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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사진을 찍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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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현재덕
  • 작성일 : 04-12-06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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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빠가 사진을 찍는 이유 ###


[KISS라는 예쁜 이름을 가진 카메라와 관련된 모종의 꿍꿍이]

자식이 몇 살이 되면 뭘 사줘야지, 몇 살이 되면 뭘 해줘야지 하는 계획을 세우는 건 이 세상의 모든 부모들에게 한결같은 즐거움일 거다. 물론 내게도 그런 계획이 몇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다연이 네가 고등학생이 되면 카메라를 사줘야지, 하는 거야. 그땐 다른 적당한 기종이 나와 있겠지만, 지금 생각하고 있는 건 캐논(CANON) 제품인 EOS-KISS III 정도의 가볍고 작은 크기의 SLR (Single Lense Reflex, 일안반사식 카메라)이다. EOS니 SLR이니 하는 어려운(?) 용어들에 미리 질릴 필요는 없다. 그 이유는 첫째, 사진을 찍다보면 그런 건 저절로 하나씩 알게 될 거고, 둘째, 몰라도 사진 찍는데 전혀 지장 없고, 셋째, 꼭 급하게 알고 싶으면 니 옆엔 절대로 귀찮아하지 않는 실력있는 개인교사- 아빠가 있잖니^^


[사진을 왜 찍을까?]

관심없을 땐 잘 모르겠지만, 막상 사진이라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주위를 보면 세상엔 사진기를 들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사람이 참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많은 사람들이 카메라샵에서 사진기를 고르고, 어느 고궁에서 삼각대를 세우느라 낑낑대고, 현상한 필름을 밝은 빛에 비추어 들고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을 거다. 왜 그럴까? 시커먼, 혹은 은색의 묵직한 쇳덩어리를 들고, 거기에 난 작은 유리창에 코를 박고 들여다보는 일이 대체 어떤 재미가 있길래?

사람마다 다 다른 답을 가지고 있겠지만, 누가 내게, 당신에게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라고 묻는다면, 나는 "<보는 일>입니다", 라고 대답할 것 같다. 본다? 사진기를 통하지 않고도 눈으로 볼 수 있는데 무슨 뚱딴지 같은 말일까, 라고 너는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보렴. 너는 물론 너의 두 눈으로 세상과 사물을 보지만, 늘 그것을 의식하며 보고있지는 않을 것이다. '본다'는 말은 눈을 뜨고 있는 동안 그 눈을 통해 사물을 파악한다는 의미 정도인 걸까? 우리가 보고싶었던 영화를 '보고',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보고', 아름다운 바다의 일출을 '보는' 그 때의 그 '보는' 행위가 과연 그런 의미일까? 아마 아닐 거다. 우리는 우리가 보고싶은 것, 애정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볼 때 '진정으로' 본다. 그렇지 않은 많은 것, 그저 우리 주위에 늘 흩어져 있는 것들, 늘 걷는 길, 늘 만나는 사람을 진정으로 보고있는 것은 아니다. 진정으로 보는 것과 진정으로 보지 않는 것들의 수를 굳이 비교하자면 후자가 훨씬 많을 것이다. 그게 정상이다. 쉽게 말하면 우리는 아주 적은 대상을 뺀 나머지 것들은 건성으로 보고 있는 거지. 그런데 손에 사진기를 들려주면 얘기가 조금 달라진다. 사진기를 들고, 그 속의 작은 유리창으로 세상을 보는 순간 그 행위엔 사진 찍는 이의 의지가 개입되는 거다. 보려고 하여 보는 것이 되고, 그 대상에 관심과 애정을 투사할 적극적인 마음의 준비를 한 상태가 되는 거다. 뷰화인더를 통해 보이는 대상은 내가 사랑하는 무엇이다. 돌 하나, 나무 한 그루가 이미 나와 상관없는 무엇이 아닌 거다. 왜냐하면 내가 나의 의지로 그것을 '보려' 하였으니.

낯선 길을 한 번 걸어본 후 일주일쯤 지나 그 길을 떠올려 보렴. 무엇무엇이 기억날까? 같은 길을 사진기를 들고 한 번 걸어본다면,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에도 그 길에 숨어있던 많은 것들이 생생히 떠오르는 것을 느끼게 될 거다. 사진은 그런 거다. 사진찍는 이와 찍히는 대상을 사랑하게 하는 일, 기억하게 하는 일, 바라보게 하는 일. 그래서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사진찍는 일을 통해 무언가와 연애하고 교감한다. 사람은 거짓말하고, 상처주고, 변하지만, 뷰화인더 속의 대상은 늘 변하지 않고 거기에 있다. 내가 바라보면 나의 연인이 되고, 내가 사랑하면 나를 사랑해준다. 멋지지 않니, 이런 지고의 사랑이라니.


[어떻게 하면 사진을 잘 찍을까?]

사람들의 관심은 비슷하다. 어떻게 하면 좋은 사진을 찍을까, 어떻게 하면 좋은 사진가가 될까. 뭘 찍으면 아름다운 사진이 될까 등등.... 하지만 내 생각은 많이 다르다. 좋은 사진, 즉 아름다운 모습이란 이미 찍는 이의 머리 속, 혹은 마음 속에서 완성되어 있는 거다. 마음 속에 그림이 그려져 있는 사람이라면 그 그림을 뷰화인더 너머의 세상에서 발견하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 중요한 건 마음속에서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놓는 거다. 그건 물론 하루이틀에 되는 일이 아니겠지. 많은 책을 읽고, 많은 생각을 하고, 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마음을 열고 보는 연습을 해야 할 거다. '연습'이라고 하니 별도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일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건 살면서 자연스럽게 하는 일이다. 생각하며 살고, 아름다운 것을 보려고 노력하며 살고, 사물의 보이지 않는 면에 쓰여진 이야기를 읽으려고 애쓰며 사는 일이다.

설명이 어렵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쉽게 얘기해 보자. 저기 아름다운 나무가 심어진 길이 있다. 사진기를 든 A는 생각한다. '어떻게 찍으면 이 풍경이 아름다울까?' 하지만, 마음 속에 수많은 그림, 수많은 이야기가 있는 B는 생각한다. '이 커피색 길을 넘어 빨간 담장을 가진 오래된 집이 있으면 아름다울거야' 그 아름다운 풍경은 이 길을 만나기 전 이미 B의 마음 속에 그려져있는 이미지이다. 이렇게 되면 B는 그 길을 조금 더 걸어 혹시 빨간 담장을 가진 집이 보이지 않나 찾아 볼 것이다. 빨간 담장을 가진 집이 없다면 그 대신 빨간 낙엽무더기를 찾게 될지도 모르고, 마음속의 집이 있어야 할 그 위치에 빨갛게 저물어가는 노을을 자리잡게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낡은 철문에 얽힌 슬프고 재미있는, 혹은 무서운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어디선가 만난 철문에 사진기를 들이대자마자 어떤 느낌의 사진을 찍고 싶은지 순간적으로 알 수 있게 되겠지. 어떻게 찍어야 할지 고민할 필요 따윈 아예 없을 거다. 다연이 네가 할 일은 지금부터 그런 수많은 느낌들을 마음 속에 담은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일이다. 모든 일은 하고 싶어하는 그 순간부터 시작되는 거니까.


[사진기와 사랑에 빠지는 방법]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얼마나 자주 보고싶어질까? 잘은 모르지만 사흘에 한 번, 일주일에 한 번 미리 계획을 세워서 보고 싶어지는 것은 아닐 거다. 시도 때도 없이, 지금 보고 돌아서도 바로 다시 보고 싶어지는, 그런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일 거다. 사진기와 연인이 된다는 일도 그런 거다. "음, 이번 일요일엔 사진을 찍으러 경복궁에 가야지" 하고 생각한다면 그는 아직 사진기와 사랑에 빠진 게 아니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가 어디에 있든, 어디에 가든, 무엇을 하고 있든 그의 곁에 사진기가 있을 때, 그것이 일부러 작정하고 준비한 것이 아니라 그의 몸 일부처럼 자연스러울 때, 그는 사진기와 연인이 된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니 자주 만지고 싶고, 내 몸 가까이 두고 싶고, 더 근사한 옷을 입혀주고 있은 거다. 가장 불행한 여자가 잊혀진 여자,라고 하던가? 가장 불행한 카메라는 장롱속에서 잊혀진 카메라,인 거다. 좋은 렌즈를 사고, 편리한 악세사리를 갖추고 나면 너의 사진기는 점점 더 크고 무거워질 테지만, 최소한의 크기와 무게인 상태, 언제라도 바로 셔터를 누를 수 있는 상태로 사진기를 항상 가지고 다니는 게 좋다. 아빠는 예쁘고 아주 작은 카메라가방을 항상 들고 다닌다. 출근하고 퇴근할 때는 물론, 동네 가게에 우유를 사러 갈 때도, 친구를 만나러 짧은 외출을 할 때도, 머리를 깎으러 미용실에 갈 때도. 그 작은 가방 속엔 작은 표준렌즈를 끼운 사진기와 필름 두어통이 항상 들어있음은 물론이다. 연인이 입은 비싸고 거창한 옷이 구겨질까봐 팔짱도 함부로 못끼고, 풀밭도 편하게 뒹굴수 없다면 그 연인과의 사랑이 재미있겠니? 너의 사진기가 항상 가지고 다니기 벅찬 무언가가 된다면 사진과 너의 사랑은 곧 식을 거라고 아빠는 장담할 수 있다.


[사진 찍는 사람은 외롭지 않다?]

네 남자친구는 무엇을 좋아하니? 그가 컴퓨터게임을 좋아하는데, 너는 게임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가 게임을 하는 동안 넌 참 심심할 거다. 남자가 등산을 좋아하는데 여자는 산이라면 질색하는 사람이라면 그들이 함께 하는 시간은 참 소모적일 거다. 다행히도, 사진을 찍는 일의 진정한 즐거움은, 함께 하는 사람을 그 즐거움 속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는 데 있다. 사진을 찍는다는 일은 피사체를 사랑하는 일이라고 앞에서 말했었지? 그렇다면 네가 사랑하는 사람을 너의 피사체로 세우는 일은 그야말로 사진의 본래 뜻에 가장 잘 맞는 일일 거다. 사랑하는 친구, 사랑하는 연인, 사랑하는 가족, 사랑하는 애완동물- 그들을 너의 사진 속에 끌어들여라. 같이 사진찍는 일을 즐길 수 있도록 이끌어도 좋고, 그게 어렵다면 너의 전속모델로 임명하는 것도 괜찮다. 사랑하는 사람을 찍은 사진은 훨씬 더 아름답게 나온다는 것을 너도 곧 알게 될 것이다. 그건 애정이 깃든 눈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밝고 선명한 렌즈이기 때문이다. 사진이라는 취미 때문에 어느 순간 네가 쓸쓸하다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면, 사진기를 내려놓고 천천히 무언가 잘못된 것이 없었는지 생각해보렴. 사진은 사람을 혼자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게 하는 것이라는 말을 잊지 않길 아빠는 바란다.


[아빠의 넓은 마음]

네가 커서, 돈을 버는 나이가 되면, 어쩌면 L렌즈 같은 유명한 렌즈를 구입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 너는 잘 모르겠지만 그런 무거운 렌즈는 여자의 팔을 굵게 하고, 스트레스를 유발해서 피부에도 아주 좋지 않다. 그럴 땐 고민하지 말고 아빠에게 넘기렴. 딸의 건강을 위해서라면 내 팔뚝 좀 굵어지고 스트레스 더 받는 것쯤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단다. 아빠가 얼마나 너를 사랑하는데.





(딸아이가 26개월이었을 때 쓴 글입니다. 지금 다연이는 여섯살이 되었습니다. 내년이면 일곱살이 되고, 벌써 자기 카메라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법 구도도 잘 잡고, 찍은 사진을 자기 싸이홈에 올려달라고 엄마를 조릅니다. 아이를 키우면 시간의 흐름에 예민해지는지, 옛 글과 옛 사진을 보며 스스로 감회에 젖어 클럽 게시판에 다시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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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우영재님의 댓글

우영재

감동적인 글 잘 보았습니다.
나중에 아이가 더 크면 해 주고 싶은 말이었습니다.

이창림님의 댓글

이창림

아름다운 글입니다. 따님에 대한 사랑 그리고 사진찍기의 즐거움이 함축되어 있는, 읽으면 읽을수록 마음이 촉촉해지는 글입니다.

사진도 너무 좋습니다.

최준석님의 댓글

최준석

공감이 가는 아름다운 글입니다. 좋은 글과 사진 ...감사드립니다.

전용석님의 댓글

전용석

이곳에서 지금까지 접했던 글중 가장 제 마음에 와닿는 글인것 같습니다. 좋은 글 정말 고맙습니다.

김철근님의 댓글

김철근

자식에게 지식을 넣어줄수 있는사람은 부모외엔 아무도 없습니다.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박유영님의 댓글

박유영

딸을 키우면서, 딸에게 하고팠던 말들을 조목조목 짚어 놓으셨네요.
읽으면서, 눈가가 촉촉해지고 가슴이 여기저기 뭉클해집니다.
좋은 글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하석준님의 댓글

하석준

좋은 글이지만, 알 수 없는 미래를 생각하니 두려움도 생기지만,

'아빠의 넓은 마음'편에서 가볍게 웃으니 마음도 가벼워집니다.

고운 글 감사드립니다.

정유석님의 댓글

정유석

현재덕님 따님도 .."다연"이군요 .. ^^;
제 첫째도 다연이구, 5살이며.. 역시 .. 자기 카메라를 가지고 있지요 ..
반갑습니다 ...

곽영준님의 댓글

곽영준

좋은글 감사합니다.

저도 이번 크리스마스때에는 막내딸에게 디카 선물줄 생각입니다.

이완재님의 댓글

이완재

정말 좋은 글이네요. 따님이 아니라 사진을 하고싶은 사람이면 누구나에게 해당되는....
고맙습니다.

주장일님의 댓글

주장일

감동적인 글... 정말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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