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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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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현재덕
  • 작성일 : 07-01-07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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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접속하지는 않지만 메신저라는 것을 쓰기는 한다. 무슨 기능이 있는지 새 버전이 나왔는지 그런 건 잘 모른다. 이것저것 여러 프로그램을 띄어놓는 일도 좋아하지 않아서 MSN 메신저 하나만 쓰는데, 그나마 누가 말을 걸어도 건조하게 달랑 한 마디로 대답하고 마는 식이니 애초 이 현대 커뮤니케이션의 총아가 내 생활이나 사교에 영향을 미칠 일은 없을 듯 하다.

얼마전 메신저의 닉네임을 바꾸어 놓았다. 내가 봐도 스스로 우습기는 하지만 '늦깎이 스피드광'이다.

'규칙준수의 강박'을 떨치지 못하고 있는 내가 스피드광은 무슨 스피드광. 다른 사람한테 욕 들을 일 하는 걸 그렇게 두려워 하면서 달리기는 무슨 달리기. 기것해야 앞이 완전히 텅 빈 차로에서 급가속해 찔끔 달리다, 시야에 차가 나타나면 급감속하는 어설픈 단거리 스프린터 노릇이 고작이다. 그 소심한 스피드광(?) 기분을 내느라 휘발유만 턱없이 잔뜩 써버리는 일이야 따져볼 필요도 없이 한심한 짓이다.

그런데, 그게 즐겁다. 눈물나도록 즐거워서 스스로 잘 믿어지지 않는다. 회사 일이 잘 안풀리거나 누군가와의 관계가 주는 부담에 마음이 무거워지거나 그냥 아무 것도 아니지만 숙명처럼 삶에 달라붙는 존재와 시간의 압력에 숨이 막힐 때, 그냥 달리고 싶어지고, 달리고 나면 행복해진다. 아니, 행복이라기보다 카타르시스라고 하는 쪽이 더 적확한 묘사일까, 어쨌든 달리면 대뇌피질의 주름 하나하나 그 골짜기 속까지 차가워지는 것 같다. 사용하지 않던 심장벽의 실핏줄 한 가닥 한 가닥에까지 차갑고 파란 피가 흐르는 것 같다.

그것은 극도의 집중이다. 일종의 공포이기도 하다. 워낙 겁이 많기 때문에 조금만 속도를 올려도 핸들을 잡은 손에 땀이 밴다. 원래 한 손으로 운전하는 내가 그 때는 두 손에 꼬옥 힘을 주어 스티어링 휠을 움켜잡는다. 눈은 날카롭게 앞을 보고, 후사경을 들여다보고, 타코미터와 터보게이지를 본다. 멀티코어 CPU처럼 온갖 복수의 정보가 눈과 손과 뇌 사이를 달린다. 그 순간, 나는 백 퍼센트 움직이고 있다. 백 퍼센트의 '나'가 된다. 눈짓 한 번, 손가락의 움직임 하나 낭비되지 않는 백 퍼센트의 나.

왜일까. 묻고는 바로 답을 말한다. 조금은 슬픈 답이다. 나는 실상 점점 백 퍼센트의 나에서, 백 퍼센트의 순간에서 멀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아는 때문이다. 머리와 몸이, 기억과 운동능력이 급격한 곡선을 그리며 아래로 떨어져가는 것을, 오히려 전보다 더 예민해진 관찰력으로 들여다보는 기분이란, 끔찍하고 고통스럽다. 그리고 그보다 더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것은, 이 몸뚱아리와 두뇌의 쇠락이 아니라 그 전체로서의 내가 의탁하고 있는 세계와 그 세계를 이해하는 내 사유의 쇠락이다. 부인할 수 없는 것- 나는 점점 움직이지 않게 되고 있다. 정말 세계의 속도가 느려지고 있는 건지 내가 더이상 따라잡을 수 없기에 그 속도가 느려진 것처럼 느껴지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세계가, 삶이, 사랑이, 점점 느려진다. 점점 사소해진다. 점점 공기처럼 투명해진다. 그것을 즐기고 감상하고 칭송하는 시인들을 여럿 보았다. 나도 그렇게 되어야 하는 건가, 나도 그렇게 될 수 있는 건가, 나도 저절로 그렇게 되는 건가. 아무것도 분명하지 않다.

내가 움직여 세계에 닿을 때, 그렇게 파악되던 세계는 이렇지 않았다. 세계가 움직여 겨우 나와 닿게 되는 이 곳은 아직 내게 너무 낯설다. 전혀 준비되지 않은 몸과 마음의 차림으로 여기에 닿고 보니, 어쩌면 이 비가역의 세계를 거꾸로 되돌아 맹렬히 달려갈 힘을 가진 백 퍼센트의 내가 그렇게 그리워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반대로, 세계가 맹렬히 내게 달려와 닿는, 그 죽음의 순간은 그렇게 공포스러워 하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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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임규형님의 댓글

임규형

가속 페달을 끝까지 밟는 심정으로 글을 읽게 되는군요.
8년전, 일년여 동안 일주일에 3, 4회 야간 운전을 거칠게 해본적이 있습니다.
심장이 뛰는게 온 몸에 느껴질 정도로.....
이유는 하나, 쓰러지듯 빨리 잠들고 싶어서 였지요.
잠들지 않으면 밀려드는 생각을 감당할 수 없어서 였습니다.

전부길님의 댓글

전부길

아! 이 글이 왜 이렇게 가슴에 와닿는거죠?

현재덕님의 댓글

현재덕

누구나 나이들 수 밖에 없는 것처럼
누구나 비슷한 마음이라는 게 있는 거 아닐까요...

한율식님의 댓글

한율식

일백퍼센트의 나에서... 멀어지고 있는 나...
흑... 저도 요즘 그렇습니다...ㅠ_ㅠ);;

권태현님의 댓글

권태현

스피드는 내삶의 다른것이 아니지만...
저는 요즘 M6가 하나의 요술봉입니다.
이거만 손에 쥐면 .................
변신을 합니다. ^^

이재정님의 댓글

이재정

얼마전까지만해도 스포츠 투어러인 혼다 VFR800을 탔었습니다.
투어링백에 카메라가방(텐바 구형씨리즈 중에 꼭 맞는 싸이즈가 있더랬습니다) 넣고 빈 틈에 완충제 채워 넣고 새벽녘 길을 나서면 아침 8시전에 양평-홍천간 고속국도에 다다릅니다. 그곳에서는 무아지경입니다. 모든 신경도 곤두섭니다. 고개를 15도만 더 숙이면 계기판에 속도계를 볼 수 있지만 그 짧은 순간에 노면의 변화를 놓칠까봐 앞만 보고 달립니다.
목적지인 구룡령에 도착하면 환상적인 와인딩코스가 기다리죠. 구비구비를 쓱쓱 스치며 코너링하며 정상에 오르면 생태터널 아래에서 땀을 식힙니다.
그곳에는 어느 해인가 필름통에 글을 넣은 타임캡슐도 묻어 두었죠. 그리고 혹 내가 라이딩하다 사망시 재를 뿌릴 형제같은 나무 한그루도 있고요.

이제는 모든 취미 접고 사진만 하고 있습니다. 잘 찍는 재주는 타고 나지 못해서 자가 인화하는 재미를붙이고 살고는 있습니다만

예전에 300킬로에 가깝게 내달리고는 아무일 없이 집으로 돌아 올때의 그 묘한 기분이 그리울때도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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