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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하나뿐인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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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김명기
  • 작성일 : 07-08-29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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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하나뿐인 당신

찬장을 뒤져 간신히 찾아낸 라면 한 개. 그리고 빵빵하게 잔뜩 부풀어 오른 피클 한 팩. 저녁 식사로는 충분하지. 그렇게 생각하다가 뭔가 억울하다. 잠깐 오늘 하루를 돌이켜 본다. 그리고 다시 천천히 젓가락을 움직인다. 오늘의 노동량에 비교해 볼 때 정말로 충분한 것이다. 턴테이블에서는 갓 구워낸 바삭바삭한 쿠키 같은 E. Harris의 음성을 담은 Wayfaring Stranger 가 빙글 빙글 돌고 있다.

펄펄 끓는 물에 라면을 넣으려다 문득 생각한다.

'결국 라면 하나 끓여 먹는 주제이면서 이렇게 콩 볶듯 사니?'

그러나 젓가락 가득 집어 올린 탐스러운 라면 발을 보며 다시 생각한다.

'어쨌든 배는 채워지지 않는가? 불평할 것은 없어. 그게 인생이야.'

습기 가득한 더위를 막아 선 두터운 유리창 밖에는 밤으로 빠져 들어가는 애처로운 검은 하늘이 있다. 나는 막 울음을 그친 여인의 번진 마스카라 같은 색조의 산과 더 멀리 비를 잔뜩 품은 먹구름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오늘하루 나는 소망과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졌나? 마음속의 대답은 그리 후하지 않다.

나는 냉장고로 다가가 다시 제일 위 칸부터 아래로 찬찬히 훑어본다. 반쯤 남은 소주가 한 병. 아직은 새것인 맥주 한 캔. 나는 잠깐 생각한다. 어째서 내가 지닌 모든 것은 하나뿐일까? 라면도 하나. 피클 팩도 하나. 소주도, 맥주도 한 병. 문득 깨닫는다. 내 가난한 삶은 이렇게 하나뿐인 소품들로, 간신히 하루라는 징검다리를 건너고 있다. 이미 제법 오랫동안.

"나 배고파."
"어머, 뭐 좀 사서 드시지 그랬어요."
"응. 월요일부터 주머니에 7천원 밖에 없었어."
"아니 그럼 좀 달라고 하시지."
"아니 그러고 싶지 않았어. 한 번 버텨보고 싶었지."
"왜요?"
"그냥. 월요일 저녁엔 길거리에서 1,000원짜리 핫도그를 하나 사 먹었지. 설탕과 케첩을 잔뜩 발라 주더군. 좀 오래된 것인지, 속이 니글거려 혼났지. 튀김옷도 딱딱했고, 속에든 소시지는 거뭇거뭇했어."
"불량식품 드셨어요?"
"응. 갑자기 그게 먹고 싶더라고."
"당신도 참..."
"화요일에는 신문을 샀어. 이것도 1,000원. 정식 신문이 아닌 옐로우 저널. 이 세상의 온갖 쓰레기 같은 이야기들이 잔뜩 들어 있어군. 근데 이건 핫도그하고 달리 후련했어."
"당신 그거 읽은 뒤 화장실에 놓지 말아요. 샤워할 때 젖으면 치우기 힘들어요."
"응. 그랬군. 미안해. 이젠 신경 써서 둘 게. 그리고 수요일에는 퇴근길 전철역에서 리더스다이제스트를 한 권 샀지. 고등학교 때 참 많이 읽었었지. 이게 2,500원이던데?"
"그럼 당신 호주머니에 이제 2,500원이 남았겠네요?"
"응. 이걸로 목, 금, 토, 일 4일을 버텨야 돼. 그런데 오늘 야쿠르트 아이스크림이 너무 먹고 싶었어. 그게 3,500원이더군. 왜 사람은 호주머니에 돈이 없을 때 먹고 싶은 것이 많아지는 것일까?"
"당신 정말 이상해요. 그럼 4일 후에는 돈이 생기나요? 누가 준대요?"
"원고 쓴 게 아직 입금되지 않았더군. 월 말이니까 좀 넣어주지 않을까?"
"그럼 안 들어 올 수도 있다는 말이잖아요. 그런데 대책은 있어요?"
"없어. 아니 그런 거 필요 없어. 나는 내가 그런대로 살아 내리라는 것을 알아. 그것보다 내가 원하는 것이 모조리 돈으로 해결되는 것이라는 게 기분 나빠. 아니면 내 희망 사항이 꼼짝없이 금전적인 범주 안에 있다는 것 말이야."
"그러지 말고 내 말 들어요. 내가 지금 돈을 좀 보낼게요."

나는 말없이 전화를 끊었다. 침묵의 문으로 변한 전화기 너머에는 안타까워하고 속상해 하는 당신의 찌푸린 눈썹이 있다. 아마 붉은 루즈를 칠한 입술을 새하얀 이빨로 꽉 물어서 일그러져 있을지도 모른다. 못된 것은 나다. 못난 것도 나다. 하지만 당신은, 당신이 내게 뭘 잘못했을까? 곰곰이 되짚어 보고 있을 것이다.

사랑 가득한 당신. 심장에 피한방울 흐르지 않을 정도로 메마른 나. 어쩌다 나 같은 바보를 가슴에 품게 된 것일까? 금전을 기준으로 한 이 새로운 카스트 제도의 세상에서, 무명작가의 여인이라는 가장 낮은 계급을 선택한 당신. 당신은 낮은 곳으로 임한 과시욕 강한 여신인가? 오래전 내가 당신에게 쏟아 부었던 막말을 떠올린다.

"당신은 남자들이 여자들을 길들일 때의 전통적인 방법으로 내게 접근하고 있군. 과시하고, 자랑하고, 어디 돈 몇 푼으로 나를 가져보겠다? 당신 돈 많아? 까불지 마. 마음대로 되지는 않을 걸?"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당신을 안타깝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나는 늘 당신을 걱정하게 한다. 내 삶은 당신이 보기엔 너무 위태로운 것이겠지. 내가 더 바보 같이 생각된다. 25초쯤 지난 후, 나는 나 같은 바보를 사랑하는 당신은 얼마나 가슴 아플까도 짐작하게 된다. 무딘 주제에 의도한 바는 아니다. 그냥 바람이 불어오듯 저절로 느끼게 된 것이다.

내가 지닌 모든 것들처럼 내게 하나뿐인 당신. 언제나 당신을 걱정하게 하고 슬프게 하고 고민하게 만드는 나. 나는 문득 방금 당신과의 대화가 온전하게 끝난 것이 아님을 느낀다. 나는 다시 전화기로 손을 뻗는다. 나는 아직 말하지 못했다. 내 삶에 함께하는 모든 하나뿐인 것들 중에서 당신이 최고라는 것을.

이윽고 L.P.는 Paul Anka의 나무 향기를 닮은 팍팍한 음성으로, I Don't Like To Sleep Alone 라고 웅얼거린다.


천당(天堂) 아래 분당(盆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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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창밖의 어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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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손영대s님의 댓글

손영대s

사실 사랑하는데에는 댓가도..조건도 필요하지 않아요.. 라고..

김주홍님의 댓글

김주홍

가슴에 와닿는 글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것은 내게 있어 하나일수 밖에 없죠....
비슷한 모양을 해도 내가 가지고 있는 그리고 가질수 있는 한가지는 바로 내손위에 내앞에 있기 때문이니까요. 좋은 글 읽고 갑니다.

좋은 하루 보내세요....

cho sungju님의 댓글

cho sungju

I,m just a poor wayfaring Stranger a traveling through ...... 나그네 같은 떠돌이 방랑자 같은 정서의 심지에 불을 붙이는 노래가 더러 있지요.( 현실이야 그렇건 말건)
술 한잔 하고 일찍(?) 귀가하니 멋진 글이 기다리고 있어 이리 반가울 수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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