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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싸고 짐버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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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 노왕구
  • 작성일 : 04-08-22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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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째 하던 짐정리가 어느정도 윤곽이 드러나고 있는중이다. 결혼후 열번에 가까운 이사지만 짐싸기가 갈수록 어려워 엄두가 안나는 일이다. 이삿짐센터 직원들에게 시키면 될일이지만 이참에 갈수록 늘어나는 짐을 대폭 줄여 이른바 살림살이를 구조조정하기로 한 것이다. 앞으로 지금보다 적은 집으로 갈 확률이 99%에 달하는데다가 당분간 벌이도 신통치 않을테니 이제 더욱 검소하게 살아야 할 이유가 분명해진 까닭이다.

한 인간이 살아가는데 이토록 많은 짐이 필요한가, 이토록 많은 쓰레기를 만들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헤아리기 어려운 쓰레기가 발생하였다. 오래된 책 스무박스, 성하지만 안입는 옷, 다시볼 일 없을 것 같은 현상된 필름, 좀 큰 콤퓨터 모니터, 유행이 지난 노트북, 볼펜 껍데기와 어디에 쓸것인지 알수도 없는 각종 전선코드, 4년째 못입어본 잠수복 두벌등. 큰 책상, 식탁등은 아는 사람에게 주고, 그나마 임자없는 것는 초저가에 판매하고 흑백작업실에 있던 대형 이젤은 누군가에게 빌려주고... 그래도 여러박스분량의 레코드판과 CD는 다행이 언젠가 들을 일이 있을 것 같아 사무실에 갔다 놓고, 어떤것은 다른사람집에 맡기기로 하였다. 주는 것도, 맡기는 것도, 보관하는 것도 일일이 정성들인 분류 정리와 포장이 필요한 법이니 몇날이 걸리고도 모자라는 셈이다. 이토록 많은 것을 지니고 살았구나. 사고나서 한번 사용해보기도 급급했던 것을 이토록 오래동안 머리위에 지고 살았구나 하는 생각과 반성이 뒤를 잇는다. 가지는것을 싫어한 조각가 쟈코메티는 비오는 날 우산도 없이 코트로 머리를 덮고 다녔다고 했던가.

가지고 가는 짐이야 별 것 없지만 그래도 이것이 필요하지 않으려나, 이런 책가지고 가서 읽어야 하나 하는 고민, 손톱깍이도 없으면 아쉬울텐데 하는 마음들이 간단치 않은 고민거리다. 다행이 오늘 대략의 짐을 분류하고 싸두었으니 떠나는 것이 실감도 나고 한편 큰 짐을 벗은 것 같은 마음도 있다.

그래도 무엇보다 홀가분한 것은 카메라 장비를 정리하여 철제 가방에 넣었다는 일. 아직 렌즈 하나를 처분하지 못한 상태지만 나도 드디어 '장비결핍상태'로 바뀌었다는 점인데 무척 마음에 드는 일이다. 가벼운 중형하나 소형카메라 1대, 렌즈 3개, 쓸일이 희박해보이는 flash하나, 아주 가벼운 짓죠 삼각대 하나가 전부인 셈이 되는 것이다. 결코 적다고는 할수 없는 장비편력과 시행착오를 겪은 결과치고는 참으로 단순한 line up 이된 것 같다. 과하면 부족한 것만 못하다고 하였던가? 따라서 지나치게 많은 장비는 오히려 집중력을 떨어뜨린다는 생각이 이제 막 신념으로 바뀌고 있는 중이다.

잠깐 다른 분들 이야기좀 하자면... 사진가 C선생님은 허리에 차고 다니는 싸구려 디지철 하나로 많은 작업을 하고 있는데 그가 요즘 구하고자 하는 카메라는 다름아닌 olympus pen이다. 이유는 half size film을 쓰니 절약된다는 것. 그는 한달에 한번꼴로 전시회를 하는 분이다. L 선생님은 leica R7에 28mm 하나로 대부분의 작업을 하시는 분. 두분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나가시는 분들에 속한다. 원로이신 Y교수님은 가방에 m6 두대에 hexar1대이니 그중 사치가 심한 편에 속한다. 3대가 되는 이유인즉, 카메라의 메카니즘에는 어두워서 렌즈하나씩 달고 그때마다 꺼내쓸 요령이었는데, 그마나 지금은 힘들어 2대로 줄이신 것이다.

적어도 그분들과 조금 같아지는 것만으로도 내겐 위로가 되는 셈인데, 사실 중량때문에 더 이상의 장비는 불가능한 점도 장비 정리에 큰 이유가 되었다. 카메라를 정리할때마다 내가 이렇게나 많은 액수의 장비를 가지고 있었나 하는 생각에 놀라게 된다. 그중 사서 한두번 쓴 것도 있고, 본지 10분도 안되어 산 카메라도 있었다. 살때보다는 분명 가슴아프도록 적은 액수에 팔게 되고, 정리를 서두르다 보면 마치 장사하는 사람처럼 되는 것 같아 편치는 않다. 그래도 한번씩 물건을 정리하고 나면 역시 잘했다는 생각. 계속 하기로 한 작업범위를 보아도 충분하지만 혹시 다른 작업으로 언젠가 바뀐다 하여도 큰 불편없이 쓸 것 같다. 굳이 욕심이 있다면 중형 50mm 정도가 장차 필요하다는 것인데 그때 가서 생각하기로 할 일이다.

이런 정도의 장비로 족하게 될 것을 굳이 많은 착오를 겪었나 하는 마음이다. 이미 수많은 선배들이 일러준 충고에서 결코 빗나가지 않았던 것을 애써 당해보고 나서야 깨닫는 것인가? 어쨌든 특별히 보충한 똑딱이용 디지털 하나를 포함하여 적어도 1년은 이 장비로 살아가야 할 일이니 이정도의 경험을 하고 또한 홀기분한 기분, 잘되었다고 느끼는 것 그래도 감사해야 할 일 아닌가 싶다.

이런 저런 짐도 나가고 버리고난 지금 홀가분하고 자유로운 기분에 빠진다. 이미 조금씩 버리고 또한 끊어버리는 사유의 과정을 약간 선험한 결과인 듯싶다. 작업에 잘 집중하고 내 마음에 만족스러운 결과들이 나올 것 같은 근거없는 낙관에 빠지게 되니 약간 기분이 좋기도하다. 앞으로 좀더 단순하게 살 일이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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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이상제님의 댓글

이상제

禪門에 보면 '공부는 버리기'라 했는데, 사진 역시 이와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행복이 있다는 성현의 말씀도 있듯, 마음이 홀가분한 속에서 좋은 생각,
좋은 사진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나른한 월요일 오후, 머리가 개운해지는 차 한잔 같은
좋은 글 감사합니다.

서정현님의 댓글

서정현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태음인의 습성상 꾸역꾸역 모아두길 좋아하는 성격탓에 조금씩 조금씩 용돈 모아 산 카메라 장비들... CD... 관심분야 책들..
아직까지 저에겐 한개한개가 그것을 살때의 추억때문에 무슨 보물단지 되듯이 안고 있지만, 저도 언젠가 선생님 같은 연륜에 다다르게 되면...소유 무소유의 진리를 깨닫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새로이 눈에 뜨인 것에 혹하여 새로운 렌즈, 새로운 바디를 사게되면.. 그 직전까지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바디와 렌즈가 찬장에 자리잡게 되고.. 새것에 눈이 먼 주인을 목빠지게 기다리는 신세로 만들어 버립니다.
언젠간 저도 서로 마음이 통하는 하나의 바디와 렌즈로 마음에 거침이 없는 사진이란 취미를 즐기게 될 날을 상상해 봅니다.

담백하고 자극적이지 않는 글로 후배에게 너무 큰 가르침을 내려주십니다. 감사합니다.

임규형님의 댓글

임규형

여덟대의 카메라에서 세대로 줄인 요즘은 그런 생각이 듭니다.
쓰다가 쓰다가 자주 쓰는 것만 남게 되겠지....그럼 나머진 미련없이 털어야지...
쉽진 않겠지만 카메라와 적당히 헤어지지 못하면 사진이 분요스러울 뿐일거라는....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이진영님의 댓글

이진영

전 결혼하면서 P&S필름카메라 하고 디지탈카메라 하나씩 남겨놨습니다.

무게를 너무 줄여도 마음이 허전해서 못견디겠더군요.

JK이종구님의 댓글

JK이종구

참 좋은글입니다.
저도 가끔 사람이 사는데 왜 이렇게 많은 짐이 필요할까 라는 생각을 합니다.
가끔 방정리를 하면서 매번 느끼는거지만, 이번에 버리지 않은 짐은 다음번에 버리겠지 하면서...
결국 나는 쓰레기더미에서 살고있구나 하는 생각하곤 합니다.
어차피 이세상 소풍 끝나는날, 지고갈것도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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