 한참 방황을 하던 시기에
문득문득 그때마다 휘갈겨놓았던 흔적들이었죠.
한참을 보고 있노라니 갑자기 내 아버지처럼 제 아이에게 자랑스럽고 좋은 아빠가 될수가 있을까?...
이런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침부터 너무 무거운 얘기가 아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즐거운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태어나서 한번도 허락없이 열어본 적이 없는 아버지의 책상 서랍을 돌아 가신뒤로 열었다.
아버지가 돌아 가신뒤로 어머니가 쓰고 계셨지만..
빳빳한 오천원권 지폐 한묶음을 책속에 끼워 넣고, 대충 옷가지 몇개를 배낭에 쑤셔 넣고서 집을 나섰다.
어쩌겠다는, 어디로 가겠다는 목적도 없이....
마음은 오히려 홀가분함에 불안감도 들지 않았다.
이 나이가 되도록 아버지 앞에 성적표를 보여준 일도 없었 지만 아버진 무엇 하나 간섭이나 또래 아이들이 겪는 흔한 꾸중 한번 하시지 않으셨다.
어릴때는 주어온 자식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까.
기억나는 것은 아버지께서 심부름을 혹독하게 시키시는 것이다.
어디가서 무얼 해가지고 오라는 말씀 뒤엔 언제나 두번 이상을 다녀오곤했다. 어린 마음에 불만도 많았다.
한번 갈때 정확하게 무엇무엇 물어보고 오라고 하시면 될것을 다녀오면 덧붙이시는 것이다.
'그래서 그냥 왔니?'
'이것은 물어보지도 않고?'
또 갈수밖에 없었던 아버지의 물음에 궁색한 변명은 안 통했다. 지금 생각하면 하나의 훈련이었던 것 같다.
아랫사람에게 내가 그렇게 하게 됐으니까....
일을 성공리에 마무리짓기위해 안되는 이유를 확실하게 알아 오든지 아님,되게끔 스스로 알아서 풀기를 원하셨던 아버지의 교육방법이셨다.
다른집 아버지처럼 일찍 일어나라, 착한 학생이 되어야 한다라든지 성적이이게 뭐냐며 꾸지람 한번 듣고 싶을 정도였으니....
난 어릴때 잔소리가 그리웠다.잔소리는 어머니의 몫 이었으니까...
아버지는 성격이 불 같으셨고, 누구에게든 지지 않으시는 배짱 두둑하신 분이셨다. 난 그렇게만 아버지를 알았고 대부분의 사람들도 대단한 양반이라고만 말씀하시는 걸 들었으니 얼추 강한 면만 각인 된 모양이었다.
돌아가신 뒤에 알아버린 아버지의 또 다른 성격이 한동안 날 감동시키셨다.
고향에서 아버님 장례후에 고향 구석 구석을 인사차 돌아다닐때 한번도 뵙지 못했던 그 분들 입 에서 나오는 말들은 '선친은 정말 대단한 인물이셨지...정 도 많으셨고' '아이고, 참으로 은혜를 입었는데 돌아가셨 을때 문상 한번 가보지도 못하고..
그럴때면 난 인사대신 그 집에서 주는 농산물을 차에 싣고 오는 수밖에 없었다.
서울에선 들어보지 못한 말을 시골 구석 아버지 또래의 분들에게 듣게 되는또 다른 아버지의 성격...
세상을 뜨신지 18년이 되었지만 언제나 아버지의 거대한 산은 가슴에서 없어지질 않는다.
태어나서 가출은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3개월을 난 자유의 몸이라고 여기며 영장을 받기까지 떠돌며 내 젊음의 방향과 목적도 없는 지겨운 세상을 이겨보려 안간 힘을 쓰면서 보냈다. 입대 3일전 난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서는 바로 아버지 에게로 찾아갔다.
난 아버지 무덤앞에 끓어 앉았지만 무얼 잘못했는지 정확하게 판단이 되지 않았다. 만약 잘못을 아느냐고 물으시면 대답을 어떻게 해야할지 아버지 앞에 설때까지 할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세상 구경 잘했냐?"
"...예"
"생각대로 마음 먹은대로 다하고 들어왔니?"
"...."
"가서 씻고 푹 쉰 다음 입대 준비하거라"
너무 간단한 질문 몇마디... 얼굴에 미소까지 지으시는 아버지를 느끼면서 나는 안도보다 가슴에 응어리 져있던 그 무언가가 서러워 그렇게 한참을 아버지의 무덤 앞에서 흐느꼈었다.
아버지의 무덤은 생전 정정하셨던 모습대로 잔디가 파랗게 자라서 탄탄해보였다.
탁 트인 무덤앞으로 멀리 운무에 가린 산자락 줄기가 보이고 저녁 무렵 무덤가에 앉아 하늘을 보면 노을은 그렇게 아름다울수가 없다.
고향을 갈때면 아버지 무덤을 찾아간다. 소주 한병을 사들고서....
살아계실때 주법은 배워주셨지만 한번도 함께 술을 마셔보지 않은 서운한 감정과 살아 생전 그리 즐기시진 않았지만 소주를 한잔드리고 싶기 때문이다. 그리고 혼자 힘들때 난 아버지께 말씀드린다.
대답은 없으시지만 이 아들의 세상사는 이치가 바르건지 아버지에게 묻고 싶은 것이다.
살갗운 대화 한번 없었던 아버지와의 관계를 회복시키고 싶은 어설픈 효도 행식을 빌리는 나의 이기적인 애정 표현이라 할 수 있다.
무덤에 자란 풀을 베어 내면서 아버지의 봉분을 어루만지며...
거구의 아버지를 한뼘의 땅속에 묻고서 몇날이 지나 늦은 겨울비가 쏟아졌다.
앞이 보이지 않는 비오는 밤중에 봉분이 흘러 내릴까봐 비닐을 들고서, 평소 아버지를 형이 아닌 마치 아버지처럼 믿고 따랐던 막내삼촌이 무덤을 가보니 벌써 비닐이 씌워 져 있었고, 아침 일찍 무덤을 가보니 비닐을 치우고 있는 어머님을 만나고 뒤 이어 올라오시는 몸이 불편하신 고모님을 보고, 세 분은 무덤가에서 또 한번 우셨다는 얘기를 훗날 듣고서 난 아직 멀었구나...
한동안 나 자신을 스스로 인정하지 못했지.
아버지 무덤을 갈때마다 차 트렁크에 낫을 사 둬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아직도 실현하지 않는 이기적인 아들의 사는 모습에 또 이런 말씀하실 게다
.
.
.
.
'아들아...!! 세상 구경 잘하고 있니?
오늘은 어머니를 모시고 아내와 같이 중국여행을 갑니다.
나이 40이 되서 처음으로 이런 형식을 빌려 효도를 하게되네요.
어젯 밤 짐 정리를 하다가 옛날에 적었었던 노트가 발견되었습니다.
대학교 3학년때 아버지가 갑작스레 돌아가시고 한참 방황을 하던 시기에
문득문득 그때마다 휘갈겨놓았던 흔적들이었죠.
한참을 보고 있노라니 갑자기 내 아버지처럼 제 아이에게 자랑스럽고 좋은 아빠가 될수가 있을까?...
이런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침부터 너무 무거운 얘기가 아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즐거운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추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