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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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 김명기
- 작성일 : 07-12-13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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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거지
바스락 소리가 나게 말라버린 수세미를 들고 수도꼭지를 튼다. 단단하던 수세미가 금방 첫사랑을 만난 18세 소녀처럼 고분고분 얌전하고 부드럽게 손안에서 녹아내린다. 식기세척용 세제를 몇 방울 수세미에 뿌린다. 정 중앙에 흘러내리지 않도록 세심하게. 그리고 손아귀에 힘을 주어 한번 짠다. 손가락 사이로 거품이 솟아난다. 아직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순결한 거품들이다.
잔반을 따로 모으고 10분전에 미리 물에 담가 두었던 식기들은, 수세미가 가는대로 깔끔해진다. 거품과 손길이 지나간 자리에는 식기가 지녔던 본래의 색깔들이 살아난다. 음식의 색에 가려졌던 수줍은 그릇들의 색감은, 물방울마저도 또르르 굴려버리는 봉긋하게 부푼 소녀의 가슴과 닮아 있다. 아무런 치장도 없이 그것 그대로 충분한 것이다.
나는 어느 이름 없는 도자기 장인의 콧노래를 듣는다. 그는 탱탱 소리가 나는 예쁜 그릇을 만들려 기꺼이 허리를 굽히며 가마를 들여다보았겠지. 나는 지금 그의 예술품을 닦고 있다.
자, 음악 큐! 봄여름가을겨울의 브라보 마이라이프! 어깨가 들썩거릴 정도로 오디오의 볼륨을 제법 키운다.
설거지의 즐거움을 배가시키기 위해 나는 일을 몇 개의 라운드로 나누어 한다. 거추장스러운 큰 그릇들은 옆으로 치워둔다. 위험한 칼과 가위 등이 제일 먼저다. 다치지 않으려면 그게 상책이다. 다음으로 깨지기 쉬운 유리잔과 머그잔들을 가장 먼저 닦는다. 그다음은 접시 류. 마지막에 냄비나 팬 등 가장 큰 그릇들을 하나씩 닦는다. 수저나 젓가락들은 늘 제일 나중이다. 한 단계의 일이 끝날 때마다 나는 작은 성취감을 내게 허락한다.
세제의 거품을 닦는 것은 완전히 창조적인 행위다. 흐르는 물에 몇 번을 씻어라. 라는 매뉴얼은 세상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숙련된 설거지 꾼은 수돗물에 빙글빙글 그릇을 돌려대며 이때다! 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상당한 경지에 이른 설거지꾼들은 물의 양과 세제의 양 따위도 낭비가 없도록 자동 계산해 낸다. 물론 계산기가 아닌 손끝의 감각 만으로다. 가끔 손가락으로 방금 씻어낸 식기의 바닥을 문질러 본다. 예전 어느 치약 광고가 떠오른다. 뽀드득! 소리가 나는 말끔한 그릇이다.
설거지는 내가 할게.
아유, 그만 두세요. 이따가 제가 할게요.
아내는 늘 만류한다. 남자가 꾸부정하게 서서 설거지를 하는 모습은 보기 안 좋단다. 그러나 아직 한 번도 직접 내 손을 잡거나 화를 낸 적은 없다. 나는 그녀가 단순히 얼마간의 편리 때문에 그러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세상의 제멋대로 법칙은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는 것을 반대하는 전근대적인 태도를 취하지만, 그릇을 닦는 단순한 행위가 어떤 즐거움을 주는지 그녀도 알고 있고, 내게서 그 기쁨을 앗아가지 않기 위해서라고 나는 생각한다. 당연히 그럴 것이다.
흐르는 물에 말끔하게 씻기는 그릇들을 보면서 나는 내 주변의 모든 여자들이 내 주변의 모든 남자들보다 도덕적이고 정의로웠던 것을 다시 기억한다. 어쩌면 그 중요한 요인들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설거지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여자들은 천성적으로 깔끔한 것을 좋아한다. 고대부터 그녀들은 자손을 키우기 위한 말끔한 짚자리가 필요했기 때문에 D.N.A.에 청결의 암호가 기록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동물들의 어미는 새끼들의 똥을 물어 굴 밖으로 버리고, 늘 새끼들의 털을 핥아 청결을 유지한다. 그것은 생존율과 번식력을 높이는 본능적인 행위다. 그녀들은 불결하고 더러운 것, 난잡한 것들이 결국 종족을 파멸로 이끌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쾌락보다는 생명과 번식을 선택한다. 여자들은 현명하다.
남자들의 공간 지각 능력이 뛰어난 것은 당연하다. 어디인지도 모르는 곳으로 가서 각종 위험을 무릅쓰고 사냥을 해야만 한다. 그리고 개미처럼 반드시 집으로 돌아와서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 에덴동산에서 쫒겨 날 때부터의 의무다. 그러자니 협동도, 단결도, 배신도, 협잡도 해야 한다. 자신의 자손을 최대한 많이 남기기 위해 바람도 피운다. 그러나 언제 유혹에 넘어올지 모르는 암컷 때문에 몸치장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남자들은 당연히 여자보다 불결한 존재인지도 모른다.
내 삶에 불요불급한 비싼 수업료를 내게 만든 것도 다 남자들이다. 그럴듯하고 비장한 표정을 짓고 맹세를 하지만, 어쩌면 하고 감탄사가 나올 정도로 쉽게 배신한다. 나는 낯모르는 남자와 함께 있는 것이 점점 불편해진다. 물론 낯모르는 여자와 함께 있는 일은, 엘리베이터를 탈 때 외엔 절대로 피한다. 나는 선언한 것이다.
사랑 없는 섹스는 절대 안한다.
아마 20대 후반이었을 것이다. 그때 내게 무슨 일이 있었던가? 이크! 접시가 손에서 미끄러진다. 나는 회상을 하려고 기억의 낡은 상자들을 뒤지려다가 멈춘다. 지난 일은 지난대로. 그대로 두는 것이 더 나을 경우가 많다는 것을 세월이 내게 알려준 것이다. 나는 말끔해진 식기들을 건조대에 올린다. 나는 점심이나 저녁에 다시 이 그릇들을 대면할 것이다. 다시 채색된 식품들이 이들을 유린할 것이고, 나는 작은 성취를 느끼며 설거지를 할 것이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지겨울 정도의 반복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평생 반복하며 숨을 쉬는 것. 아침마다 화장실에서 배변 하는 것. 똑 같은 여자와 평생 비슷비슷한 방식으로 섹스 하는 것. 이런 것들이 과연 지겨운 일인가? 맛있는 요리는 어쩌다 먹어서 맛있다. 하루세끼 밥처럼 먹으라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비릿하고 담백한 밥. 우리는 그 밥을 평생 질리지도 않고 먹는다. 삶은 그래야 한다.
자, 봐봐! 설거지 잘했지? 내 설거지는 이제 예술의 경지라고. 한참 힘들게 일했는데, 설거지까지 잔뜩이라고 상상해봐. 내가 없으면 당신은 무지하게 불편할걸? 잔뜩 쌓여있는 설거지꺼리를 보면 투쟁의지가 불타오른다고. 그러니 나랑 살고 있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해. 음무화화홧!
나는 가슴을 내밀고 잔뜩 공치사를 한다. 당신은 나를 바라보며 조그만 미소를 베어 문다. 아이구, 참 잘 했어요. 동그라미 다섯 개에 별 세 개. 하고 궁둥이를 툭툭 쳐 주지 않는 것은 조금 불만이지만, 내가 충분히 즐겼으므로 나는 그 정도의 미소로도 만족한다. 나는 다음 설거지 타임을 기다린다. 역시 삶은 그래야 한다.
천당(天堂) 아래 분당(盆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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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유혹과 일상사이 ] - Nikon 똑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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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한수길님의 댓글

오랜만에 님의 글을 대하는 군요 한동안 궁굼 했었는데 이곳에 들어와 님의 글을 보며 요즘 일부러 책 사보기가 쉽지 않은데 덕분에 글을 대하는 즐거움 다시 시작하게 됐내요
그리고 승마에 대해서도 글 올려 주세요 잘 읽었습니다^^
한수길님의 댓글

Brie Cheese 가 눈에 쏘옥 들어 오내요 요즘 술은 끊었지만
Brie Cheese 는 원래 좋아해서 내년 초에 아주 유럽으로 이주 하려고 합니다ㅎㅎㅎ
김석님의 댓글

좋은글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김명기님의 댓글
인용:
원 작성회원 : 한수길
오랜만에 님의 글을 대하는 군요 한동안 궁굼 했었는데 이곳에 들어와 님의 글을 보며 요즘 일부러 책 사보기가 쉽지 않은데 덕분에 글을 대하는 즐거움 다시 시작하게 됐내요
그리고 승마에 대해서도 글 올려 주세요 잘 읽었습니다^^ |
요즘 일부러 책 사보기가 쉽지 않은데 덕분에 글을 대하는 즐거움 다시 시작하게 됐내요 <=== 야아, 이런 표현은 가난한 무명작가의 어깨에 힘이 잔쯕 들어가게 하는 격려인걸요? 감사합니다. 승마는 요즘 경희대 근처 청량초등학교에서 주말마다 승마교실 열고 있습니다. 도심지 승마를 드디어 시작했지요. 주말에 시간이 나시면 들러서 어린이들과 말 사진 촬영도 좋을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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