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잦은질문모음
  • TOP50
  • 최신글 모음
  • 검색

Forum

HOME  >  Forum

Community

나사와 태엽, 라이카, 영원한 것들에 대한 가엾은 동경...

페이지 정보

  • 작성자 : 현재덕
  • 작성일 : 04-11-23 15:40

본문

내 시계엔 큼지막한 용두가 달려있다. 멋으로 달아놓았거나 내부의 전자 장치를 조작하는 용도가 아닌, 그야말로 진짜 '태엽'을 감아주는 다이얼이다.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려 잠금장치를 풀면 용두가 묵직하게 튀어나오고, 밥을 주기 위해 돌리면 단단한 저항과 함께 시계 몸체 안의 무언가가 팽팽히 당겨지는 느낌이 든다.

태엽을 감아 동작하게 하는 기계식 시계와, 손을 움직일 때마다 저절로 조금씩 태엽이 감기게 만들어진 오토매틱 시계는 이제 서서히 자취를 감추고 있다. 아직까지는 결혼 예물이나, 호사스러운 명품 선호의 대상물로 가느다란 명맥을 이어가고 있지만, 오늘날 생산되는 시계의 거의 대부분은 쿼츠 시계다. 수정에 전기를 통하게 해 수정 고유의 진동수로 시간을 재는 쿼츠 시계의 발명과 함께, 그때까지 세계 최고의 시계로 불리던 대부분의 메이커들은 그 오랜 영화의 종장을 맞게 되었다. 이제, 기계식/오토매틱 무브먼트를 생산하는 기업은 전세계를 통틀어 몇 남지 않았고, 그 몇 안되는 명가들마저 인수/합병의 부침을 겪으며 순혈을 더럽히고 있다.

아무리 비싼 고급 쿼츠 시계라도 수명이 있다. 기껏해야 20-30년 지나면 쿼츠 시계의 수명은 다한다. 심장이 멈추고 피가 흐르지 않는 죽은 인간처럼, 수명을 다한 시계의 무브먼트는 아무리 전류를 흘려보내도 동작하지 않게 된다. 애초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인간의 수명을 정한 것이 신이라면, 쿼츠 시계의 수명을 정한 것은 인간이니, 공교로운 되풀이일까, 어디선가 인간을 숭배하며 영원한 생명을 기도하는 무브먼트들의 별이 있는 것은 아닐까.

반면, 기계식/오토매틱 시계의 수명은 사실상 무한하다. 수년에 한 번 정도 제대로 오버홀을 해주기만 하면 이 우직하고 강인한 생명력을 가진 기계는 멈추지 않는다. 멈추었다가도, 태엽을 다시 감아주거나 조금 흔들어 밥을 주면 다시 힘을 끌어내 초침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 생명력은 '단순함'에서 비롯되는 생명력이다. 태엽과 나사로 이루어진 내부의 기관은 극도로 정밀하지만, 동시에 극도로 단순하다. 감기고, 감긴 만큼 그 반대의 방향으로 풀리는 것- 그것이 기계식 시계가 할 줄 아는 운동의 전부다. 육교 위에서 파는 만원 짜리 쿼츠 시계도 수백수천만원 짜리 기계식 시계보다 정확한 시간을 가리킨다는 사실은 역설적으로 이 기계식 시계들의 가치가 '시간'이라는 시계 존재의 본원적 가치를 넘어선 어딘가에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라이카를 좋아하는 사진가들은 어느 시대에나 있어왔다. 그들의 맹목적인 애정을 단지 렌즈 원석 가공의 우수성이나 코팅 기술을 살펴봄으로써 이해하려는 것은 본질을 한참 비껴나가는 분석이다. 라이카는, 전지를 필요로 하지도 않고, 최신 기술의 흥망성쇠를 뛰어넘으며, 무엇보다도 '죽지' 않는다. 애정을 가지고 손보아진 라이카는 그 애정의 주체였던 인간이 흙으로 되돌아간 후에도 몇 세대, 몇 세계를 더 살아간다. 요는, 라이카는 기계식 시계와 같이 '멈추지 않는 단순성' 그 자체라는 것이다.

우리들은 모두 죽는다. 언젠가는 사라진다. 아무리 용을 써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사라질 수 밖에 없는 존재인 인간이 사라지지 않는 영원성을 동경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나는 죽어서 잊혀져도 지금 내 손목에서 빛나고 있는 이 시계는 여전히 동그란 60칸의 눈금 사이를 움직일 것이다. 나는 한 줄의 묘비명으로 새겨져도 내가 블로어와 천으로 깨끗이 손질해놓은 라이카 M은 내 아들, 혹은 손녀의 눈에 비친 세상을 필름에 새겨줄 것이다. 기본적으로, 이 기계들은 영원히 사는 것이다. 이 기계들을 대하는 우리들의 애정이란 바꾸어 말하자면 영원성에 대한 부러움, 혹은 동경에 다름 아닌 것이다.

나는 라이카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해도 언젠가는 가지고 싶어질 것인데, 아마도 그 때란 내가 내 유한함을 더 절절히 바라보게 되는 때, 그 공포의 끝에 지금보다 더 바짝 가까이 다가선 순간일 것이다. 고도 유기화합물의 복잡한 몸뚱이와 우주의 심연을 바라보는 깊은 사색을 가지고도 한낱 태엽과 나사의 뭉치를 동경할 수밖에 없는 우리들의 비극이 여기 있다.


.
추천 0

댓글목록

하석준님의 댓글

하석준

안녕하세요, 현재덕님.

댓글을 적다가... 글 안의 사진을 가만히 보니 '현카피'라는 눈에 익은 단어가 보입니다

안승국님의 댓글

안승국

의미있는 글 잘 보았읍니다.
이론적으로는 디지털화된 공산품이 반영구적이라고 할수 있겠지요.
아나로그식은 끊임없이 영속된 길에서 움직이고 있다고 보면 먼지.마찰, 마모등에 의하여 수명이 현저히 짧다고 보여지나 예전의 장인들의 심성이 함축되어있어 아직도 움직인다고 생각 되어 집니다.
라이카의 매력이 바로그런것 같읍니다. 요즘 생산되는 디카도 몇년되지않아 수명이 다하고 그많이 생산된 수동식 카메라도 그의 망가졌으나 라이카는 아직도 건재한것이 많은것 보면 그때 그사람들의 장인 정신이 아닐까요? 결국에는 모던것이 사라져도 그것으로인해 새겨진 사진은 남아 있겠지요.
위의 글과 본질이 약간 달라져서 죄송합니다.

양정훈님의 댓글

양정훈

단순과 함축의 캡슐이 우리 마음 깊숙히 들어와
캡슐 속의 온갖 것을 자유롭게 풀어 헤칠 때,
우리는 감동과 희열을 느낍니다.

복잡과 기교는 그 당의를 빨아 먹는 짧은 시간이 지나면,
씁쓸함과 공허로 우리를 견딜 수 없게 만듭니다.

단순함은 진리나 심오함과 일치하는 것 같습니다.
불교성전이나 기독교 성서를 읽으면
온통 단순과 함축만 있을 뿐입니다.

박활님의 댓글

박활

dslr 클럽에서도 현카피님의 글을 읽었던 거 같은데 이곳에서 보니 너무 반갑습니다. 괜히 아는 척한다고 나무라지만 말아주시길 ..... ^ ^

현재덕님의 댓글

현재덕

*하석준님 안녕하세요, 반가워해 주시니 저도 괜히 반갑고 기분이 좋아집니다. 감사합니다.
*안승국님. 물론 제 글과는 줄이 조금 다른 말씀이시긴 해도 기본적으로 동의합니다. 세상에서 제일 값비싼 원재료는 역시 장인의 손값이 아닐까 합니다.
*클럽에서 양정훈님의 글을 읽고 감탄한 기억이 납니다. 뻔한 글에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변민광님. 좋은 글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그저 느낀 것 생각한 것을 돌려말하지 않고 솔직하게 쓰면 그런 글이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생명과 죽음에 대한 제 천착이 조금 오래되고 유별난 편이라 아마도 그에 대해 쓴 글줄이 약간의 공감을 얻게 되는 게 아닐지요.
*박활님! 나무라긴요^^ 아직 라이카도 없는 사람이 괜히 이곳 게시판 용량 잡아먹는다고 되려 나무라지나 말아 주십시오^^

오기동님의 댓글

오기동

현카피님 반갑습니다...앞으로 자주 글과 사진을 남겨 주세요..
저도 얼마전에 제 시계를 오버홀을 했습니다..가격이 좀 많이 비쌌습니다..와이프는 그 돈이면 그냥 새것을 사지 왜 오버홀을 하냐고 핀잖을 주기도 했지만 전 제 시계를 사랑? 하지 않을 수 없기에 과감히 오버홀을 했습니다..
한 달뒤에 돌아온 제 시계는 너무나 기분좋게 움직이는것을 보니 참 잘 했다고 생각합니다..
직업상 디지탈을 많이 다루기는 하지만 역시 기계적를 좋아 하는 습성? 때문에 아나로그가 더 좋은가 봅니다..
역시 같은 것을 좋아 하는 사람들은 공감하는것도 비슷한가 봅니다..

늘 건강하세요..

최준석님의 댓글

최준석

라클에 이토록 글잘쓰시는 분이...ㅋㅋ
좋은 글 공감하며 잘 읽었습니다.

안태석님의 댓글

안태석

세상이 온통 전자장비와 디지탈화로 달음질하고 있는것 같습니다. 여기서 가만히 생각해보면 과거로의 회귀인지는 모르지만 순수한 기계식 장비에 향수같은게 있는것 같습니다. 분명히 현대화된 최신식 장비가 사용하기에 편리하고 목적하는바도 쉽게 얻을수 있는건 분명한데 무언가 허전한 구석이 있는건 무어라 표현할까요?
저도 유난히 기계식 장비를 좋아하는 사람중에 한사람입니다. 특히 카메라에 관한한 더욱 그러합니다. 만지는 즐거움이라고 할까요? 친구가 넌 왜 세상을 거꾸로 사느냐고 한 적이 있습니다. 거꾸로 살아도 좋은걸 어떻게 합니까? 직업적으로 사진을 찍는다면 당연히 첨단의 장비를 선택할겁니다. 만지는 즐거움 자체를 즐기고 있는 취미의 세계에서는 기호의 차이겠지요.

권영남님의 댓글

권영남

자연일 적에는 아나로그적인 것에 슬픔을 느꼈었는데 디지털 적에는 아나로그적인 것이 그리워지는 아름다움은 디지털도 진화하는 시간에 기대를 걸어봄직한 ......
동경하는 비극은 태엽의 에너지를 부각시키고는 숨겨진 숫자의 시계판에서 넘겨다 보는 사진과 절묘하게 어울린 글을 잘봤습니다

김우성님의 댓글

김우성

흠 전 글보다 사진에... ^^;;
저도 수동시계 매니아라서요.
그런데 저 시계는 뭔가요? 그냥 보기엔 Oris 같군요??? 맞나요?
공감가는 글 잘 읽었습니다.

현재덕님의 댓글

현재덕

김우성님.
네, 오리스 맞습니다.
TT1 크로노그라프 모델입니다.

개인정보처리방침

닫기

이메일무단수집거부

닫기
닫기
Forum
Gallery
Exhibition
Collection
회원목록
잦은질문모음
닫기

쪽지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