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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 속의 진흙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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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김명기
  • 작성일 : 07-05-25 0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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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 속의 진흙인형

어지러운 생각에 빠져 있다가, 간신히 선잠이 들었다. 흐린 창밖에 새카만 먹물 같은 밤이 흘러내린다. 몇 년 전부터, 이 행성의 여기저기에 출몰하는 ‘게릴라성 호우’ 다. 숲은 냉정한 게릴라들의 차가운 눈빛에 점령되었다.

빗방울이 지붕을 때리는 소리는, 비 피해, 홍수, 이상기온, 인재, 천재, 이재민 등의 반갑지 않은 단어들을 군용 담요 위에 던져지는 화투장처럼 머릿속에 늘어놓는다. 그리고 사랑. 제기랄! 그리고 당신. 제기랄! 제기랄!

밤새도록 폭우가 쏟아진다. 잠깐 잠깐씩 멈추었나 싶게 소강상태를 보이다가 여지없이 쏟아 붓는다. 깊은 정글 속. 필사적인 도망자를 좁혀드는 야만인들의 낮은 북소리처럼 울리는 천둥소리. 나는 한 밤중에 눈을 떴다.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다.

수많은 생각들이 투명한 거미 떼가 되어 빗줄기를 타고 달려든다. 수 억 마리의 조그만 거미들이 지붕을 뚫고, 천정을 뚫고, 마침내 피부와 두개골을 뚫고 대뇌 피질에 직접 쏟아진다. 나는 진저리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윽고 호두껍질처럼 단단한 시간 속에 봉인되었던 낡은 기억들이, 하나씩 부풀어 오르다 팝콘처럼 터진다. 두려운 어둠 속으로 손을 넣고 감촉만으로 더듬어 담배를 꺼내 물지만, 막무가내다.

라이터를 켜자, 나를 어둠 속으로 끌어당기던 검은 손들은 멈칫 포위망을 풀고 물러난다. 그러나 끈질긴 기억은 나를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우울하다. 고독하기도 하다. 어느 쪽이 더 짙은 감정일까? 나는 판단을 포기한다. 좀비 같이 어눌한 동작으로 발에 슬리퍼를 끼우고, 화장실로 간다.

어설프게 설치했던 물탱크로 빗물이 쏟아져 들어갔나 보다. 수도꼭지에서 흙탕물이 나온다. 잠시 망설이다가 그대로 샤워를 한다. 어차피 내 몸은 모두 흙으로 만들어 졌고, 흙으로 돌아갈 것인데...

잠깐, 읽고 있던 알렉산더 대왕의 일화를 떠올린다. 정확한지는 모르겠다. 나의 기억은 이제 너덜너덜한 우산을 닮아간다.

알렉산더가 세상의 끝까지 모두 정복한 뒤, 신이 사는 입구에 이르렀다. 신을 만나고 싶으니, 문을 열라고 고함을 쳤다. (무진장 거만했겠지.) 당황한 신의 문지기들이 나와서 이곳은 인간 세계의 사람이 올 곳이 아니라고 만류한다. 알렉산더는,

‘그러나 나는 지상의 왕이니 뭔가 기념이 될 만한 것을 달라.’ 고 요구한다. 잠시 후 신의 사자는 보물을 들고 온다. 그것은 조그만 구슬이었다.

저울의 한쪽에 구슬을 놓고 다른 쪽에 금덩이를 놓았으나 저울은 구슬 쪽으로 기울었다. 또 다른 금은보화를 Box 채 올려놓았으나, 저울은 구슬 쪽으로 기울어지기만 했다. 알렉산더가 물었다.

“이 구슬은 무엇이냐?”

신의 문지기가 대답한다.

“그것은 사람의 눈알이다. 사람의 눈알은 아무리 좋은 것을 보아도 더욱 교만해지고 더 사치한 것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애초부터 눈에 차는 보화 따위는 없는 것이다.”

알렉산더가 신의 문지기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이 교만한 눈알보다 더 무게 있는 것은 무엇인가?”

신의 문지기는 말없이 구슬에 흙을 조금 뿌렸다. 그러자 곧바로 저울의 수평은 달라졌다. 결국 아무리 대단한 인간이라도 결국 죽어 흙이 된다는 의미겠지... (까불면 너도 죽여 없애겠다는 일종의 협박도 가미되어 있었을 것이다.)

머리가 쭈뼛해 지는 차가운 물줄기에 대충 샤워를 마치고 거실로 들어가자, 이런, 비가 샌다. 나는 벽을 타고 흐르는 빗줄기를 망연히 바라본다. 사진이 젖고, 붙여 놓은 시가 젖고, 누추한 기억마저 젖는다. 나는 사진을 몇 장 떼어 내려다가 그만 둔다. 현실보다 더 생생한 사진이 어디에 있으랴. (중년의 가난한 사내가 뒷머리를 몇 번 긁적이고 장면은 암전.)

자연인으로 숲 속에 산다는 것은 그저 낭만만이 아니다. 때로 눈에 쓰고, 혀에 쓰고, 기억에 쓴, 참기 어려운 현실의 생활고가 오래된 벗처럼, 비온 뒤 차창에 붙은 낙엽처럼, N극과 S극처럼, 장부의 차변과 대변처럼 늘 함께 하는 것이다. 미래의 나는 가망 없는 문학을 먹고 죽어갈 것이다.

멀리에서 다시 천둥소리가 낮게 으르렁 거린다. 고독은 조금 더 깊어진다. 막 시작된 장마 속에 하릴없이 방치된 진흙인형의 고독이다.


자작나무 껍질에 새기는 꿈.

www.allb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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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이상호58님의 댓글

이상호58

작가도 멋지고 !

글도 멋지고 !

요즘 대장님 글 읽는 재미에 부쩍 카페에 자주 들어옵니다.

잠시나마 ..........

무념무상에 빠지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글의 댓글에서는 이 글만 생각하고 싶네요...분명 현명하신 분이라 현명하게 해결 하실겁니다...)

김기현님의 댓글

김기현

사진기를 들었다고 사진가가 아니고, 문맹이 아니라고 작가가 아니란 생각이 드는군요. 이 글이 현재의 상황에서 라클에 어떤 즐거움을 줄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양정훈님의 댓글

양정훈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만,
현재 이곳 저곳에서 논란의 중심에 서 계신 분의 글을
오늘, 어떤 마음으로 읽어야 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수정시 제 실수로 삭제되어 다시 올립니다)

김봉섭님의 댓글

김봉섭

김명기 선생님... 주옥같은 글 잘 보고 있습니다.
진정 장마가 시작될려면 클럽이 새롭게 정리를 하고난 시점이 될것 같습니다.
아름다운 큰우산을 켜주시리라 생각합니다만 오늘 새벽은 그때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내일 모레면 우리클럽이 새로운 모습으로 탄생하기 위해 공사에 들어갑니다.
클럽 모든분들과 즐겁고 행복한 마음으로 장마가 시작될 쯤의 여름향기를 맡고 싶습니다.

이상호58님의 댓글

이상호58

장마비속에 방치된 진흙인형 그대로 둔다면 다 녹아 내릴것같아...
비가 그칠때까진 무엇으로라도 덮어주고 싶네요...
다시한번 말씀드리지만 멋지게 해결하리라 믿습니다...
이 나이에 (죄송합니다 저보다 연배인 선배님들...) 아부는 아니고 라이카선배님들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
이 글의 댓글로써는 적절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되어집니다만 .
그래도 이렇게라도 글을 남기는것이 김선배님과 양선배님에 대한 예의일것 같아서요.
후배들 잘 이끌어 주세요 ..
부끄럽지않은 라이카클럽 회원이 되겠습니다...
김봉섭선배님이 양해를 해 주신다면. 행복한 마음으로 같이 여름향기를 맡고 싶네요...

윤종현님의 댓글

윤종현

모든 것에 화두를 던져놓고서
장마 속의 진흙인형이라는 글 하나 남겨놓고서
회원님들간의 대리전쟁을 관망하는 멋진 식견의 글을 읽으면서
감탄과 슬픔에 빠져듭니다.

나중에 한번 찾아뵙고 인사드리고, 님의 식견을 경청하고 싶습니다.

품격이 있으시다면 간략하게나마 저 때문에 죄송했습니다.
하는 짧은 글이 그렇게 힘이 들줄이야!

속으로 생각을 해봅니다.
(자판기에서 손가락을 움직여서 짧게라도 변명 혹은 사과의 글이라도 쓰면은 얼마나 좋을까!
2주일 동안 접속이 안되어서 안볼 수 있는 그 자체에 난 기쁨을 느낀다.)

좋은 글 감사하고, 부디 영원한 스타로 남기를 기원합니다.

홍경표님의 댓글

홍경표

그러게요, 눈에 흙이 들어갈 그때, 바로 그때 의식 이 남아 있다면 인간은 어떤 생각을 할까요?
명예, 권력, 물질.... 라이카, 사진, 이념, 지식....

아~!! 인생의 간단 명료함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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