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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어느 학도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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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박삼정
  • 작성일 : 11-06-18 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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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어느 학도병

1950년 6. 25동란으로 북한인민군이 남한으로 쳐들어와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전쟁을 치르고 있을 즈음에 내가 다니던 부산의 중학교도 휴교령이 내렸고,
나는 부산의 이모집에서 시골의 우리집으로 내려와 있던중, 9월30일자로 학도병의 징집영장을 받았다.
호적으로는 만18세였으나,
형이 한 돌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 태어난 내가 형의 이름으로 불리면서 따로 출생신고를 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사망률이 워낙 높아 출생신고를 늦추거나 큰아들을 잃어면 둘째가 호적을 그대로 물러 받는 일이 허다하였기에,
나는 1932년생이 아니라 1934년생의 16세 어린나이에 학도병으로 참전하게 되었다.

조부님께서 일본학교에 보내지 않으려고 집에서 동네아이들 몇 명을 불러다가
손자인 나와 함께 한글과 한자, 그리고 산수 등을 가르쳐 주셨다.
나는 다른 아이들 처럼 학교를 다니고 싶었으나 엄한 조부님의 뜻을 거슬릴 수가 없었다. 그러다 9세의 나이로 초등학교 2학년으로 입학을 하였고,
초등학교는 물론 중학교엘 진학하여서도 영어를 비롯하여 전과목에 걸쳐 반에서 1등을 하였다.
시골에서는 신동이 났다며,
앞으로 큰 인물이 되겠다는 소문이 자자한데다 형이 죽고 난 뒤 후손이 귀하여 외동아들인 내가 전쟁에 나간다니 우리 집은 초상집 분위기였다.
입대를 말리는 부모님께 나는 몸 성히 잘 다녀오겠다는 인사를 드린 후 집결지인 읍내 중학교 운동장으로 갔었다.

다음날 부산항에서 미군의 수송선에 태워졌고,
나는 밤새 배멀미로 고생하다 아침에 내린 곳이 바로 일본 모지 항 이었다.
그리고 뱃부의 어느 산,
임시로 만든 훈련소에서 미군들은 학도병들이 입고 있는 옷을 홀랑 벗기고,
물로 샤워를 시킨 후 하얀 가루를 앞에서 한번,
돌아서서 한번 뒤집어 씌웠다.
그게 DDT소독약이었다.
이어서, 사이즈가 큰 미 군복을 지급받아 입고는 4주간의 맹훈련을 받았다.

밥 대신 빵과 고기를 배불리 먹고 영어를 듣는 어린 나는
모든 게 신기하고 재미가 있었으나 점심후 휴게시간이나 잠자리에 들 때는
부모님과 고향이 그리워서 울면서 잠이 들곤 하였다.
훈련이 끝나자 말자,
미군보병연대에 편입된 나는 10월26일 원산항 상륙작전에 투입되었다.
원산에서 두만강까지 북한 인민군의 저지 없이 수월하게 하루 50킬로미터씩 진군하였다.
11월 초순 압록강에 거의 도달하였을 때,
중공군 40만 명이 인해전술 식으로 쏟아져 내려왔다.
우리부대는 다시 남하하여 11월 중순에 장진호에 다다랐다.

계곡의 앙상한 나뭇가지에 몇 개씩 붙어있는 단풍잎이 맑디 맑은 물에 반영되어
전쟁 중에도 어린 나의 눈에는 참으로 아름답게 비쳐졌다.
몇 개 남지 않은 단풍잎은 목숨이 촌각에 달린 내 신세 같기도 하고,
집 떠난 지 벌써 두 달로 부모님과 고향 동네가 한없이 그리워지면서 또 눈물이 맺혔다.
계곡한쪽은 철로이고,
한쪽은 도로였는데 중공군이 철로의 곳곳에 매복하여
우리를 향하여 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져 댔다.
총은 일본군이 개발하였던 4발 장전의 구구식 장총에,
수류탄은 네모난 쇠 덩어리에 자루를 달아 손잡이로 던졌는데,
이게 생각보다는 멀리 날라왔다.

총알을 피하려고 엎드려서 일어나지 않는 미군들을 향하여 중사는 총을 한방 쏘며 외쳤다.
GET UP, GO! GO! 미군들은 엎드려서 일어 날 기미가 없다.
IT'S ORDER. 명령에 불복종하면
즉석에서 총살형에 처해지므로 IT'S ORDER라는 말에 모두들 벌떡 일어나
목숨을 내어놓고 후퇴를 강행하였다.

미군은 한번에 8발 장진 되는 최신식의 M1 소총과 세계 제2 차 대전에서 쓰던 박격포와 탱크를 앞세워서,
대대장과 중대장들은 진격을 할때는 앞장서서 지휘를 하고,
후퇴할 때도 뒤에서 적들과 싸우면서 부대를 안전하게 퇴각을 시키면서,
중대장과 소대장은 전사자와 부상자를 가리기 위하여 몸을 직접 만져가며
부상자는 조치를 취하고,
사망자로 부터는 군 표를 챙겼다.
그것도 총알이 연방 날라와 여기 저기 마구 박히는 극한상황에서
본연의 의무를 다 하기 위하여 목숨도 아끼지 않었던 그 분들을 잊을 수 없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이게 바로 리더쉽이고,
제1방어선, 2방어선, 3방어선 작전과 미군의 이러한 전략들이
기업에 접목되어 경영학의 근간을 이루고 있음을 대학의 경영학원론에서 배우게 되었다.
리더는 온갖 위험에 흔들림없이 고통을 인내하고,
스스로를 자제하여 품위를 지키면서 항상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행동원리를
나는 이때 똑똑히 지켜보았다.
부하들을 배려하는 리더의 마음 씀씀이와
목숨에 촉각에 걸려있는 위험한 상황에서도 본분의 의무를 다하는 위대함에
나는 고개숙여 존경의 념을 갖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1950년,
나는 만16세의 어린나이에 미군의 지휘, 명령체계와 조직력
그리고 미국인 중대장의 위대한 리더쉽에 터득하면서
엄청 죽어가는 전장터에서 운좋게도 중대장님과 나는 살아 남았다.
통신병이 총에 맞자 아버지뻘이나 되시는 미국인 중대장은
나에게 통신장비를 내밀면서,
등에 지는 동작을 해 보이면서 '돌아라(TURN AROUND)'!
내가 미처 못 알아 듣고 주춤거리자 '명령이다(IT'S ORDER)' 라고 고함을 질렀다.

나는 어릴 때 부터 지게를 지고 다녔으므로 장비의 무게는 견딜 수 있었으나,
높다란 안테나가 흔들리는 데는 몸의 중심을 잡을 수가 없어
기우뚱 거리면서 세 바퀴나 돌았다.
'됐어, 따라와(OK, FOLLOW ME!)'
하면서 총알이 날라오는 길을 앞장서 나가셨다.
겁이 났으나 키 큰 미국인 중대장만 믿고 어리고,
키 작은 나는 총총 걸음으로 흔들리는 안테나에 넘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죽을 힘까지 다내어 기를 쓰고 따라갔다.
두어 시간 후에 미군병사와 교대를 시켜주었으나
지금 되새겨 생각해도 그 당시처럼 오금이 저려온다.

날이 어두워져서야
어느 초등학교교정에 도착을 하였고,
우리 부대원들 중 반은 보이지 않았다.
(공식발표는 18일간의 장진호전투에서 미군병사 5천명 사망.)
밤새 폭격과 총성이 울려댔고,
11월말의 밤 추위가 뼛속을 파고 들어도 모두들 잘도 주무셨다.
아니, 너무 지쳤기에 골아 떨어졌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한참 자고 있는데 새벽녘에 누가 나를 깨웠다.
한국인 중에서 영어를 제법 알아 듣는 나를 정찰대의 한국인 동반자로 차출한 것이다.
중대장이 정찰대원 8명에게 직접 위스키를 한잔씩 따라주셨고,
군목은 신의 가호를 빌어 주셨다.
산등성이 까지 갔다가 정찰을 무사히 끝내고 돌아오니,
그 때까지 중대장과 군목은 그 자리에서 우리 정찰대가 무사히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아무튼 장진호의 치열한 전투에서 벗어나 이틀을 꼬박 걸어서
흥남 가까이 도달하니 트럭이 대기하고 있다가
우리부대원들을 태우고 흥남부두로 향했다.
이 때 공중에서는 중공군전선에 정찰기가 먼저 폭파지점에 연막탄을 터뜨리면,
폭격기가 포탄을 마구 쏟아 붓고,
육지에서는 계속 밀려오는 중공인민군을 저지하기 위하여
박격포와 탱크는 적진을 향하여 계속 쏘아대므로 엄청난 굉음이 울리고 또 울려서
고막이 아플 지경이었다.

한편 흥남 부두에는 미군 수송선을 서로 타겠다고 피난민들 끼리 서로 밀치고 밀리는 아비규환의
또 다른 전장이 벌어 지고 있었다.
(인터넷에서 장진호 검색으로 미군제7연대의 원산항 상륙에서 부터 장진호전투에서 퇴각까지의 상세자료로
그 당시의 상황을 참고 바랍니다.)
우리부대는 수송선으로 부산항에 상륙하였다가 다시 임진강까지 진격하여 올라 갔다.
그리고 전쟁이 소강상태로 머물자 학도병들은 귀향조치를 받게 되었다.

이리하여 다시 중학생의 신분으로 돌아와 학교를 다니게 되었으나,
5학년 어느 날 다시 군입대 영장을 받았다.
내가 학도병으로 갔다 온 근거가 없기 때문에 무조건 입대를 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정식으로 육군에 입대하여 군복무를 두 번 하는 웃지 못할 사연을 나는 갖고 있다.

물론 입대후 학도병으로 복역한 기간만큼은 인정을 받아 조기 전역을 할 수 있었으나,
요즘에 와서 생각해도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일이지만
그 당시의 행정력으로서는 충분히 이해가 가는 바이다.

나는 학도병으로 1950년의 전쟁때,
만16세의 체구도 적은 어린시절에 포탄을 뚫고 살아왔던
그 당시를 가슴에 품고 여지껏 살아왔다.
그리고 영어 좀 알아 듣는다고 중대장 곁에서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진격 때는 항상 대원들 앞에 섰고,
후퇴할 때는 뒤에서 시신의 군표를 떼며 따라 다녔어도 죽지 않고 살아 남은 건,
총알을 피하려는 소극적인 자세가 아닌 당당하고 적극적인 정신자세가 나를 살렸고,
또 운명이 나를 지켜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미군 중대장님의 철저한 지휘관 정신을
평생 나의 삶과 성공에너지 지표로 삼았다.
그러나 두고 두고 후회하는 것은 영어를 제대로 알아 듣지 못하는
한국군에게 영어로 명령을 전달하여 당황하게 하였거나,
'찰나에 불과한 시간차이로 미처 피하지 못하여 총알받이가 되게 하지나 않았나'
하는 나의 순간적 실수가 가끔씩 마음에 걸리는게,
나의 교만하고 철저하지 못한 본분의 정신과 부끄러웠던 행위도 결코 잊지 않고 있다.

그러기에 여지껏 살면서 항상 나 자신에게 당당하고,
남에게는 겸손 하려고 무척 노력하였다.
아니 나의 자만심을 누르기 위하여 엄청 애를 먹으면서 살아왔다고 표현하고 싶다.
그래서 인생에 무모한 도전을 하지 않아 큰 성공은 거두지 못하였으나,
나름데로는 나의 직장을 크게 발전시킨 공로로 전문경영인인 사장에 까지 역임 하였고,
62세 정년퇴임때는 ‘이제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 하는 고민에 빠졌다.
결론은 여지 껏 살아온 것은 연습이고 인생의 황금기는 지금부터라고 설정 하였다.

그리고는 무역대행회사를 설립하여 15명의 젊은 사람들과 함께 일하므로
나는 나날이 젊어지는 기분으로 매일 아침 8시에 출근하여 저녁 7시에 퇴근하고 있다.
지금도 1950년,
학도병시절의 뼈저린 아픔을 생각하면 용기가 절로 생겨나면서
웬만큼 힘드는 일도 수월하게 견더내고 있다.
물론 나 뿐만이 아니라 우리들 세대 모두가 6.25동란을 겪으면서
의식이 더 빨리 깨어 났었고,
월남전까지 연결되면서 보리 고개를 넘어
전국민이 배불리 먹는 한강의 기적을 일구는데,
365일 휴일없이 모두들 일하였던 주역들이었므로,
지금도 젊은 세대에 얹혀 살게 아니라
제 역활을 찾아 경제활동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아직도 사용되지 않은 나안의 잠재능력을 끌어내기 위하여 평생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주변에 일찍 퇴직을 하시고는 직업없이 소일하시는 분들에게는
"인생에 있어 60세 이전보다는 그 이후를 황금기로 만들어 사는 사람이 정말 잘 사는 사람,
행복한 사람"이라고 감히 말씀을 드리곤 한다.

(어느 선배님의 경험담을 요약하여 글로 옮겼습니다. )
2008년 6월 박 삼정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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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이재국님의 댓글

이재국

격동기에 훌륭한 삶을 살으신 어느 선배님게 존경과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도 초등학교 5학년때 625 한국전쟁을 격었습니다.

장흥석님의 댓글

장흥석

아~~! 몇일후면 6.25 군요.
상기하자 6.25!
잊지말자 6.25!

잘보았습니다^^

신 정식님의 댓글

신 정식

좋은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저는 이런 이야기를 무슨 의도를 갖고 있는 픽션 소설 정도로 들으려 하는 세대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고...
그런 세대들을 이용하여 이익을 구하려는 인물들을 수도 없이 보면서 한심한 생각을 많이 하게됩니다.
그들을 장진호 전투 같은데 내 보내어 많이 겪어보게 했으면 하는 엉뚱한 생각마저 하기도 하고요...
며칠 지나지 않아 6-25 기념일인데 올해엔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손창익님의 댓글

손창익

너무도 감명깊은 전쟁 경험담입니다.
한편의 영화로 촬영하면 더욱 좋겠습니다.
글을 읽으면서 총알과 박격포탄이 날아드는 전쟁터가 머리에 떠오릅니다.

또한 전쟁터에서 총을 쏘고 계시는 선친의 모습도 떠오름니다.
돌아가신 선친께서도 청연시절 해금강 전투에서 총상을 입고서는 평생을 고생 고생 하셨는데.....


목숨 살리려면 다른나라는 몰라도 우리나라에서는 반드시 출세해야 할 것 같습니다.

유럽이나 다른나라 ,우리리나라 고려시대 까지는 대장이 앞장서고 졸병들이 뒤를 따르면서 전투하는 것 같은데....조선이라는 나라로 오면 장군은 뒤에서 돌결앞으로를 외치고 졸병들은 나가 싸우고 자기는 후방에서 몸아끼는 듯한
행동을 하는 것 처럼 느켜오곤 했습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주는 우리나라 에서는 뿌리내리기가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임진왜란이 터져 왜군이 조총을 들고 부산항으로 들어와 경상도 전라도를 통해 도성으로 진격할때

개망나니 보다 못한 *조 임금이라는 작자는 밤중에 몰래 경호부대, 시녀들, 대신들을 데리고 저 북쪽으로
도망가고 말았지요...(왕조시대니 그래도 꼴값한다고 점잖게 "몽진"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더군요

화가난 백성이 조선궁궐을 불질렀다고 하는데....(쪽 팔리니까 왜군이 불 질렀다고 왕조에서는 얘기하는 것 같더군요...쩌~~업)

그렇게 못할짓 했는데도 이 비좁은 나라에 산수좋은 곳에 넓은 땅 분양받아 몇 백년을 푹 자고 있지요
(정의감에 사로잡힌 듯한 젊은이들이 많은 것 처럼 보이지만 그 무덤 파헤쳐 길거리에 내동댕이 치는 젊은이 한사람 안 나오더군요...물론 저도 못했습니다 만)

노블리스 오블리쥬.....우리에겐 언제 이문화가 다가올려나 하늘 한번 쳐다 봅니다.

박삼정님의 댓글

박삼정

댓글을 달아 주신분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사진활동과는 무관하며,
더욱이 정치성과는 거리가 먼,
단지 어느 선배님으로 부터 들은 뼈저린 경험담과 회환을 가식없이 그대로 옮긴 글입니다.
6.25 한국동란의 기념일을 맞으면서 '자유게시판'에 이 글을 올린데 대하여 양해 바립니다.

역사학자, 토인비는 우리나라를 방문하여, 구제받지 못할 민족이라고 하였습니다만,
불과 십수년만에 개발도상국중에서 가장 성공한 국민으로 세계를 놀라게 하지 않았습니까?
우리의 국민성은 중국과는 또 다릅니다.
컬러TV방송으로 중국의 웬만한 도시를 가 보시면,
우리의 젊은이들의 머리스타일이나 복장이 거의 흡사합니다.

우리나라도 81년 부터 컬러방송을 시작한지 불과 7년만에
입이 아닌 눈의 만족을 위하여 생산성향상 보다는 실질임금인상을 주장하는 노동운동이 일면서
이나라는 대 혼란에 빠졌던 적이 있었으나 용케도 잘 빠져 나왔다고 봅니다.

저는 나이들어서의 취미생활로는 사진활동이 최고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졸필을 읽어 주셔서 너무 고맙습니다.
박 삼정배상. .
박삼정배상.

조현갑님의 댓글

조현갑

인간의 운명은 참 많은 희비쌍곡선인것 같습니다!
당시에 훌륭한 국군과 학도병, 외국지원군 때문에 오늘의 저희들이 있다고 봄니다!
미국인들의 리더책임감 정신은 참 좋은 교감이라 봄니다!

저보다 12살많은 선배님한분은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해병대 다녀오고
제대후 영장나온 형님대신 육군 다녀오고 두번 군생활 하신분이 계십니다!

아직도 북한체제를 지지하는 인간들이 대한민국에 많이 살고있다는게 문제입니다!!!
좋은 감동의글 감사합니다!

노현석님의 댓글

노현석

아버지를 비롯해서 집안의 어른들께서 흥남부두에서 배를 타고 월남했습니다.
집안이 거제도와 부산에서 생활하다가 저는 서울 사직공원 근처에서 태어났는데......

감회가 새롭습니다. 역사는 바로 지금이라는 생각을 다시 해 봅니다.
리더쉽뿐 아니라 휴머니즘을 느낍니다. 인간의 삶에 관한 열심도요.

신한주님의 댓글

신한주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여러가지 제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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