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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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 김명기
- 작성일 : 07-07-13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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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에서.
Sonar(음향 추적 장치)가 고장 난 어뢰처럼, 퇴근길 피곤한 세상을 하릴없이 빙빙 돌다 책방에 들렀다. 정신을 차려보니 수많은 새 책들이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잠정적 구매자인 나를 바라본다. 나는 무턱대고 부럽다.
조심스럽게 발길을 옮긴다고 했지만, 고개를 들어 보니 나는 세상 속에 서있다. 좆아 다닌다고 돈이 벌리는 것도 아니고, 오늘 100가지 일을 한다고 해서 내일 일까지 한꺼번에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지금 세월이 나를 기다리는지, 내가 세월을 기다리는지, 방치된 하로동선이 되었다. 내가 혼자 열심히 뛴다고 세상이 돌아보지 않는다. 기다린다고 늘 해피엔딩도 아니다.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본 것, 그리고 언젠가 될 일을 이렇게 하면 더 빨리, 더 쉽게 갈 것이라고 말한다. 그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무리는 말자. 처음에 쓸 데 없는 일은 아니었으나, 결국 쓸 데 없는 일이 된 적도 있다. 이 나이를 먹고도 어떻게 사람이 하는 일에 확신 같은 것을 가질 수 있을까? 탁한 격류는 소용돌이치며 내 곁을 돌고, 나는 좀처럼 세상에 어울리지 못한다.
나는 이렇게 잉크냄새 솔솔 풍기는 새 책을 쓸 수 있었던 저자들이 부럽다. 그들에게는 사유할 시간과, 마음속의 그림과 구상을 문자로 잉태하고 출산 시킬 수 있었던 여유가 있었다. 글쓰기의 능력은 제외하고라도, 그 시간과 여유를 만들어 낸 그들의 재능이 부럽다. 그 인고의 순간들이 얼마나 고즈넉하고, 안온하고, 평화로운지를 이미 알기에 백배나 더 부럽다.
가난한 작가의 일상. 겉에서 보기엔 민물가시고기의 거칠고 소박한 둥지 같아 보인다. 하지만 그 속의 편안함은, 바쁘게 돌아가는 물 밖에서 스치듯 바라보기엔, 감히 상상도 못할 만큼의 평화와 행복이 있다.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에 눈뜨는 아침. 상추 밭에 물을 뿌리며 소일하는 오전. 영원히 못 박힌 듯한 정오의 태양. 시계의 초침을 따라 조금씩 저물어 가던 석양의 시간. 익숙한 별들이 안부를 물어 오면, 찌그러진 냄비에 라면 한 개, 소주 한잔의 고독한 저녁. 박인수나 배호의 한을 들으며 마시던, 질 낮은 세작이나, 얻어온 보이차 한잔에 담긴 세월.
문득 얽혀들었던 과거, 해결불가능하게 꼬인 일들이 수렁을 벗어난 수레처럼 달리던, 명쾌한 깨달음의 순간. 내가 적어도 인간으로 살고 있다는 가슴 벅찬 발견의 시간. 나는 그 사랑스러운 순간들이 매순간 코끝이 찡찡 울리도록 그립다. 일생에 단 한 단락. 내가 가식 없이 진짜 인간으로 살았던 시간. 무쇠난로 속의 통나무 장작이 구수한 향을 내며 탁탁! 타오르던 가난하고, 고독하고, 아무도 찾지 않는 깊은 숲 속의 남루한 나날들.
그러나 현실은 야비하고, 게으른 짐승의 시간. 왜 성을 내는지, 왜 미워하는지, 왜 닦지도 않은 세균 투성이의 누런 이빨을 드러내는지, 왜 서로 헐뜯자고만 하는지. 멍청한 하이에나처럼 도무지 파악할 길이 없는 좀비들 사이에 온전한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 이게 뭔 지랄인지! 도무지 내가 모를 때. 내 문장이 한자 한자 조립되던 무념의 시간이, 나는 더더욱 목마르다.
불혹을 넘어선다는 것은, 설혹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미소 짓는 상대방의 악감정이 온 몸으로 읽힌다는 의미도 있다. 가끔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다만 내가 그들 앞에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증오의 대상이다. 그들에게 없는 몇 가지, 그들이 말하지 못한 몇 가지 생각. 불투명한 생각을 눈에 보이게 정리한 것이, 부유하고 똑똑한 그들이 아니라 멍청한 나라는 것을 도무지 참을 수 없는 것이다.
나는 피곤하다. 나로 인해 스스로 두려움과 알 수 없는 맹목적 적개심을 키우는 자들이 피곤하다. 관심을 기울이면 두려움으로 증오를 기르고, 무관심하면 있지도 않은 자존심의 상처라고 짖어댄다. 영원한 음지의 숲에 서식하며, 미움만 무성하게 번식시키려는 무한 직진성향의 무지한 자들이 나는 피곤하다. 그저 서로 알지 못한 순간으로 모든 것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만나지 않은 것만 못한 그 악연들은 진지하게 피곤하다.
머리 무거운 몇 가지 사유를 숙명의 침처럼 대뇌에 꽂은 채, 오늘 책방 수줍은 새 책들 사이를 걸었다. 가난하지만 복 많은 자들. 진정한 삶의 고독한 관찰자들. 밥에서 자유롭지는 못하되, 잠시 멈추어 삶과 밥의 무게를 슬몃 가늠해보며 다시 표표히 길을 가는 자들. 속박의 길고 긴 삶 속에서, 짧은 순간 온전한 순결이 허용된 특별한 시간의 순례자들. 나는 정말 죽을만치 작가들이 부럽다.
천당(天堂) 아래 분당(盆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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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결국 무라카미 류의 '공항에서'를 손에 들었다.
그리고 절반도 읽지 않아, 그의 배터리가 다 닳아 버린 것 같은 감.
흠... 하지만 71쪽 ‘노래방에서’ 라는 장을 읽고
그의 칼날에 여전히 날이 선 것을 느꼈다.
역시 대단하군.
[사진 : 봉평의 밤]
LEICA V-LUX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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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성인규님의 댓글

북두칠성을 찍으셧군요...언제보아도 멋진 성좌...^^
김명기님의 댓글
넵! 삼각대로 고정하고 목이 부러져라 하늘을 보았지요... ^~^
김윤진님의 댓글

북두칠성 잘 보았습니다
어디서 찍으셨나요
김명기님의 댓글
강원도 봉평의 스파빌리지 라는 펜션입니다.
가족들끼리 방문하면 좋은 곳이었습니다.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보느라고 목이 구부정해졌답니다. ^~^
늘 건강하시지요?
김#효문님의 댓글

가끔씩 들어와서 님의 글을 보고 있습니다.
잘 계시죠?
예전에 고초?를 겪고난 후 쪽지 답장을 드려야 겠다싶어...
답장을 쓰다가 지우고... 쓰다가 지우고... 여러 차례 반복했죠.
ㅎ~ 연애하는 사이도 아닌데 말이지요.
오늘은 왠지 심기가 불편해 보이십니다.
살다 보면 불뚝불뚝 화가 치밀어 오를 때가 있는데
그럴 때 쓰신 글 같기도 하고...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솔직이 저는 님이 글을 잘 쓴다, 못 쓴다를 구별할 줄 모릅니다.
그냥 마음에 듭니다. 총각 시절 마음에 드는 아가씨를 봤을 때 처럼 말이죠.
김명기님의 댓글
원 작성회원 : 김#효문
가끔씩 들어와서 님의 글을 보고 있습니다.
잘 계시죠? 예전에 고초?를 겪고난 후 쪽지 답장을 드려야 겠다싶어... 답장을 쓰다가 지우고... 쓰다가 지우고... 여러 차례 반복했죠. ㅎ~ 연애하는 사이도 아닌데 말이지요. 오늘은 왠지 심기가 불편해 보이십니다. 살다 보면 불뚝불뚝 화가 치밀어 오를 때가 있는데 그럴 때 쓰신 글 같기도 하고...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솔직이 저는 님이 글을 잘 쓴다, 못 쓴다를 구별할 줄 모릅니다. 그냥 마음에 듭니다. 총각 시절 마음에 드는 아가씨를 봤을 때 처럼 말이죠. |
야아 오랜만에 이런 고백(?)을 듣는 걸요?
가슴이 쿵닥쿵닥 합니다. ㅎㅎ
네, 때로 사는게 뭔지... 하는 생각이 들때가 있지요.
어째서 좋게 좋게만 살아도 힘든 세상에
막말, 뒷말, 해가면서 남에게 지옥도를
보여주며 사는 사람들은 또 뭔지. 그들은 왜 그렇게
살아야만 하는지...
그래도 세상은 이래저래 손해는 아니다. 하는
두서 없는 희망도 가져보구요... ^~^
부족한 글을 좋게 보아주시니 너무 감사합니다.
빨리 어수선한 일들이 지나고 다시
제 고유의 자리로 돌아 왔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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