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골통신 I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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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 김명기
- 작성일 : 08-02-29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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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소식 - 용접공
농장 생활을 하면 그야말로 뭐든지 다 할 수 있어야 한다. 뭔가 필요해서 사람을 쓰게 되면 비용은 한 없이 들어간다. 농장 일꾼, 배관공, 전기공, 미장이 뭐든지 해야 한다. 그리고 직접 농장을 가꾸고 보수하는데 실제적인 전원생활의 맛이 숨겨져 있는 것이다.
요즘 용접 좀 한다카면 하루 12만원이제.
까짓것 직접 해보죠 뭐.
일단 연습으로 대문에 보조 기둥을 대보자카이.
그래서 용접용 보호면을 얼굴에 대고 난생처음 용접을 해 보았다. 불똥이 튀고 쇠가 타는 맵고 신 냄새가 코끝에 훅 불어온다. 어쨌든 대문 기둥과 철제문에 멋지게 용접 되어 단단히 붙었다. 가 아니다.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용접봉이 녹은 용접 똥만 잔뜩 붙어 있고, 기둥은 전혀 아니올시다다.
그래도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다. 엉터리 용접공은 용접봉 반 토막이면 될 일을 3개, 4개 써가며 용접에 열중한다. 옳커니! 손의 떨림이 멈추면서 용접봉 끝에서 스파크가 일어난다. 용접 보호면의 검은 유리창을 통해 용암처럼 붉게 달아오른 용접 부위가 보인다. 천천히 이동하며 접합면을 넓혀 간다.
이윽고 보호면을 벗어보니, 아하, 두툼하고 일정하게 잘 용접이 되었다.
희한하다.
뭐가 잘 못 되었나요?
아니 대구말로는 아주 잘되었다가 희한하다다.
뭐하느라고 이제 오노?
하하! 이제 일당 12만 원 짜리입니다.
뭐락카노?
초보 용접공은 가슴을 펴고 잘난 척 한껏 폼을 잡는다. 오늘 산골 생활의 묘미를 또 하나 찾아냈다.
두 번째 소식 - 비트
자아 마셔봐라. 이제 건강에 최고란다. 비트 갈은 물이다.
붉고, 담백하고, 달콤하고, 차가운 음료가 목을 넘어간다. 비타민 보다는 정성이 더 많이 섞인 최상의 건강음료. 나는 그 날도 잔뜩 힘을 내어 더 많이 일했다.
그날 저녁, 나는 소변을 보다 깜짝 놀랐다. 피오줌을 눈 것이다. 심장이 쿵쾅거린다. 허허, 드디어 내가 병을 얻었구나. 피 오줌을 눌 정도로 중병인가 보다. 이러니 병원에는 더더욱 갈 수 없다. 혹시 의사선생님이 침통한 표정으로, 이제부터 잡숫고 싶으신 것 마음껏 잡수세요. 하면 어쩌나?
지난 시절들이 주마등처럼 흘러간다. 20~30대는 그런대로 폼 나게 잘 살았다. I.M.F.를 맞고 난 뒤의 참담한 세월들. 인고와 가난의 시간들. 나는 40대 중반에 이렇게 허무하게 삶을 마무리 짓게 되는 것인가? 그래 젊지도 않은데 몸을 너무 막 굴린 것은 사실이지. 하루 14시간씩 일한 것은 그렇다 치고, 지난번 10시간 30분 동안 5톤 말 운반 트럭을 운전한 것이 결정적일 거야. 너무 일 욕심이 많았지. 하지만 아직도 할 일이 많은데 이건 너무 허무하네.
나 죽었다고 하면 A는 어떻게 생각할까? B는 여전히 울어 줄지도 모르지. 그런데 그녀들이 내 상황을 알 길이 없겠지. 매몰차게 떠나버린 몇 몇 사랑들도 떠오른다. 그래 나 외로울까봐 나타난 그녀들, 감사할 뿐이지 뭐. 하루 종일 별별 생각이 다 든다. 나는 저절로 생각이 깊어지고 차분해 진다.
니 피오줌 안 누었나?
네.
그기 비트를 마셔서 그렇다카이. 비트가 피돌기에 아주 좋다 안카나?
나는 다시 살아났다. 제기랄 진짜 죽는 줄 알았네.
세 번째 소식 - 부모 마음
그래서 벌떡 안 일어났나? 어금니가 꼭 생시처럼 쑥 빠지데. 하도 진짜 같아서 이빨을 만지고 있는데 한 5분 지났나? 전화가 오더라. 당했습니다. 라고 그래서 뭐가 당했노? 물으니, 아가 깡패들한테 맞았다 카이. 아차 이제는 죽었거나 병신이 되었구나. 깡패들이 사람 칠 때는 무작스럽게 안치나? 그런데 다행이 아가 갈비뼈 골절에 온몸이 망신창이가 됐어도 죽지는 않은기라. 생각하면 지금도 어금니 빠지던기 생생하다. 옛말 그른 거 없니라. 이빨이 빠지면 부모나 자식이 죽는다꼬.
아하, 꿈속에서도 자식 두들겨 맞는 것을 그대로 느끼는 것이 부모다. 자면서도 온 몸의 감각과 신경을 자식들에게 쏟게 되는 것이 부모 마음이다. 그래서 말 그대로 자나깨나 자식걱정이다. 자식이 생긴 뒤로는 눈 감을 때까지 단 한 번도 편할 수 없는 것이 부모가슴이다. 어디에 있건 무엇을 하건 노심초사 가슴 조리는 것도 부모마음이다.
오늘도 저 하고 싶은 일, 저 갖고 싶은 것, 눈앞의 유혹을 따라 사바를 헤매는 모든 자식들이여. 오늘 부모님은 무엇을 하고 계신지, 힘없는 손으로 드신 수저에 오늘 무슨 반찬이 올려 져 있었는지 하루 한 번이라도 생각하는가? 손에 휴대폰을 들고 다녀도 전화 한 번 안하는 무심한 자식들이여. 나중에라고 하지 마라. 세월은 기다려 주지 않는다. 정말 옛말 그른 것 하나 없다.
네 번째 소식 - 슬픈 눈동자
물론 알고 있다. 전원생활과 말 목장 운영이 쉬운 일은 아니다. 오늘 다친 말의 다리에서 고름을 짜냈다. 500Kg에 가까운 말이니 상처의 크기나 고름의 양이 엄청나다. 진한 소금물에 수건을 적셔 다리를 닦고 고름을 짜낸다. 부어오른 비절 부분을 쓸어내리니 피고름이 수돗물처럼 흘러내린다.
P.P.S. 20CC와 코티발 10CC를 다시 주사하고 강옥도 용액으로 상처를 소독해 준다. 완치에 2주일가량 걸린다고 했지만, 이 상태로 라면 한 달도 더 걸릴 것 같다. 커다란 말의 눈망울엔 반짝이던 총기가 사라지고 슬픔이 담겨져 있다. 마음이 답답하다.
승마를 교육하는 초등학교 운동장에 말을 실고 말차를 세워 놓았다. 다음날 아침 가보니 마방 칸의 강철로 된 칸막이가 부서져 있고 말이 심한 상처를 입었다. 밤새 난동을 피운 것이다. 서둘러 마방 칸의 문을 열어보니, 돌과, 동전, 태권도 띠 등이 던져져있었다. 동네 악동들의 짓이다. 말들을 놀라게 한 것이다.
어째서일까? 왜 순진하고 착한 짐승에게 돌을 던져야만 하는 것일까? 도시의 삶이란 사람의 마음을 그토록 각박하고 그악스럽게 만드는 것일까? 농촌과 격리 된 도시인들의 삶에는 폭력과 선정성, 그리고 인간적 금전적 배신이 난무한다.
더 늦기 전에 우리나라의 도시인들이 농촌을 경험하고, 그 생명 가득한 들판에서 자연과 인간, 탄생과 죽음, 사랑과 희망을 발견하게 되기를 기원한다. 도시인들이 자연스럽게 말에게 다가가 풀과 당근을 내밀고 말을 쓸어주는 평화로운 풍경이 도시인의 메마른 삶 속에 일상적으로 스며들기를 기대한다. 그때까지 나의 할일은 멈추지 않는 것이다.
다섯 번째 소식 - 저녁 식탁
산 너머로 해가 지면 산골은 갑자기 어두워진다. 그리곤 밤의 장막으로 모든 것이 가려진다. 하루의 피곤도 하루의 고민도 모두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밤은 낮이 남긴 상처 마저도 말없이 감싸 안는다.
한잔하자
무슨 제목으로요?
감기 완치 기념.
소주 한 병을 3명이서 나누어 먹는 정도로 하자는 약속을 먼저 정하고 삼겹살을 굽는다. 물론 4홉 짜리 플라스틱 병이다. 몸을 써서 하는 몸의 일의 끝내고 적당한 피로감과 함께 밤이 내린 깊은 산중의 오두막에서 나누는 술잔에는 정이 넘친다. 여기서는 안주 삼아 누군가를 씹는 일이라든가 하는 바보짓은 아무도 하지 않는다.
그래서 여군 둘이 내 곁에 안앉았나, 예전 군용열차에는 한 좌석에 3명씩 앉게 되 있었제. 그러니 다들 얼매나 부러워 했겠노?
우리는 20대 혈기 왕성한 청년으로 돌아가고 19살 순진한 처녀의 시절로 돌아간다. 지금 현재 눈앞에서 일어난 일이 모든 것은 아니다. 시간은 지난 추억들을 아름답게 완성 시키는 것이다. 그때 그 시절의 모든 일들은 수십 년에 걸쳐 오래묵은 장처럼 숙성되어 이렇게 오두막의 정담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결국 약속은 두 병으로 정정 되었고, 모두는 행복한 잠에 빠져들었다. 오늘 밤 분명히 아스라한 추억의 꿈을 꾸게 될 것이다.
여섯 번째 소식 - 강아지 눈뜨다.
오늘이 며칠이제?
27일이요.
어마 그러면 벌써 20일 지났다. 강아지들 눈떴겠다.
잔뜩 웅크리고 개집 안을 들여다보니, 거짓말 조금 보태 베개만한 하얀 강아지 네 마리가 나란히 포개져 있다. 지난번 얼어 죽을뻔한 녀석을 꺼내니 벌써 묵직하다. 볼에 대자 강아지 냄새가 폴폴 난다. 턱 밑을 간지르니, 인형처럼 까만 단추 눈을 뜨고 꿈뻑꿈뻑 바라본다. 손가락으로 입을 만져보니 아직 이빨은 없다.
새봄이 오면 이 강아지들은 산골의 귀염둥이가 되어 폴짝폴짝 숲속을 굴러다닐 것이다. 시간은 지속적인 상실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언제든 세상은 새 생명들로 축복받을 것이다. 틀림없이 영원히.
마지막 소식 - 한밤의 커피
한밤, 일을 마치고, 정겨운 술자리도 마치고, 오두막 2층의 책상에 앉는다. 오랜 고질병인 끄적거리기가 시작될 시간이다. 파워 북을 펼치기 전에 먼저 물을 끓인다. 천천히, 이제부터 잠자리에 들기까지는 뭐든지 천천히.
문밖 부엌에서 잠시 보글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툭! 하고 전원이 꺼진다. 나는 커피 깡통을 열고 짙은 고동색의 커피를 티스푼으로 반 수저 덜어낸다. 진한 커피 향. 나는 잠시 코를 앞으로 내밀어 가루 커피의 향을 가슴 깊이 빨아들인다.
아무 것도 넣지 않고 커피 반 수저에 물만 붓는 나만의 커피 레서피는 툭툭이라고 부른다. 예전에는 티스푼을 쓰는 것도 귀찮아서 병째로 커피 잔에 툭툭 털어 넣었기 때문이다. 게으름의 극치였지만, 의외로 툭툭은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군더더기 없이 간단하면서도 깊은 맛이나요. 물과 커피의 비율과 조화가 퍼펙트예요.
이정도면 몸 둘 바를 모를 정도의 극찬이다.
이상하게 자네가 커피를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면 그렇게 맛있어 보여. 정말 단순한 커핀데도, 왠지 사치스러워 보인다니까?
이런, 이런, 별게다 사치로군요,
시골이든, 산골이든, 땅 끝 어디라도 당신과 함께라면 어디라도 좋아요.
선이 깔끔한 하얀 턱 아래, 두 손으로 따듯한 커피 잔을 감싸 쥐고 그렇게 말하던 맑은 눈동자가 생각난다. 그래, 설혹 그 눈동자에 빠져 죽는다 해도 아무 상관없었던 순간이었다. 나는 당신으로 인해 뇌에 상처가 날 정도의 행복을 맛보았다.
겨울밤.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과 텅 빈 오두막의 공간. 대나무 이파리를 스치는 바람의 노래. 흔들리듯 옅게 가슴에 스며드는 커피 향. 나는 그 향기로 지난봄의 꽃잎과, 지난여름의 해변과, 지난 가을의 낙엽을 떠올린다. 문득 눈물이 날 정도로 아름답고 감사한 시간들이다.
한밤의 커피 한잔. 오늘 밤은 Mayumi Itsuwa가 젖은 음성으로 한숨처럼 토해내는 Kohibitoyo 와 함께다. 이런 건 역시 지나치게 사치스러운 것일까?
숲과 구름사이...
www.allbaro.com
댓글목록
홍건영님의 댓글

참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정준호™님의 댓글

소소하면서도 정감있는 연재
감사히 잘 보고 있습니다
김명기님의 댓글
부족한 내용이고 그저 사람사는 이야기인데, 좋게 보아주시는 분들의
마음이 더 정겹습니다. 감사합니다. ^~^
lee ju yeon님의 댓글

소소한 산속의 일상이
글이 되니 아늑한 느낌의 풍경을 떠오르게 합니다.
수십년 도시의 나태함에 익숙한 저야 그리 살라면, 때려죽어도 못살겠지만,
그리 사는 삶은 왜 이리 부러운지.
느리게 산다는 것은
due date가 없는 것일 뿐
게으른 삶은 아니군요.
어찌되었던
순간 저도 산속 생활을 하는 순박한 여편네 같은 상상에 젖어봅니다.
정한구님의 댓글

에구구 .. 부러워라
그렇지만 막상 하라고 하면 못하겠죠?
이진부님의 댓글

"농장 생활을 하면 그야말로 뭐든지 다 할 수 있어야 한다. ...." 이해가 가는 대목이네요.
그림을 보는것처럼 매끄러운 글 잘 읽었습니다.
이제 생각해보면 전원생활을 표현한 글들의 느낌, 환상이지요. 어떻든 몸은 힘들지요. 지치도록... 그리고 여유가 몸에 베지 않으면 스스로를 죽이는거이... 어릴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든 밭에 보리나 논에 나락(벼)들은 주인의 발자욱 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말씀을 이해할쯔으음 이미 도시생활에 몸이 푹 빠져서 input이 주어지면 output이 나와야 속이 편한 조급함의 노예가된 자신을 이따끔 잊고 환상에 젖게하니 이거이 불상한지고...
강아지 눈뜨는 모습을 보는 그것이 천국인것을....
잠시라도 그때를 생각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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