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잦은질문모음
  • TOP50
  • 최신글 모음
  • 검색

Forum

HOME  >  Forum

Community

페로몬 네비게이터

페이지 정보

  • 작성자 : 김명기
  • 작성일 : 07-09-13 16:53

본문



페로몬 네비게이터

비 오는 아침. 밀려드는 출근 길 차량. 느리게 움직이는 차창에 비치는 비 내리는 거리는, 어린 시절 장난감 선글라스를 끼고 바라보던 세상과 닮아있다. 명확하지 않은 어떤 것. 빗줄기가 움직이는 대로 이리저리 점과 선이 되어 흐르는 기억들.

잠깐 잠깐씩 차가 앞으로 나아가고 멈춘다. 거북이가 되어 버린 차량들의 붉은 꼬리 등을 신호로, 지나간 시간의 느리고 불투명한 정경이 펼쳐진다. 잠시 후 아나운서의 절망스런 멘트대로 ‘지체와 서행을 반복하며 출근길 정체의 느린 움직임’ 을 보이던 차가 멈추었을 때, 그곳은 익숙한 풍경이었다. 아니, 결코 잊지 못할 곳이라고 하는 것이 더 진실에 가깝겠지. 나는 라디오를 끈다.

가끔 당신에 관한 기억 속에는 달콤한 향이 난다. 내가 당신에게서 발견한 것들 중 가장 특별한 점은, 도시라는 콘크리트와 크롬의 공간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였다. 그것은 지금까지 내가 만난 모든 남자와 여자라고 지칭되는 영장류를 통 털어서, 아직도 당신에게만 발견된 특징이다.

누군가 내게 길을 물어오면, 나는 당연히,

"응, 그래 안세병원 사거리. 거기서 압구정동 쪽으로 직진을 하면 한 300m 정도 내려오다가..."

라는 식으로 시청, 경찰서 등의 공공기관이나, 은행, 병원 같이 이정표가 되는 건물을 중심으로 길을 설명한다. 그러나 당신은,

"응응... 그래요. 신사동 K.F.C.를 오른 쪽으로 보면서 좌회전을 하면 거기에 올리브 영이 있고, 다음엔 롯데리아가 있어요. 그다음 블록에 있는 파파이스에서..."

라는 식이다.

예를 들어 모란 역에서 분당 야탑 역 쪽으로 가다가, 두 번째 사거리에서 오른 쪽으로 꺾으면 그곳에는,

"당연히 까르프가 있지요."
"이봐, 대부분의 사람들을 그럴 때 [성남시 종합 고속 터미널]이 있다. 라고 말한다고!"

어디로 가면 백화점이 있고, 어디로 가면 E-마트가 있으며, 어디로 가면 킴스클럽이 있다는 것은 줄줄 꿰면서도

"터미널? 그런 곳은 알아서 뭐해요? 나는 관심 없어!"

라며 나의 가장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지리적 충고를 일축해 버린다. 마치 베르나르베르베르의 개미라는 소설을 볼 때와 같은 느낌이다. 개미들은 페로몬 향수를 배합한 신호로 정보를 주고받는다고 했던가? 당신은 과자와 케이크, 각종 맛난 음식이 지닌 삶의 페로몬으로 세상에 존재하는 당신만의 정보를 읽고 있었나 보다.

한 번은 당신과 함께 원주에 간적이 있다. 물론 나는, '원주 중심가를 통해 1군 사령부 앞을 지나면 만종으로 빠지는 분기점이...' 라고 전지전능한 워킹 네비게이터 임을 스스로 자부하면서 길을 찾고 있었다.

"어? 바로 저기예요. 저기서 오른쪽으로 돌아요."
"뭐?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저 길 끝에는 롯데리아가 있어요. 거기서 왼쪽으로 가다가 보면 그길 끝에 예전에 들렀던 그 농협 수퍼마켓이 있어요. 그 사거리에서 오른 쪽으로 돌면 서울 쪽이라구요."

당신의 기억력은 나름대로 정확했다. 한 가지 길을 가면서 나와는 전혀 다른 지리적 정보를 이용하다니. 어쩌면 당신과 나의 인생 역시 같은 길을 가긴 했지만,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도 가끔 당신이 설명해 주던 약속장소를 기억한다.

"강남역 5번 출구를 나와서 토니로마스 앞을 지나요. T.G.I. 앞에서 우회전 하구요. 그 골목으로 버거킹 까지 가요. 그런 다음에 좌회전하면 거기에 베니건스가 있어요. 그리고..."

당신은 브라이스 인형처럼, 검은 속눈썹 아래 커다란 눈망울을 살짝 왼쪽 아래로 굴린다. 당신이 호흡을 멈추고 미간을 약간 찌푸린 채, 오른 손을 머리 근처까지 들어 올려 빙글 빙글 돌리며, 당신만의 향기로운 이정표로 내게 설명하려 애쓰던 모습이 전화기를 통해 보이는 듯 하다.

소강상태의 하늘. 젖은 신호등은 붉은 색의 일그러진 크레파스로 그린 원형에서, 이윽고 푸른 색 털 뭉치로 변한다. 와이퍼가 내는 단조로운 소음이 지겨워진 나는 다시 라디오를 켠다. Dusty Springfield 가 Spooky 라고 낮게 웅얼거린다.

태풍이 지나가고 있다는 오늘. 겁에 질린 듯 창백한 회색 도시. 당신이 알려주던 장소를 천천히 지날 때마다, 그 곳들이 차례로 엷은 분홍색 빛을 뿜어내는 것 같다.

어떨까? 당신은 여전히 당신만의 독특한 지리적 체계 속에서 존재할까? 그렇게나 잘 웃던 예전의 당신 모습 그대로 일까? 아직도 시청이나 병원 따위는 어딘지도 모른 채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을까? 남들과는 다른 시각으로, 행복만을 위한 이정표들을 기억하며 도시 어디에나 당신의 건강한 미소와, 사랑과 열정의 페로몬을 퐁퐁 뿌리며 살아갈까?

“일어나요.”
“어어 왜 그래? 아직 덜 잤단 말이야.”
“이것 좀 먹어 봐요.”
“뭐? 이게 뭔데?
“녹차쉬폰케이크.”
“아니, 새벽부터 누가 이딴 걸...”
“먹어요!”
“응.”
“맛이 어때?”
“녹차의 향이 전체적으로 균형을 잡고 있어. 초여름 녹차 밭의 정경이 입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느낌이야. 투명한 햇살을 잘 머금고 자란 녹차 잎 하나하나를 스치는 깨끗하고 미지근한 바람. 한 잎 한 잎, 조심스럽게 따서 정성들여 덖은 녹차 잎. 그리고 케이크의 아몬드 가루와 바닐라에센스의 진하고 충실한 맛이 마지막까지 부드럽게 혀끝을 사로잡아. 정성과 수고가 느껴지는 행복한 맛이야. 살아있다는 강한 느낌이 바람을 탄 홀씨처럼 흩어져 입안 가득히 퍼지는군. 누가 뭐래도 이건 일품이야.”
“다행이네. 밤새도록 만들었다구요.”
“그래도 이건 좀 심하지 않아? 난 어제 소주도 많이 마셨어. 그런데 새벽 4시 30분에 케이크라니!”
“이제 자요. 나도 자야겠어요.”
“응.”

역시 당신은 어느 곳에 있던, 누군가에게 향기 가득한 정열적인 삶의 새로운 모습과 방향을 제시하는 강력한 페로몬 네비게이터가 되어 있을 것 같다. 흠... 그래도 그런대로 제법 느긋했던 시기였나보다. 해장국대신 녹차쉬폰케이크라니...


자작나무 껍질에 새기는 꿈.

www.allbaro.com
추천 0

댓글목록

손영대s님의 댓글

손영대s

나름 멋진 해장케잌인데요 ^^;;


모로가도 서울만 가도 된다고..
음식점과 슈퍼마켓으로 기억하든..
공공기관과 주요시설로 기억하든..
잘 찾아가면 장땡이죠..^^

개인정보처리방침

닫기

이메일무단수집거부

닫기
닫기
Forum
Gallery
Exhibition
Collection
회원목록
잦은질문모음
닫기

쪽지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