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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해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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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김명기
  • 작성일 : 07-09-29 1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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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해가네.

오늘도 격자 진 현관문의 유리창에는, 짙은 어둠이 반쯤 잠식하여버린 희미하고 우울한 얼굴, burlywood의 노란 낯빛을 한 사내가 비현실적으로 입체감 없이 떠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은 그렇게 무게가 없이 두께도 없이 허공에 웅크리고 있을 뿐이다. 왼손을 올려 이마를 갉작인다. 정면에 떠 있는 존재감 없는 사내도 오른 손을 올려 이마를 갉작였다.

갇.혀.있.다.는 단어가 머리 속을 둥둥 떠다닌다. 뭔가를 털어 버리려는 듯이 비어있는 이 공간이 터져 나가라 앰프의 볼륨을 올린다. 하지만 가슴이 터져 나갈 듯한 격정이 세포 하나하나를 들뜨게 할 때에도 스피커로 인하여 공간이 터져 나간적은 없었다. 결국 마음이 먼저 터져 온통 뿌옇게 흘러내리는 세상에 가라앉아 회색하늘을 보았던 기억이다. 그래. 그 겨울의 초입에서, 어쩐지 모든 것이 현실과 유리되어 멍하니 고장 난 장난감처럼 멈춘 채 흘려버렸던 참 아픈 기억이었다.

그 해 겨울은 인공호흡기처럼 소주병을 앞에 두고 긴 밤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기다렸다. 밤은 계속하여 내게 당신께 가라고 종용하고 있었고, 나는 파김치가 되도록 거부했다. 당신역시 긴 밤을 잠들지 못하던 것을 말없이 끊어지는 전화기에서 느꼈다. 전화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울림처럼 당신의 슬픔을 내게 전하곤 했다. 도시는 가로등불빛 아래로 녹아내렸고, 새벽은 겨우 잠드는, 아니 온통 꺼져 내리는 침대에 나무토막처럼 무너져 바닥을 알 수 없는 심연으로 가라앉는 유배의 시간이었다.

시간은 우리가 불가능 하다고 믿었던 모든 것들의 진실을, 바닷물이 빠져나간 개펄의 바닥처럼 드러내 보여준다. 애써 외면하고 싶었던 것들도 결국은 또 언젠가는 눈앞에 드러나기 마련이다. 보.고.싶.다.가, 보고 싶었던가? 로 바뀌는 순간에는 주체할 수 없는 시간의 무책임과 회한이 푸석푸석해진 가슴을 마구 드나들었었다. 아직 사랑이 남아있는 순간에는 누구라도 결코 외롭지 않은 법이다. 사랑을 놓아버린 마지막 순간에 찾아 온 것은 절대고독이었다.

‘절대로 그 사람을 잊지는 못할 거야. 또 다른 이를 사랑할 수도 없겠지... 이미 당신을 알아버렸으니까, 내 삶의 마지막 사랑은 이제 끝나버린 것 일거야. 모든 것은 너무 늦어 버렸어.’ 그렇게 혼잣말을 할 때까지는 아직 불행하지도 외롭지도 않았다. 시간이 흐르고 상처가 아물어 아픔마저도 둔감해진 어느 봄날... 마침내 사람을 잊는 법을 서서히 익혀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래, 목숨보다도 소중한 바로 그 사람이었다.

절대로 잊지 못할 것 같던 당신의 미소가 삶의 길목에서 저 만치 멀어지고 희미해져 가는 그림자인 것을 문득 깨닫게 될 때. 그 망각의 가능성을 어렴풋이 감지하게 되었을 때, 어찌나 하염없이 불행하고 고독한지 나는 숨도 쉴 수 없었다.

주변에서는 다시 사랑하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사랑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가를 이미 알고 있었다. 지나치게 충분하게 알고 있었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증발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내게서 한 방울까지 증발되어 버린 것은 당신이었고, 내게 사랑은 다시 허무한 사막을 가리키는 공허한 손가락일 뿐이었다. 누구도 내게 다시 사막으로 돌아가라고 할 권리는 없다. 또 다른 사막에서는 분명히 오아시스를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누가 감히 장담할 수 있겠는가?

그 파란 사막의 새벽은 빙하에 홀로 갇힌 채, 초점 없는 눈으로 얼음덩이만 백 만년을 바라본 매머드만큼이나 쓸쓸했다. 혹여 바람결에 당신의 소식이라도 듣게 되면 나는 늘 사막에 혼자 남아 물병자리의 사달메리크와 사달스우드, 두 별사이를 헤매고 있는 쓸쓸한 나를 보았다. 도시에서 메마른 사막의 바람이 불면 더욱 쓸쓸했다. 눈물도 얼어붙어 덜그덕! 거리고 있었다.

돌아보면 처음 만남에서부터 멈출 수도 돌아갈 수도 없이 운명의 실타래가 펼쳐지는 대로 무력하게만 흘러간 시간이었다. 정해진 순서대로 우리는 만남과 이별을 계속했다. 결국 가슴 조이던 당신의 미소를 테이블 위에 두고 있을 때엔 서로가 꿈도 꾸지 못하던 두려운 결심을 했고, 지금까지도 생생하게 반복되는 악몽에 갇혀 식은땀으로 새벽을 깨우는 마지막 이별을 했다. 결국 당신과 나 사이에서 영원한 것은 사랑이 아니라, 사랑할 때엔 생각지도 못한 그리움이었다.

모진 바람을 견디지 못한 초겨울의 마지막 낙엽처럼, 사랑이 오래 동안 병들어 누워있던 기억의 축축한 모퉁이를 마침내 떠나는 순간에는 ‘그립다.’ 라는 말조차 입에 올리지 못했다. 귀가 먹먹해지고 눈앞이 흐려지고, 가슴을 열고 심장을 꺼내 던져 버리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못했다. 당신을 잡지도 놓아 보내지도 못했다. 당신 없이 한순간도 살 수 없었지만 죽어 버리지도 못했다. 시간은 그런 것들까지도 분리된 쓰레기처럼 무심히 거리에 내 버리는 것이다.

스피커에서 분출된 압력이 공간을 진동시킨다. 키보드가 올려져 있는 조그만 테이블도 징징거리며 손에 미세한 울림을 전한다. 이윽고 하루는 저물어 가려고 한다. 24시 이면서 동시에 0시인, 어린 시절 늘 헷갈리던 그 완전한 무의 세계로 진입한다. 이제 세계는 또 다른 공간으로 문을 열고 걸어 들어 갈 것이며, 나는 그 시간을 따라 둥둥 떠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가는 아카시아 꽃잎처럼 힘없이 흡입되고 말 것이다.

오늘 동물원의 [변해가네]를 우연히 다시 듣게 되었다. 그리고 나 자신, 변해가고 있는 것을 문득 발견했다. 거리를 걷다가 돌부리라도 찬 것 같은 아픔이었다. 그렇구나. 그런 것이었구나...


강하마을에 머무는 푸른 달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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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無限/박성준님의 댓글

無限/박성준

얼마 되지 않은 나이에, 그것도 사랑 이라고 해본 저는,
곱게 간직 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게 맘이 편하더라구요...

cho sungju님의 댓글

cho sungju

많은 인생의 선배들이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라고 가르치려들 때
난 늘 나만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말도 믿지 않으려 했었다.
그런데 내가 싫어하는 유행가 가사처럼
정말 세월이 약이었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치명상을 치료하기엔 족한......
늘 나는 늦된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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