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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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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김명기
  • 작성일 : 07-08-01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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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

렌터카. 새 차의 내장재 냄새. 오후 2시 30분. 분당 수서간 고속화 도로. 시속 78Km/h. 소나기 프로젝트의 두 번째 트랙 우울한 편지, 2분 6초. 그리고 나는 감자접시가 떠올랐다.

당신이 맥주잔에 통째로 담아 둔 감자. 그건 아니지. 라고 내가 감자의 눈 부분만을 조그맣게 잘라, 실험실의 살레같이 얕은 접시에 담아 둔 감자. 물을 붓고, 피아노 위에 올려둔, 파뿌리 같은 하얗고 연약한 실뿌리가 사방으로 번지고, 제법 나무 가지 같은 줄기가 떡잎을 펼치기 직전의 감자 조각.

오늘 퇴근하면 잊지 말고 물을 줘야지.

아주 작은 조각에 불과한 감자는, 무사히 싹을 틔우고 필사적으로 햇살을 찾기 시작한다. 접시에 물을 붓다가 조금이라도 방향을 틀어 놓으면, 감자 순은 여지없이 남태평양의 야자수 같은 모습으로 기우뚱해진다. 감자는 양성 주광성이다. 그건 누구라도 쉽게 알 수 있다.

피아노 위에 놓여 진 파리한 감자 순을 떠올리고, 싫지만 나도 모르게 당신을 떠올린다. 젊고 건강한 당신. 적어도 내게는 100%의 여자였던 당신.

그리고,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할 것 같아요.
맞는 말이야.

배금주의의 행성에 단 한 푼도 없이 사랑을 시작한다는 것은 누구나가 비웃을 일이다. 세상에 그런 바보가 어디에 있을까? 그러나 우리는 막무가내로 시작했다. 우리가 생각하고 믿는 마음속의 지도를 따라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진급했어요.
잘됐군.
월급도 많이 올랐어요.
그것도

당신은 우리의 시간을 조금씩 잘라 현실의 수지를 맞추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예상대로인 것 같았다. 하지만 차례대로 다가오는 삶의 여러 가지 문제들처럼, 시작은 처음부터 문제를 잉태하고 있었다. 당신은 집에 돌아오면 곧바로 막대기처럼 쓰러졌고, 우리의 시간대는 조금씩 틀어졌다.

특강을 조금 더 할래요.
얼마나?
두 시간만 더하면 300이 넘을 걸요?
부자 되겠네.

감자의 눈이 돋은 부분만 도려내 접시에 담아 두면 감자는 무사히 싹을 틔운다. 감자의 남은 조각에 있는 최소한의 영양분을 빨아들이며 감자순은 하늘로 솟아오르려 한다. 그러나 조그만 감자 몸통의 영양분은 한정되어 있다. 맹물과 광합성만의 자양분 생성은 감자를 건강하게 만들지 못한다. 한계는 머지않아 다가온다.

당신을 감당 못 하겠어요.
무슨 소리지?
일과 당신. 미래와 당신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요.
그건 편리하군.

100%의 여자였던 당신의 눈에서, 회색 도시의 생존방식이 읽혀진다. 속도를 내기 위해서 거추장스러운 것은 버려야 한다. 사랑으로 비롯된 일. 그러나 지금 가장 거추장스러운 것은 사랑이다. 나만 없으면 당신의 삶은 얼마나 자유로울까? 나는 당신이 되어 상상한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당신의 등에 날개가 돋아난 것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바로 그 날개가 당신을 추락하게 만들 것이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인생은 공짜가 아니다. 직접 겪어 보지 않으면 절대로 알 수 없다. 그리고 내게는 당신의 인생을 예견하고 지적할 권리가 없다. 당신 인생은 당신 것이다.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을 거야.
그래도 끝내야 해요.
아마 엉뚱한 곳에서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이어지겠지. 당신은 세상을 몰라.
그래도 울지 않고 견뎌볼 거예요.

지금, 당신은 어디에 있을까? 울지는 않았을까?

나?
나는 지금 렌터카를 운전하고 있다. 새 차의 내장재 냄새. 오후 2시 30분. 분당 수서간 고속화 도로. 시속 78Km/h. 소나기 프로젝트의 두 번째 트랙 우울한 편지, 3분 44초. 그리고 나는 피아노 위에 두고 온, 남태평양의 야자수처럼 삐딱하게 자라나는 감자 접시를 떠올린다. 여름 햇살이 눈에 파고든 탓일까? 왜 인지는 모른다.

어쨌든 나는 오늘 퇴근하면 곧바로 감자 순에 차가운 물을 줄 것이다. 정말이다.


천당(天堂) 아래 분당(盆唐)에서...

www.allbaro.com


[사진 : 높이 날기 ]
LEICA V-LUX1
Manual Mode 16:9 Ratio (1920 * 1080)
추천 0

댓글목록

홍경표님의 댓글

홍경표

아주 오래전 내가 철석같이 믿고 단정지었던, 틀림없는 '사랑'이라는 것이 거짓으로 밝혀지던 밤이 생각납니다.
이제 다시 공부합니다. 그때 보다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움직이지만 더욱 선명합니다.

사랑이라는 단어의 정의가 사람마다 모두 동일하다면 세상은 어덯게 변할까요?

김명기님의 댓글

김명기

모든 사랑은 그 순간의 진실이라고 하더군요. 매번 속아도 또 매번 믿게 되지요.
결국 나자신이 부족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랑의 정의가 똑 같다면
우리의 삶이란 훨씬 단순해지고, 밋밋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

이승훈님의 댓글

이승훈

한편의 수필같은 담담한 그러나 아련히 저려오는 글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스합니다

사진도 참 좋네요

항상행복하시길........ ^^

김명기님의 댓글

김명기

늘 생각하지만 막눈이라서 사진을 올리는 것은 정말 아슬아슬합니다. ^~^

돌아보면 흑백사진 같은 과거사를 돌아보는 것은 라이카 질감의 사진을
받아든 것 같습니다.

참 라이카는 대단하지요? 어떻게 감성을 녹여내는 기계를 만들었는지...

김#효문님의 댓글

김#효문

오랫만에 글 올리셨네요. 그 간 바쁘셨는가 보죠?
무더운 여름철 많이 지치고 힘드시죠?
다 태워 버릴 듯한 이 여름도 기껏해야 한 달 정도
남았네요... 힘 내시구요...^^

사물 하나도 상당히 깊은 통찰력으로 보시는 것 같은데
'인생은 경험해 보지 않으면 절대로 알 수 없다'고 하는 부분이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잠시 스치는 생각이지만...
사랑도... 인생살이도... 자연도... 많은 부분이 양성 주광성 아닐까 합니다.

김명기님의 댓글

김명기

넵. 제 6차 기마대장정 훈련으로 정신이 없었습니다. ^~^
이번에는 8월 15일에 독립기념관에서 출발, 포항을 경유해서 독도까지 말을 타고 갑니다.
노정에 좋은 사진 한 장이라도 건졌으면 하는 숨겨진 욕심을 슬그머니 지니고
말을 달립니다.

양성주광성, 밝음... 결국엔 어둠을 어떻게 잘 처리하느냐가 삶의 반영을
제대로 표현하느냐가 될 것 같은데... 스스로 생각하면 아직도 멀었다는
부끄러움만 배어나옵니다.

응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힘내서 열심히 하겠습니다. ^~^

안미희님의 댓글

안미희

돌아선 모든 가슴의 누추함에도, 지켜내지 못한 모든 가슴의 회한에도
햇살이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어린 날의 포부이든, 삶이 부과하는 의무이든,
믿음,을 떠올렸던 감정이든..)
감히 누군가의 진심에 함부로 다는 댓글이 아니라 실은,
스스로의 민망한 바램일 뿐입니다.^^
글과 사진이 알싸합니다..감사합니다.

김용수JKT님의 댓글

김용수JKT

글과 사진에서 배어나오는 느낌이............ 안마희님 말씀대로 알싸~ 하군요

풍부한 감수성이 배어나오는 서정적인 글과

아련한 먼곳에로의 궤적이 눈부신 사진이 같이 주는 느낌이 참.......예리하게 와닫습니다 ^^

김명기님의 댓글

김명기

인용:
원 작성회원 : 안미희
돌아선 모든 가슴의 누추함에도, 지켜내지 못한 모든 가슴의 회한에도
햇살이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어린 날의 포부이든, 삶이 부과하는 의무이든,
믿음,을 떠올렸던 감정이든..)
감히 누군가의 진심에 함부로 다는 댓글이 아니라 실은,
스스로의 민망한 바램일 뿐입니다.^^
글과 사진이 알싸합니다..감사합니다.



부족한 글과 사진을 알싸하게 보아 주시니,
그 부드러운 마음에 제가 더 감사합니다.

거친 세상, 거친 호흡. 그래도 지난 추억은 모두
흑색 사진 같습니다. 역시 알싸 합니다.... ^~^

김명기님의 댓글

김명기

인용:
원 작성회원 : 김용수JKT
글과 사진에서 배어나오는 느낌이............ 안마희님 말씀대로 알싸~ 하군요

풍부한 감수성이 배어나오는 서정적인 글과

아련한 먼곳에로의 궤적이 눈부신 사진이 같이 주는 느낌이 참.......예리하게 와닫습니다 ^^


그래서 사진 재주가 없는 막눈은
글로 사진을 찍어 보려고 발버둥입니다.

얼핏 그런 느낌을 주었다면
정말 영광이구요, 뭔가 그런대로 방향은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닐지...
부질없는 희망을 지녀 봅니다. ^~^

cho sungju님의 댓글

cho sungju

사랑을 사랑이라 말해버리면 그 사랑은 이미 그러한 사랑은 아니라고......
지금 이 순간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 진실이라고.....
언젠가 그사람이 내게 했던 얘기가 생각나네요.
지금 생각하면 내 사랑은 계속 움직여 가는 것이야라는 얘길 하고 있었던 것
시리게 파란 하늘을 욕망과 사랑이 빠르게 움직여 가고 있군요.

안준국님의 댓글

안준국

어린시절 골목길을 철없이 뛰어가다가 전봇대에 부딪혀서 털썩 주저앉았을 때, 콧잔등 안쪽에서 느껴지던 시큰시큰한 느낌과 냄새.. 가 이 글을 읽다보니 느껴집니다.(다분히 개인적인 '알싸함'입니다만..)

비행기의 하이라이트가 너무도 무심하게 눈이 시려 내 인생을 비웃는 것 같습니다.

콧잔등도 시큰시큰, 눈도 시큰시큰..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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