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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청담동 포토그래퍼와 용산 오디오쟁이에게 무얼 배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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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현재덕
  • 작성일 : 05-11-28 1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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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랜만에 지면광고 촬영 건으로 스튜디오에 나갔다. 담당 그래픽 디자이너가 스튜디오 스텝들과 알아서 다 진행하니까 촬영장에 갔다고 해서 딱히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방해 안되게 한구석에서 음료수나 홀짝거리다 어설픈 참견이나 한 두 번.

포토그래퍼는 지난 번 미샤 촬영건으로 처음 일한 분인데, 그 때 본 슬라이드들이 내 맘에 쏙 들어서 이번 크라운베이커리 촬영에도 같이 일하자고 담당 디자이너에게 말해서 선정한 케이스. 묶지 않은 긴 머리가 고개를 숙이고 들 때마다 자연스럽게 흔들리고 눈빛은 유현하게 빛났다 물처럼 일렁거리는... 너무 멋있는 남자. 아... 역시 생긴 것 처럼 요즘의 값싼 세속과는 거리가 먼 분이다. 느린 듯 경쾌하게 마미야 RZ67을 조작하는 손매가 우아하고 정교하다. 40대 후반의 깊이가 아니고서는 풍기기 힘든 분위기. 아나로그의 분위기.

다음 커트는 일종의 역광 촬영이다. 극단적인 역광이라 노출 측정이 힘들 터. 아마추어인 내겐 이런 촬영의 노하우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눈을 반짝이며 쳐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사진기를 바꿔 드는 포토그래퍼. 뭐지? RZ67에 폴라로이드백으로 테스트하는 거 아닌가??? 가까이 가서 안보는 척 슬쩍 기종을 확인해보니 1Ds mk2다. 아니, 웬 디지털? 연신 뒷면 LCD를 들여다보며 노출 다이얼을 돌리는 모습이 좀처럼 어울려 보이지 않아 순간 나는 당황한다.

우리 팀 담당 디자이너를 손짓으로 불러 물어본다. "원래 슬라이드만 찍는 분이라고 하지 않았어?" 디자이너는 글쎄요- 하더니 포토그래퍼에게 다가가 무언가 얘길 나누고 돌아온다. 전해주는 말을 듣고 할 말을 잃는 나.

"역광에다 측광이 워낙 까다로운 상황이라 디지탈로 찍는게 안전하고 편하다는데요. 나중에 후보정하기도 쉽대요"
"...."




...#2

거실에 놓고 듣던 턴테이블을 바꿨다. 오랫동안 꿈꾸던 린(Linn)의 손덱 플레이어. 기계도 기계지만 이번엔 절대 내가 직접 세팅하지 않겠다고 굳게굳게 마음먹었다. 여태 쓰던 토렌스 턴테이블을 들여놓던 첫날 결심하지 않았던가. 앙증맞도록 작은 드라이버와 핀셋을 가지고 좁쌀만한 나사와 너트를 수십번 떨어뜨리고 줏어가며 온몸이 땀에 흠뻑 젖는 이 짓을 다시 하지는 않겠다고. 턴테이블의 톤암을 잡고 있던 손에 조금만 힘이 더 들어가거나 드라이버를 쥔 손이 약간만 미끄러지면 여지없이 이 정교한 기계의 부속은 어디 한군데가 부러지고, 너트는 또르르르 굴러 손닿지 않는 장 밑으로 숨어버리고, 뾰족한 드라이버 끝은 어딘가를 푹 찔러 흔적을 남기는 것이다. 그 어딘가가 내 손등이거나 허벅지인 경우는 또 몇번이었던가 -_-

그래서 이번엔 내 둔탁한 손놀림에 좌절할 일을 아예 만들지 않으리라 마음먹고 장안에서 소문난 아나로그 전문샵과 거래했다. 가격도 시세보다 훨씬 비싸게 쳐 주고, 기다리기도 한참을 기다려서 마침내 영국에서 건너온 턴테이블을 만나게 된 날.

내가 건 조건대로 사장님이 턴테이블을 들고 직접 집으로 오셨다. 전날 샵에서 수시간 동안 세팅해 턴테이블 베이스의 상태는 완벽하게 맞춰놓으셨다고 했다. 사장님은 한 눈에 아나로그 고수 티가 물씬 풍기는 초로의 신사. 카트리지만 내가 쓰던 걸 꽂으면 된다고 여유있게 공구를 꺼내드신다. 그래! 이거다. 초보가 땀 뻘뻘 흘러가며 생고생 할 필요 없는 거다. 돈 좀 더 쓰면 이렇게 전문가의 손길을 빌 수 있는 것을. 이제 우아하게 LP를 올려놓고 즐기면 되는 거다.

그.런.데.... 계속 어긋나고 미끄러지고 나사를 떨어뜨리는 사장님의 손..... 준비하신 공구가 여의치 않아 보여 내가 쓰던 것을 빌려 드렸다. 하도 턴테이블 조정이 힘들어서 공구덕이라도 볼까 싶어 힘들게 구한 만듦새 좋은 소형 드라이버와 극소형 정밀 렌치들이다. 하지만 그 드라이버를 들고서도 사장님의 손은 위태위태하게 미끄러지며 애꿎은 톤암의 헤드셸과 마루바닥을 때린다. 보다못한 내가 드디어 조심스레 말을 꺼낸다. "잘 안되시나봐요?" "어... 네... 이게 원래 어려워요. 나사가 워낙 작아놔서...." 말씀을 하시면서도 계속 너트를 떨어뜨리고 나사를 엉뚱한 위치에 꽂았다 뺐다 하신다 -_- 급기야 팔을 겉어붙이고 조수역을 자청하는 나. 둘이 함께 낑낑대며 그 아이눈꼽만한 나사와 머리카락보다 조금 굵은 리드선들에 매달리다 보니 금방 등이며 옆구리쪽에 땀이 찬다. 지금 내가 뭐하고 있는 거지? 이상하다 이게 아닌데...

겨우 작업을 마친 사장님, 찻잔을 기울이며 그제야 한숨을 내쉰다. "아유, 눈이 침침해지니까 이 짓도 굉장히 힘드네" "사장님, 다른때도 이렇게 고생하세요?" "아 그럼~ 이게 원래 힘든 거라구. 그래도 공구가 좋아 덜 고생했지 뭐요" 나는 뭐라고 해야 할 지 몰라 그냥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카트리지 하나 달았을 뿐인데....




...#0

사장님이 오디오랙 아래쪽에 골인(?)시킨 너트 하나는 결국 찾지 못했다. 우리 팀 디자이너는 촬영 바로 다음날 넘겨받은 디지털 데이터 뭉치를 맥 화면에 띄어놓고 결과물 빨리 받아 좋다고 연신 혼잣말을 한다. 그래. 디지털은 대세고, 아나로그는 힘들다. 원래 그런 거다. 멋진 은발의 청담동 포토그래퍼 실장님에게도, 평생을 턴테이블과 카트리지를 잡고 보낸 용산 오디오쟁이에게도 그런 거다. 내가 뭘 잘못해서, 솜씨가 없어서, 아나로그를 이해하지 못해서 그랬던 게 아닌 거다.

그러니 나무랄 건 내 둔탁한 손놀림이나 노출값 계산이 아직도 어려운 나쁜 두뇌가 아니라, 이 시대에 아나로그를 하겠다고 겁없이 덤빈 내 구닥다리 심장인 것이다.






(사진 : 린 손덱 LP12 플레이어를 잡고 고생중인 오디오복스 김진홍 사장님)
추천 0

댓글목록

노상익님의 댓글

노상익

좋은글 잘 보았습니다. 공감가는 부분이 많습니다.

강길만님의 댓글

강길만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첨단의 디지털인 반도체에서도 아날로그로 밖에 작업을 할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기계쟁이의 손끝으로 이루어질수있는 그것이 ? 있습니다.
관심 밖의 세계에서도 저와같은 아날로그를 사용하는것.........
좋은 세상을 사는 행복이 아닐까요 ?............

이원용님의 댓글

이원용

그렇군요...
오래하고 잘하는 사람은 다 쉽게 할거라고 생각하며, 본인이 하는 힘든 일을 미워할때가 있었읍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오늘 저녁은 현재덕님 덕분에 좋은 저녁이 될 것 같읍니다.....

이영호님의 댓글

이영호

제가 일하는 상황 같아 너무 와 닿습니다......
매일 디지털 장비 속에서 있는 제 곁에 있는 아날로그 카메라는 어떤 의미인지~~
가끔 호사스러운 사치에 불가한가 반문해 봅니다~~

이용규님의 댓글

이용규

내용도 공감가지만 글 자체가 참 재미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임규형님의 댓글

임규형

정말 재미있습니다.
인사계 답글 쓰다 중간에 여기들러 단숨에 읽었습니다.
....
저도 방금전 토렌스 320을 조정하느라 나사를 10여번 떨어뜨렸었거든요.
다 찾아서 조이긴 했지만....ㅋㅋㅋ

진정한 고수는 "나" 자신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느 누구도 해줄 수 없는 촬영환경, 음향조건 속에 놓인건 자기 자신이니까요.

이우만님의 댓글

이우만

재미있는 글 잘 읽었습니다.
읽으면서 뭔가 머리 한구석을 톡톡 쪼는데 그게 뭔지 모르겠네요...^^
머리속에 딱따구리가 한마리 사는지...

김종민님의 댓글

김종민

재미있는 글 잘 보았습니다.
이제 막 서른에 들어선 저는 아나로그 라는 세상에 발끝을 살짝 대놓고는 가볍게 쉽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너무도 편안함에 익숙해져버린 탓일까요...

글 속에 그리움이 그리고, 정겨운 땀내음이 묻어나는 듯 합니다...

최_정원님의 댓글

최_정원

음..글을 읽으며 다양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과연 끝에가서 무어라고 말씀을 하실지..
^^
많이 배우신거 같다란 생각이 듭니다..허허
물론 저도 글속에서 몇가지 느기고 배웠고요~

유건종님의 댓글

유건종

^^ 라클회원님들이 아나로그 고수가 더 많으세요.
임규형님의 '진정한 고수는 "나" 자신이라는 생각이 듭니다'라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시간이 걸려도 내 손으로 직접 셋팅하고,고쳐야 속이 후련하지요.
기계를 단순기계로 여기지 않고 분신처럼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강웅천님의 댓글

강웅천

글을 읽으면서 아날로그에 대한 애정이 느껴집니다. 똑딱이 디지털을 쓰지만 대부분 버리게 되더군요.. 쉽게 얻은건 쉽게 버려진다...
가끔은 몇천장이나 쌓인 lp더미에서 오랫동안 원하던 음반을 한장 찾습니다. 희열을 느낍니다. 조심스레 몇십년의 세월을 건너 첫 만남을 하듯 알을 꺼내들고 불빛에 비쳐보면서 새 애인같은 마음으로 어루만져 봅니다. 근데.. 어째 마우스로 클릭하여 구하면 그런 기쁨은 덜하더군요. 고생과 낙은 아무래도 한집 식구인듯... 즐거운 사진, 즐거운 음악 생활 하시길...

김헌주님의 댓글

김헌주

솔직한 글 잘 읽었습니다
사실 아날로그건 디지털이건 쓰기 나름인데 말입니다
쓰기편한 디지털을 두고, 아날로그에 자꾸 손이 가는 고집스런 제 모습이 스스로 이해가지 않을때도 많습니다

심준호님의 댓글

심준호

m..린 턴테이블 어울리죠 늘한결같죠....너트 스카치테이프붙여이용하세용..??영원한아나로그는디지탈인동시에아나로그디지탈이다??

박대원님의 댓글

박대원

글의 뜻도 뜻이지만, 글의 흐름에 흠뻑 반했습니다. ^^

김영균님의 댓글

김영균

시대의 흐름은 그 누구도 거스를순 없습니다만..
어느것이 옳다고 단정 할순 없습니다만..
개인적인 취향 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아나로그를 좋아합니다만..
많은 사람들은 희한하게 보더군요
그래도 저는 개의치 않고
제 멋대로 삽니다...
내 인생인데.

이진부님의 댓글

이진부

읽는 내내 즐거웠습니다. 아나로그 그게 내모습인거 같아요. 뚱치크고 처음부터 끝가지 챙겨야하고, 세월이 흘러간것은 잘못느끼는데 흘러가는 시력 때문에 나도 아나로그이구나 하는 생각을 문득 문득합니다. 굴러가는 놈을 못찾으면 그날은 영 뭉게지는게... 그래서 요즈음 저는 바꿈질을 멈췄어요, 사용도 고장날까봐 애껴가며하는 그걸 나만 아는 비밀이지요. 고장났다면 그오디오 수리하시는 기능장님들은 대개 한세월을 하시니 고치는 그날이 고치는날이라 고행의 수도길을... 아시는 분은 아시지요. 요즘 마눌님이 왜 앰프를 잘 안켜시느냐고 물으면 민망한 미소만 짓는답니다. 이글을 읽으면서 일종의 위로를 느낌니다.

김병훈(Rollei35)님의 댓글

김병훈(Rollei35)

린 손덱... 예전 저의 꿈의 플레이어였다는... (실물로는 본 적도 없습니다, 아니 어쩌면 어느 쇼윈도우 너머를 스쳐 지나가듯 보았거나...)

김정원7님의 댓글

김정원7

감성과 편의. 그것이 이제는 양극단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전 언제나 편의를 중요시해 왔었는데, 글세요... 여기오면 언제나 감성이 먼저가 되는 것 같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손지훈님의 댓글

손지훈

글을 읽으며...
"어디서 턴테이블 하나 구해야 할텐데..." 하고 있는 제 모습을 봅니다.
저역시 아나로그 병에 걸린 사람이라 그런지 많이 공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용도 내용이지만...
글을 참 잘 쓰시네요.
급류도 아닌 것이... 고인물도 아닌 것이...
아기자기 재미난 골을 타고 흐르는 샛물 같습니다.
좋은글...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

백인식님의 댓글

백인식

린 손덱...좋은 플레이어지요.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부러운 마음이 드는 걸 숨길 수 없군요.

권준님의 댓글

권준

턴테이블 아래 2인치 정도의 대리석을 깔아줘야 안정감이 있지 않나요?예전에 그렇게하면 좋다는 말에 두꺼운 대리석 구하러 다니던 일이 생각나서 참견해 봅니다.

김복렬님의 댓글

김복렬

린손덱 LP12 는 명기이지요..셋팅만 한번 해 놓으면 거의 완벽한 턴의 끝이 아닐까요?
(너무 욕심 부리지 않는 선에서...)
저는 그쪽으로 가지 않고 아예 빈티지로 가 버렸습니다.

아날이라는게 소소한것 만지작 거리는 재미가 보통이 아니죠.
마치 라이카 바디를 극세사 융으로 닦는 재미나 비슷할겁니다...

조경덕님의 댓글

조경덕

클래식 카메라와 턴테이블 그리고 잊혀져가는 LP판은 무척 닮아있다 생각해요.
저역시 클래식 카메라를 좋아하고 아날로그 LP판을 사랑하는 사람이라
님의 글이 더욱 공감이 가네요.

송호석님의 댓글

송호석

전 십여년전쯤 이케다 카트리지산지 2분여만에 바늘 부러뜨리고 아나로그를 포기했었는데...
요즘 다시 아나로그가 그리워지네요... 뭔 바람이 불어서 필카 M6도 사용하고...
정성들여 셋팅후 판한장 거는맛... 이거 다시한번 느껴보고 싶네요...

전하영님의 댓글

전하영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

정성시님의 댓글

정성시

이상호님의 링크자료 감사히 보았습니다.

정영신님의 댓글

정영신

LP에 대한, 턴테이블에 대한 취미는 호사가 아니라
생에 대한 강한 욕구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상호님의 링크 충격 그 자쳅니다.
고맙게 봅니다.

윤태권님의 댓글

윤태권

좋은 기분이 드는 글입니다^^

심석현님의 댓글

심석현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김윤환/photomed님의 댓글

김윤환/photomed

우리두되의 전기신호도 결국은 디지털이 아닌가요?
신경전달물질분자 하나하나에 대응한 전위차 형성과 역치 이상에서의
신경흥분 전달이라는 의미에서 말이지요....
어쩌면, 우리 두뇌 자체가 디지탈일지도 모르는데.... 라고 생각해 봅니다

딴소리였습니당.... ^^

김재범^^님의 댓글

김재범^^

현재덕 님의 글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떠나서 어떤 일이던지
역시 많이 해 보고 익숙해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저는 심심하면
차에 여러가지 조명 - 소위 양카라고 하는 그런 네온등 같은 것 말고 실내등이나 독
서등, 바닥등 같은 조명을 일컽습니다 - 을 장착하는데 처음에는 내장재 뜯어내기도
서툴고 번거롭더니, 지금은 뭐 하나 달아놓으면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양 뻔뻔스럽게
불이 들어오는 것을 볼 때마다, 역시 많이 해 보니 익숙해지고 기술도 느는구나 싶습
니다. 더불어 시간도 단축되고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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