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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망한다는 것. 어젯밤 만난 어느 노신사와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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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현재덕
  • 작성일 : 06-06-18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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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 일이다.

카메라타의 정기음악회를 관람하고 나와 건물 옆에 세워둔 차에 탔다.
시동을 켜고, 돌아갈 길을 생각하고 있는데 누군가 운전석쪽 유리를 쿵쿵 친다.
놀라 옆을 보니 황인용씨다.

카메라타는 황인용씨의 공간이다.
장안에 소문난 오디오광인 그가, 거대한 30년대 웨스턴 일렉트릭제 극장용 스피커와 진공관 앰프들과 일만장이 넘는 lp들로 쌓아올린 성채다.
수염까지 하얘진 노신사는 lp로 이루어진 벽 뒤에 앉아 판을 돌리고 칼칼한 목소리와 칼칼한 와인으로 찾아온 이들을 맞는다.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꿈을 실현하여 마침내 남에게 나누어 줄 수 있게 되었기에 그는 진정으로 부유한 성주다.

나는 깜짝 놀라 유리를 내린다.
"누가 이렇게 좋은 차를 타시나?"
십년지기에게나 건넬듯한 친근한 목소리. 뉘앙스.

나는 금방 알아차린다.
"황선생님도, 사브 타시나봐요? 900S? 9000?"
"900과 9000을 다 가지고 있죠^^"
그리고 한참을 더 주고받은 것은
아마도 '말'이 아니라 '반가움'이리라.
같은 것을 좋아하는 이를 만난 반가움, 같은 곳을 향하는 이를 찾은 반가움....

사브가 비싼 차라서?
황인용씨가 타는 올드 사브는 현대 아반떼보다 값싸게 거래되는 차다.
내가 타는 2002년식 93 컨버터블도 이미 시세가 소나타나 SM5 신차보다도 훨씬 아래쪽.
그런데도, 마치, 라이카가 어떤 이에겐 '비싼' 사진기일 뿐인 것처럼 대부분의 이에게 사브는 '외제차' 아니면 '비싼차'일 뿐,
실제 그 차가 어떤 차인지 어떤 가치,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 차인지 아는 사람은 적다.
왜?
관심이 없으니까.
그런 종류의 가치에, 그런 종류의 열정에, 그런 종류의 '길'에.

만약, 내가 수십년 동안 같은 디자인, 같은 방식의 엔진을 고수하고 있던 그 마지막 년식의 사브가 아니라
배기량 잔뜩 키운 GM의 엔진을 얹고 삐까번쩍 어느 나라 차인지 어느 브랜드 차인지 정체가 모호해진
최신의 '미제' 9-3을 타고 있었더래도 그가 노크를 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제가 중학생일 때, 제게 만년필 세트를 보내주셨지요. 엽서 사연이 방송되었거든요"
"하하~ 그 얘기를 왜 저 안에서 안해주셨나~"
"저야 선생님을 수십년 동안 동경하고 있지만 선생님께 저는 그냥 익명의 청취자 중 한 명일 뿐이니까요^^"

세월이 흘러
나는 그와 같은 차를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다.
주차장의 검은 먼지를 뒤집어쓰며 삐걱거리는 소프트탑을 정비하고, 낡은 부싱과 밸브를 손보고,
집안에 들어와서는 턴테이블의 카트리지 수평을 맞추느라 반나절 동안 낑낑거리며 온 몸을 흠뻑 땀으로 적시는 종류의 사람이 되었다.
비싼 아파트에도, 8학군 어쩌고 하는 시류에도, 남 다한다는 주식투자에도 까막눈인 소시민의 삶을 살면서도
하고 싶은 것, 느끼고 싶은 열망으로는 누구보다 부자인 사람이 되었다.

"이거이거, 정말 좋은 차라구. 우리 땐 이게 꿈이었어요. 요즘 차는 말이야.... 아니 젊은 양반은 잘 모르겠구나"
"아니오, 선생님. 압니다. 지난 것들이 최고죠"
황인용씨가 눈이 동그래져서 나를 바라본다.

"[진짜]들은 더이상 만들어지지 않잖아요^^"
노신사는 눈빛을 반짝이다가 얼굴 전체로 빙그레 웃는다.

나는 기어를 물리고
액슬러레이터를 밟으며 경쾌하게 가속한다.
밤공기가 머리칼 뒤쪽으로 밀려난다.

아마도,
나는 죽을 때까지 부자가 되지는 못할 것이다.
가진 돈, 물려받은 돈 한 푼 없이 달랑 4천만원의 은행빚으로 얻은 전세방에서 시작한 결혼생활 십이년째.
그 세속적인 부의 크기로 따진다면 앞으로도 달라지는 것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안다.
꿈꾸는 데, 열망하는 데, 아름다운 것들을 만끽하는 데 남보다 많은 돈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

필요한 것은 딱 하나
'충족되고 싶은 욕망' 한 가지 뿐이라는 것, 그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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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김기현님의 댓글

김기현

황인용씨도 벌써 "노신사"가 되었군요.....

세월이 그런거지요.

그런 세월앞에 마주선다면 욕망 조차도 덧없는 것이지만....

박 민영님의 댓글

박 민영

저도 중학교때 KBS FM '황인용의 영팝스' 몇번 들은적 있네요. 그분이 어느새 노신사가 되었군요. 하긴 저도 어느세 세 아이의 아빠가 되었으니...
저는 그 시간에 주로 MBC FM "박원웅과 함께"를 듣고 있었습니다. 그때는 참 라디오 많이 들었는데. 요즘 라디오는 음악은 없고 농담 따먹기만 있어서 거의 안듣게 되요. 오전 시간에는 그래도 들을만한데 12시만 넘어가면......

김용준님의 댓글

김용준

91년말 즈음 교통방송이 개국하면서 심야 프로그램을 그 노신사 분께서 진행할 때
청취자 전화인터뷰를 한 기억이 있어 괜히 더욱 실감나고 반갑게 위 글이 다가 오는군요.^^
지나가는 소문으로 헤이리에 좋은 공간을 만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있었지만....^^

김건식님의 댓글

김건식

멋진 남남을 기지셨습니다.
그리고 여유로움이 부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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