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린 날의 빌리 할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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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 사우/유성태
- 작성일 : 07-09-06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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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스레 쏟아지는 빗줄기에 어느덧 사그러들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벌써 긴팔에 외투까지 입고 길거리를 종종 걸으며 다닙니다.
어젯밤부터 흐린 하늘과 고즈넉이 가라앉은 분위기를 타보려고
찻물 끓여놓고 음악이나 들었습니다.
보통은 연주 음악을 주로 듣는데 흐린 날에는 보컬을 자주 듣습니다.
요즘 생각할 것이 많아서인지 신나는 스윙 음악보다는
생각의 깊이를 더해주는 차분하고 짙게 드리우는 음악을 자주 듣게 됩니다.
향긋한 자스민 차와 낮게 깔려드는 Billie Holiday의 음색은
참 잘 어울리더군요.
재즈계에서 절대적 찬사를 받고 있는 여성 보컬 빌리의 노래를
듣다보면 항상 생각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오래전 20대 초반 즈음에 봉사활동의 일환으로 미군들을 상대로한
직업여성들을 돕던 때가 있었습니다.
재한 미국군 클럽에서 미군을 상대로 술과 몸을 파는 분들이었는데
대부분의 여성들이 그 삶을 살면서 술과 마약에 손대고 정신적 상처와
영혼의 피폐함을 겪는 등 힘겨운 여정을 걷는 분들이었습니다.
또한 대부분이 불우한 개인사를 갖고 계신 분들입니다.
이 분들과 함께하는 동안 인생의 많은 부분을 배웠고 깨달았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정의 소중함
(사랑이란, 행복이란, 가정이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배우고 지키고 가꾸어가야만 한다는 것)
양성평등
(여성이란 이름만으로 당해야만하는 불평등, 편견, 왜곡된 사회구조
제가 페미니즘을 공부하고 나름 페미니스트 흉내를 내는 이유는 여기 있었지요.)
여러 이웃들을 만나고 대화하고 돕고 도움을 받던 소중한 시절에.....
어떤 분을 알게 되었습니다.
경상도 사투리를 심하게 쓰시던 30대 초반이셨던 여성인데
언제나 희미한 미소만 지을 뿐 말수가 별로 없던 분이셨습니다.
이 분 역시 항상 일정한 거리를 두고 계셔서 사귀기가 어려웠었는데
어떤 계기로 친해지게 되었습니다.
일단 마음 문을 열고 교제가 이루어지다 보니까 우리 봉사단체의
적극적 홍보대사^^;; 역할을 톡톡히 해주었던 분입니다.
어느날 사무실에서 차 한잔을 같이 마시고 있었는데
당신의 인생역정을 말씀해 주시더라고요
그 특유의 작고 짙은 음색으로....
경상도 한적한 시골 동네에서 태어났지만
미색이 좋고 한국사람치고는 육감적인 몸매까지 있어
10대에 동네 청년에게 성폭행을 당하는 불행을 겪었다고 합니다.
피해자인 그분에게 돌아오는 것은 감싸주고 위로해주는 것이 아니라
꼬리쳐서 그랬겠지 라는, 평소에 행실에 문제가 있었겠지 라는
동네 사람들의 오해를 넘어선 편견과 성의식의 왜곡됨으로 이어지는
여러 가슴아픈 현실에 고향을 등지고 서울로 올라왔다 합니다.
서울에서 어느 잘생기고 매너 좋은 사람을 만나 동거에 이르렀는데
그 남성은 의처증에 손찌검까지 하는 삐뚤어진 성격의 사람이었기에
역시 극심한 고초를 겪고는 도망치는 나왔다가 흘러 흘러 들어온 것이
그 미군클럽이었던 것입니다.
이 분의 어두웠던 과거를 듣고나니 제 눈이 열리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저 역시 사회의 낮은 자리에 처한 분들을 향한 약간의 편견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분들을 통해서 삐뚤어져 있던 저의 시선을 발견했습니다.
위대한 개츠비라는 소설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너와 다른 생각과 행동을 할지라도 나무라지만 말아라.
그들은 그럴 수밖에 없는 환경속에 있었을 것이다... "
후에 재즈라는 음악 장르에 관심을 갖게되면서
빌리 할리데이라는 흑인 보컬의 노래를 듣게 되었는데
그 낮고 짙은 음성 속에 슬픔과 애환이 담겨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마치 중년의 술집 마담이 술 한잔 따라놓고
자신의 어둡고 아팠던 인생 여정을 들려주는 듯 하더군요.
빌리의 노래 속에는
어느날 제 앞에서 자신의 과거를 담담히 털어놓았던
울지도 않고 웃지도 않으며
마치 다른 사람의 일을 얘기하듯이
두런 두런 이야기를 해주던
그 희미한 미소만 보이던 분과 가깝게만 느껴졌었습니다.
가슴이 저리게 들려오던 빌리의 노래와....
마음속으로 울게 만들었던 그 분의 슬픈 고백과.....
조금 더 시간이 흐른 후에
빌리 할리데이의 다큐멘터리를 보게 되었는데
참 놀랐었습니다.
빌리 역시 노래로 성공하기 전에
몸을 파는 불행한 삶을 살았던 여성이었던 것입니다.
그녀가 태어났을 때 모친은 불과 13세의 나이였고
10대에 성폭행을 당하고 유곽에서 잔심부름을 하다가
그녀 역시 매춘 여성으로 살게 되었다는......
어둡고 고난한 삶에서 그녀의 위안은 오직 노래 뿐이었다 합니다.
낡은 축음기를 통해 들려오는 노래를 들으며 흥얼거리며 따라 부르다
어떤 귀한 인연으로 음반을 취입하게 되었고 가수가 되었다는......
가수로 성공을 하고서도
불행한 결혼과 배우자의 폭력 등
빌리는 일생을 외로움과 고통 속에서 벗어나지를 못햇습니다.
그녀의 약물중독은 어쩌면 유일한 피난처였는지도 모릅니다.
결국에는 약물과용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지요......
오래전에 받은 전화 한통이 평생 제 가슴 속에 남아있을 것입니다.
요즘은 인터넷으로 책이나 음반을 구입하는데
몇년전까지만해도 주로 교보문고에 가서 구입했습니다.
그날도 책과 음반을 한아름 품고 집에와서
이것 저것 읽어보고 들어보고 하다간
피곤했는지 잠깐 잠이 들었었어요
잠결에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게슴치레한 눈을 뜨고 전화를 받았는데
낮은 목소리가 저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잘 지냈셨어요? 저 00 엄마에요......"
.............네?......... 잘못 걸려온 전화인줄 알았었습니다.
바로 오래전 미군 클럽에서 일하시던 그 낮고 짙은 목소리의 주인공이였던 것이었어요.
그 분은 클럽에서 일하시던 중에
괜찮은 미군을 만나셨고 그 남자를 따라 미국에 가셨었습니다.
미국에 가시기 전에 임신중이었는데
농담 반 진담 반 식으로 아기 이름을 지어달라고 하시더군요.
고심 끝에 저 역시 농담 반 식으로
딸을 낳으시면 "0知"
아들을 낳으면 "0明"
두개의 이름을 적어 줬었습니다.
그 분이 미국으로 가실 때 즈음에 저는 군대에 가고 제대를하고
또 유학을 다녀오는 여러 상황들이 있었기에 연락은 막혀졌고
거의 잊고 살고 있었습니다.
뜻하지 않았지만 너무나 반가운 음성, 수화기 넘어로 들어오는
목소리는 전과같이 약간은 무미건조한 듯한 낮고 짙은 목소리가 아닌
따뜻한 숨결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 분은 한국에서 조심스레 신앙생활을 시작하시더니
미국에 가서는 더 깊은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셨었나 봅니다.
그곳 미국에서 쉽게 깨어지고 상처 받은 가정들을 위한 봉사를 하시다가
더욱 깊어진 신앙으로 신학교를 입학하셔서 본격적인 사역을(가정상담 등..)
준비중이시라는 너무나 반갑고 기쁜 소식을 전해주더라고요.....
제가 이사를 가고 하는 동안에 전화번호가 바뀌었었는데
그 기쁜 소식을 전하고 싶은 마음에 수소문해서 저의
전화번호를 알아내셨다고..... 상처 가득한 과거가 있던 분이
주님의 은혜로 살고 있다는 것을 꼭 말해주고 싶었다고....
전화통화를 서너시간 하면서 서로 울고 웃고...
너무나 감사하고 눈물이 나올 정도로 고마웠던 추억입니다.
저에게 요즘도 신앙생활 열심히 하시죠? 하고 묻습니다.
잠시 침묵하다 말을 딴데로 돌리고 말았습니다.
교회를 떠난지 십여년이 넘었지만 제겐 언제나
인간에 대한 예의와 이타적인 삶에 대한 경외는 있습니다.
빌리 할리데이는 재즈 보컬로 성공을 해서도
어두운 과거와 상처를 치유받지 못한체
평생 마약과 술로 스스로를 파괴하는 인생을 살다
약물과용으로 이 세상을 떠났었습니다.
만약.... 만약....
빌리의 주변에 사랑과 정성으로 보살펴주는 이가 있었다면.....
간만에 분위기에 젖어서 할리데이의 음악을 듣다가
생각나는 에피소드를 전해드렸습니다.
댓글목록
김병인님의 댓글

오늘은 집에 가서 할 일이 생겼네요. ^^;
언제 참치에 백세주라두 한잔 해야죠?
시간되면 전화주세요...
홍건영님의 댓글

좋은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빌리 할리데이의 과거가 그렇게 어둡지 않았다면
그런 보컬이 나오지 않았겠죠?
안그래도 비는 계속 오는데 집에 들어가면 Lady in satin LP라도 걸어봐야겠습니다
김형배님의 댓글

이런 귀한 글을 읽게 되는군요..
정말 좋은 글, 가슴에 와닿는 글입니다..
빌리 할리데이도 그렇고.. (저도 무진장 좋아하는 가수입니다..)
그 진한 음색이 가슴에 울려 오는군요..
전화를 걸어 오셨다는 그 분의 이야기도 그렇고..
참으로 따스한 글입니다..
흐뭇해 집니다..
좋은 글에 감사드립니다.
강웅천님의 댓글

그녀의 노래를 잊고 지낸지 한참 되었는데, 한동안 또다시 그녀의 진득한 음색에
빠져들게 생겼습니다.
더불어 추억들도 굴비처럼 줄줄히 꿰져 나오네요 ^&^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강정태님의 댓글

고용한 호수의 잔물결같은 유선생님의 글에서 많은 것을 느끼고 생각하게 합니다.
좋은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권태현님의 댓글

라이카클럽에서 멋진사진 뿐만아니라 이렇게 훌륭한 글을 읽을 수 있었어 넘 행복합니다.^^
삶을 돌아보게 하는 귀한 글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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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이렇게 좋은글은 왜 별이 하나도 없나요?
권태현님의 댓글

이 글을 읽고 바로...
빌리 할리데이 음반을 구매했습니다.(위의 사진이 있는...ㅎㅎ)
어제 택배로 도착해서 함 들어보았습니다.
덕분에 오랜만에 재즈음악에 빠져봅니다.
감사합니다.^^
박장수님의 댓글

별을어떻게주는지방법을모르겠습니
김주홍님의 댓글

좋은 글, 소중한 글 읽습니다.
좋은 노래, 좋은 사람을 생각나게 하는 것보다 편한게 있을까요....
저도 오늘 밤에 '빌리'의 노래를 틀어봐야 겠습니다....
김복렬님의 댓글

우울한 아침에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가슴 찡한 좋은 글에 감사드립니다..재즈에 관심을 가지고 싶으나 아직 클래식도 섬렵하지 못한 처지라 미루고 있었습니다만,,, 오늘 빌리 할리데이의 음악은 한번 들어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우/유성태님의 댓글

원 작성회원 : 김병인
오늘은 집에 가서 할 일이 생겼네요. ^^;
언제 참치에 백세주라두 한잔 해야죠? 시간되면 전화주세요... |
엎어지면 무릎팍 찍는 거리인데 뵙기가 쉽지 않네요.
주말 지나고 백세주 한잔 올리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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